행성적 차원에서 인간의 배설과 순환을 생각하기 / 오영진
최종 수정일: 7월 24일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 SF적 사고실험만의 효용성이란 것이 있다. 문제 삼은 사건은 도달하지 않은 미래지만 분명한 시공간과 정합성을 지닌 객체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해당 문제설정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시스템과 구조에 대해 통찰할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미래를 통하면 낯설게 보기가 가능해진다.
인간의 배설과 관련해 가장 급진적인 상상력을 담은 SF 속 장치는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 <듄>에 나오는 프레멘의 사막복 스틸슈트(Stil Suit)일 것이다. 그것을 입은 자들의 모든 배설물은 내부에서 정화되어 수분으로 전환된다. 착용자가 튜브를 통해 이를 다시 먹을 수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행성은 아라키스라는 곳이며, 모든 지역이 사막화가 진행되었으며 그 안에는 샤이 훌루드라는 거대모래벌레가 살고 있다. 이 슈트는 단 한 방울의 물이라면 기꺼이 살인도 일삼을 수 있는 프레멘의 가혹한 상황을 드러내는 장치다. 동시에 아라키스라는 행성에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로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물질대사 순환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도 드러낸다.

그들은 적은 물론 자신들의 동료가 죽었을 때도 신체를 짜내어 물을 얻는다. 아주 가끔 물을 낭비할 때가 있는데 낯선 사람을 환영할 때다. 당신을 위해 기꺼이 내 수분을 내놓겠다는 의도로 상대 앞에 침을 뱉는다. 행성을 처음 방문한 자들은 무례하다고 느끼지만 그들 행성에서 잠시나마 살아보면 그 호의를 느낄 수 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영화 <듄 파트1>(2021)에서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통곡을 하며 사막 한 가운데서 밤을 보낸 주인공 폴 아트레이드와 어머니 제시카가 밤새 흘린 눈물을 정화된 물로 다시 제공하는 생존텐트도 등장한다. 폴은 제시카에게 정화된 물을 건네며 말한다. "우리의 땀과 눈물이에요." 자신의 심적 고통의 결과물을 다시 마시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들은 가혹한 환경을 이겨낸다. 아라키스에서 물은 귀중한 자원을 넘어 종교적인 숭배물의 지위를 얻는다.
아티스트 마크 드 바커(Mark de Bakker)는 초기 스틸슈트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원시적인 비전을 만든 적이 있다. 원작 <듄>의 설정에서 10,000년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견을 낸 것으로, 그것은 의복 형태의 착용 가능한 기계적 장치로 발달하기 이전에 어쩔 수 없이 행해야 했던 몸에 대한 성형수술처럼 가까워 보인다. 호스처럼 연결된 외부적인 장기를 통해 심장과 각종 장기 그리고 항문과 성기는 입과 연결된다. 그들의 몸은 물에 대한 자가순환적 목적을 향해 인위적인 진화를 이룬 것이다.

그야말로 <듄>의 세계관에서 아라키스는 물의 낭비 없는 재순환이 극단적으로 실험되는 곳으로 보인다. 생각해 보면 사막복은 그것을 착용한 자의 항문과 입을 연결하는 극단적인 기계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들뢰즈,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주장한 기계론이 떠오른다. 젖가슴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고, 아기의 입은 이 기계에 연동된 기계라고 주장하는 들뢰즈의 기계론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계만이 기계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기능과 욕망을 가진, 모든 작동하는 객체가 기계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은 '연합하고 자유롭게 배치될 수 있는 단위'로서 '기계'들의 자유로운 배치의 상상력을 유도한다. 통상 항문과 입이 연결될 가능성은 없지만 프레맨의 사막복은 연합시킨다. 하지만 사막복의 아이디어가 천진하면서 자유로운 상상력의 결과물일까? 아니면 절박함 끝에 어쩔 수 없이 끌어낸 극한의 아이디어일까?
순환하지 못하는 세계의 사막화
사막복의 아이디어는 현실에 영감을 주어 아이디어를 주기도 한다. UC 버클리의 물 전문가인 데이빗 세들락(David Sedlak)은 2014년 발간된 책 [Water 4.0]의 저자다. 그는 빗물 유출수에서 가정 하수에 이르는 폐수를 식수로 재활용하기 위해 도시 버전의 스틸슈트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라키스의 가혹한 환경에서 프레멘의 특수장비였던 상상 속 스틸슈트는 이제 현대의 도시가 착용해야 할 거대한 시스템 보철물의 은유가 된 것이다.
새들락은 역삼투막이라는 물질을 통해 물을 통과시키고 소량의 과산화수소를 첨가하고 자외선에 노출함으로써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의 엔지니어들은 25년 넘게 쓸모없는 폐수로 여겼던 것을 음용수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방치된 물 인프라에 투자하고 대규모 중앙 처리장을 더 분산된 자동화 공장으로 교체함으로써 우리는 가장 소중한 자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상상력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점차 심해지는 물 부족 사태와 급격한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우리의 행성 지구가 아라키스처럼 변해가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소설 <듄>에서 사막복은 사막이 되어버린 아라키스에 대응하는 프레멘의 처절한 노력을 대변한다. 동시에 반대로 그만큼 행성적 차원에서 물질대사의 순환이 엉망이 되어버린 아라키스의 기후를 증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생각해보면 프레맨들은 작은 물방울조차 끝없이 순환하게 만드는 기술을 연구할 수 있는 집단이다. 그런 그들이 아라키스에 비가 내리게 해서 행성적 차원에서 물이라는 물질을 순환시키지 않을 리 없다. 실은 그들은 이미 생태연구소를 설립하여 아라키스의 대대적인 물순환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파이스라는 전우주적 환각물질이 그들의 모래사막에서 발견되면서 우주 황제를 비롯해 모든 상인과 가문들은 아라키스의 사막을 가속화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매우 풍자적인 이야기로 읽힌다. 우리의 현실에도 여전히 진행중인 아랄해의 비극을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아랄해는 카스피 해의 동쪽, 중앙아시아의 염호였다. 우즈베키스탄 북부와 카자흐스탄 남부에 위치한 세계 4위 규모의 거대호수였다. 구소련 시기였던 1950~60년대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의 물을 농업 용도로 전용하기 위해 카라쿰 운하라는 새 수로를 만들면서 아랄해의 고갈은 시작되었다. 기존에 아랄해로 흘러가던 물이 이 운하로 물길을 돌리면서 1956년부터 1986년까지 약 225 ㎦ 라는 엄청난 양의 강물이 아랄해로부터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자본의 흐름이 만들어낸 사막화라는 점에서 아랄해의 사막화와 아라키스의 사막화는 공통점을 지닌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할 뿐 아니라 아랄해 근처의 기후와 생태계까지 모두 바꾸어버렸다. 사막이라는 가혹한 기후는 단지 자연의 변덕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괴물 같은 자연이 되받아치는 응수인 것이다. <듄>의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는 작가 후기에서 <듄>은 생태소설이 되었어야 한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 거대한 서사가 중세풍 스페이스 오페라 이전에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류세는 인간과 지구 사이의 물질대사의 균형이 무너지거나 변형된 구간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동시에 합의된 지질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탈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인문학적 프레임으로 작동하는 반성적 프레임이다. 우리는 오늘날 <듄>을 인류세 시대의 리얼리즘이라는 관점으로 읽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현재 우리들의 세계는 단지 물의 순환만 엉망이 된 것뿐 아니다. 농사에 사용되는 인공비료에는 광범위한 효과가 있다. 이들의 이용은 광대한 양의 질소와 인을 생태계에 주입한다. 매년 대기에서 1억 2천만 톤의 질소가 공장에서 채취되고 농업에 사용되는 비료를 생산하기 위해 2천만 톤의 인이 채굴된다. 질소와 인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양을 생물권에 추가한다. 농지에서의 유출수는 대개 많은 양의 비료를 강과 개울로 운반하여 결국 바다로 유출한다. 이 비료 유출이 해양생태계를 파괴한다. 반면, 인간과 가축들의 배설물이 퇴비화되어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질소와 인은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격리되고 버려진다. 즉 너무 많이 자연으로부터 착취하고 동시에 이미 있는 재활용 자원을 그대로 자연계의 순환벨트에서 탈구시켜버린다. 우리 행성 지구는 아라키스가 되어가고 있다. 지구적 차원의 스틸슈트는 발명이 불가능한 것일까?
차폐의 테크놀로지에서 순환의 테크놀로지로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보호장치에 의지해서 거대 시스템의 위험을 막아보려 한다는 점에서 사막복은 우리들의 테크놀로지의 성격을 쏙 빼다 닮았다. 우리들의 테크놀로지는 우리 자신의 문제까지만을 해결하고 그 외의 문제 인식을 차폐시키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도시의 열섬 현상의 근원에는 건물의 냉난방, 공장 가동, 자동차 운행 등으로 발생한 폐열이 있다. 이는 에너지를 사용해 가동되는 도시의 수많은 시스템과 연결된 자본의 흐름, 잠을 자지 않고 노동하고 유희하는 현대인의 욕망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 보기 보다는 더 좋은 에어콘을 개발하고 설치한다. 모두가 에어콘을 설치하는 시점에서 물론 도시의 열섬 현상은 더욱 가속화된다. 테크놀로지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개별적인 장애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쪽으로 발달하며 동시에 이러한 역량까지가 테크놀로지의 몫인 것처럼 한정한다. 나머지 문제는 사회적 문제 혹은 윤리적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 방식으로도 해결할 생각은 여전히 없으면서 말이다.
지젝은 자신의 책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 2002)에서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화장실 분석을 한 적 있다. 프랑스 변기는 용변을 보자마자 스위치 누를 필요도 없이 신속하게 구멍으로 빠져나가기에 혁명적이다. 독일 변기는 물도 없는 변기에 변이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있어 냄새가 독하다. 따라서 성찰과 반성을 하게 만들지만 관념적이다. 미국 변기는 물 위에 둥둥 떠 있고 스위치를 누르면 신속히 내려가기에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절반은 농인 이 말은 우리의 형이하학적 경험이 실은 형이상학적 구상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들이 배치된 기계 시스템이 실은 곧 우리들의 사고구조라는 또 다른 진실을 드러낸다. 스스로 어떤 시스템에 예속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똥을 누는 이 순간에도 내가 앉아 있는 변기의 디자인과 그와 관련한 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생각에 포획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물들이 무엇을 기여하고 행하는지, 그것이 어떤 형이상학을 강요하는지, 혹은 사물들의 일방적인 배치가 어떤 권력을 낳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젝의 농담을 응용해보자. 배설을 하고 그것을 대량의 물을 통해 쓸어 내려 보내는 우리들의 현재 배설 시스템은 각종 질병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또 한편의 귀중한 자원이 될 수 있는 배설물과 물을 손쉽게 내버리는 훈련을 하기에 자기 자신의 영역 밖으로는 생각의 끈을 연결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이는 나의 항문에서 나오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입에 닿을 수 있다는 상상 자체를 불허하고, 거부하게 만든다. 나아가 사회적으로 배설물로 은유되는 모든 것들은 터부가 된다. 배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과 권력의 문제이며, 우리 집 안의 변기가 아니라 변기와 연결된 수많은 기계들의 문제임을 감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인간의 테크놀로지는 오로지 자기 집 안을 다스리는 데만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우리의 항문은 우리의 입과 궁극적으로 맞닿아 있다. 배설물의 주요 자원인 질소와 인은 버리지만, 우리가 버리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미세 플라스틱 입자가 되어 생선의 입으로 들어가 우리의 입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항문과 입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다시 깨닫고 어떤 기계들의 배치로 다시 선순환 시킬 것인가이다. 물론 우리들의 현재의 시스템에서도 물은 여전히 순환되고 있다. 정화조와 하수도, 약품처리, 강으로 이어지는 기계적 배치는 도시 물질순환의 일부다. 단 효율이 좋지 않고 보다 긴 사이클의 순환을 염두에 두지 않은, 그저 자연이 되받아주길 바라는 방식으로 디자인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화장실과 배설물 관리가 시민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회와 야외 변소, 집단 변소, 적정기술 변소 등을 사용하는 사회 사이 간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배설물 처리 방식의 결과로서 어떤 사회적 관계가 출현하는가? 전치형은 <호흡공동체>(창비, 2021)이라는 책을 통해 에어콘과 공기청정기라는 기계 안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계급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러한 기계를 갖지 못한 가난한 자들의 절멸이 가속화한다. 이어 이들 기계가 인류세가 야기한 전지구적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근시안적인 차폐의 테크놀로지라 논평하고, 이에 응전하기 위해 호흡공동체라는 개념을 설정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늘날 배설공동체라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뜨겁고 더러운 공기뿐 아니라 모자라고 더러운 물도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듄>의 세계관에서 물의 행성적 순환을 맡는 것은 결국 스파이스라는 물질을 둘러싼 자본의 흐름이다.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담론과 전지구적 차원의 스틸슈트 시스템의 개발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코뮨주의적 변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질문할 타이밍인 것이다.
토론토의 GREEN BIN 프로젝트는 아기 똥과 반려동물 똥 등을 생분해 가능한 기저귀를 통해 수거하고 퇴비로 만드는 분리수거 프로젝트다. 물을 사용하지 않고, 도시 내 자원으로 재생하고자 하는 제도이자 기술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내 가정과 몸만 관리하는 차폐의 테크롤로지만을 상상했기 때문에 이러한 해법을 구상조차 못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기계를 새롭게 만드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석유⇒플라스틱⇒바다⇒미세플라스틱⇒바다생물⇒인간으로 이어지는 사이클보다는 농작물⇒인간⇒똥⇒퇴비⇒농작물⇒인간으로 이어지는 사이클이 더 장려되고 상상되어야 한다. 우리가 싼 것은 언제나 우리의 입으로 들어온다.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은 인간과 기술적 대상의 앙상블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네겐트로피를 발생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이 기계와 관계 속에서 자연의 에너지를 낭비시키고 무질서화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새로운 질서와 규칙을 마련해 새로운 잠재성을 끌어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금욕보다는 새로운 발명을 해야 한다. 사막화가 오기 전에 전 지구적 차원에서 배설물의 순환성에 대해 논의할 때다. 우리 행성이 아라키스가 될 수는 없다.
*이 글은 <똥의 인문학>(역비, 2021)에 실린 필자의 원고를 웹진형태에 맞게 개고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