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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해바라기 실종 사건 / 마준석

집 바로 뒤편에는 볕이 잘 드는 작은 마을 공원이 있다. 공원이라고 이름은 붙어있지만, 끝에서 끝으로 걸어가는데 30초도 채 걸리지 않는다. 야외 벤치에는 항상 어르신들이 앉아계시고, 수풀 뒤에는 몸을 숨긴 길고양이가 졸고 있는 그런 흔한 쉼터다. 매년 봄이 깨어나기 시작할 때에는 목련이 소담스럽게 피고, 그 뒤에 봄도 나른해질 즈음에는 수수꽃다리의 짙은 내음이 공기 중에 배어든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멀리서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창문을 막 열었을 때 그 녹녹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면, 이는 어김없이 공원에 꽃내음이 두텁게 내려앉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한편으로 그 진한 향기에 경이로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코를 어릿하게 만드는 시퍼런 생명력이 조금은 끔찍하게도 느껴지곤 했다. 여하튼 생활반경이 그리 넓지 않은 나는 수수꽃다리 덕분에 봄이 완연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두세 달 전 친구로부터 해바라기 씨앗을 선물 받았다. 껍질을 깨고 날름 먹어버릴까 하다가 땅에 심기로 마음을 먹었다. 수수꽃다리가 봄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것처럼, 여름은 내 손으로 피워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원 화단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잡초가 무성한 곳을 피해 20개 가량 씨앗을 심었다. 왜 여기에는 잡초가 없고 맨들맨들하게 땅이 드러나 있나 했더니, 흙바닥이 딴딴하고 거칠어 뿌리내리기에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래 땅주인인 다른 풀들을 뽑아내고 기름진 흙을 훔쳐올 수는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마른 땅에서 해바라기의 운명(?)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심지어 당시에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았기에, 매일같이 공원에 들러 물을 부어주었다. 보름이 넘도록 소식이 없자, 조금 조바심이 나서 액체비료도 한 팩 뿌려주었다. 오랜 침묵이 야속해지고 어쩌면 흙으로 되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 슬슬 체념할 무렵, 마침내 한 녀석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루가 다르게 많은 새싹들이 흙을 밀어올렸다. 전부 열댓 개 남짓한 새싹들을 보며, 나는 더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싹들이 찢기고 줄기가 꺾인 채 반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위에는 “공원 내 음주 흡연 금지”라는 못 보던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었다. 관리 직원분들이 현수막을 달면서 그저 무심코 새싹들을 밟은 것이었다. 원래 몇 그루 나무들과 잡초들만 자라던 화단이었으니, 주의 깊게 발밑을 살피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뜯겨나간 새싹들이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텨준 다른 새싹들이 고마웠다. 나는 그 일고여덟쯤 되는 남은 새싹들이 내 키만큼 무럭무럭 자라 저마다 꽃을 피워낼 것을 상상했다. 이번 여름 화단 한 켠이 노랗게 빛날 것이고, 어쩌면 내년 여름을 기약할 새로운 씨앗을 수확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내 해바라기는 여름을 고지하는 하나의 작은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물을 주려 공원에 간 어느날,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해바라기 새싹들이 전부 말끔하게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꺾인 줄기나 찢긴 잎새도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누가 밟은 것도 아니었다. 산책하던 개가 뜯어먹었다면 줄기라도 남아있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른 잡초들이 여전히 너저분하게 뻗쳐있는 것을 보아 제초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치 증발하듯이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어졌다. 정말 당황스럽게도 말이다.


분명 누군가가 뿌리째 뽑아낸 것이었다. 도대체 왜?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뜯긴 뿌리나 잎새가 흔적으로라도 남아있다면, 의구심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허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허전한 흙바닥을 바라보며 그 누군가의 손을 생각했다. 잡초라고 생각해서 뽑아내버린 것일까? 구청 허가 없이 공원에 꽃을 심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내가 매일같이 공원에 오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해바라기 새싹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본인 집에 옮겨심은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순조로웠던 나의 계획에 뜬금없이 들어온 그 타자의 손을 결국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누군가의 손을 종종 생각한다. 여름을 꽃피우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침묵 속에 기다리고 끝내 움튼 싹을 대견해했던 그 모든 시간들은 전부 사적인 것이었고 그렇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화단에 불쑥 들어온 타자는, 나의 욕망과 계획들이 순전히 개인적인 것으로만 남아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그러할 수 없는 까닭은, 해바라기를 심었던 공원이 애초에 공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줄곧 타자와 공유된 공간 속에 있었으면서도 타자의 개입 가능성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새싹들의 부재는, 역으로 타자의 현존을 그 어느 때보다도 뚜렷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다른 이의 손은, 실제로 목격하지도 못했고 그 의도를 알아낼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내 이해의 바깥에 위치한 가장 강렬한 방식의 타자가 되었다. 해바라기를 길러보려던 내 욕망을 뜬금없이 무너뜨린 이 타자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에서 자기(Selbst)와 타자 간의 핵심적인 문제를 드러내 보인다. 칸트가 자기의식의 문제를 인식론적 차원에서 하나의 주관 내의 형식적인 구조로 다룬 것과 달리, 헤겔의 특징점은 자기의식을 실천적인 차원에서 규명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헤겔에게 있어서, 하나의 자기의식은 그 자체 홀로는 스스로를 실현하지 못하고, 오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현실화할 수 있다. 타자와 관계 맺지 않는 자기의식은, 결국 자기 자신을 확신하지 못한 채 명목적인 것으로만 남게 될 뿐이다. 나는 타자에 의해 인정되는 한에서만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다. 나의 욕망은 타자에 의해 매개되는 한에서만 실제적인 욕망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주인은 노예에 의해 ‘주인’이라 인정되는 한에서만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주인이라 일컬어지는 그 사람이 어떤 주인됨의 증표를 자기 내에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인으로서 자유로운 나’는 실상 타자의 인정을 매개로 구성된 것이고 그런 점에서 타자에 의존하며, 주인은 실상 자유로운 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줄곧 타자와의 근본적인 관계 맺음 속에 있다. 이는 먼저 우리가 각자 개별적으로 존재한 후에, 그다음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야 나는 나의 나됨을 확보할 수 있으며, 그 관계는 나의 욕망이 구체적이고 또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유일한 지평이다. 그리고 나날의 일상적인 삶을 떠받치는 기저의 관계 맺음은 어떠한 관념이나 생각으로도 완전히 밝혀질 수 없을 텐데, 왜냐하면 어떤 공유된 생각이 비로소 우리를 함께 묶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은 근본적인 관계 맺음에 우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해바라기 새싹을 매개로 나는 타자와의 관계 맺음을 직시했지만, 그 매개물에 대한 이해는 서로 상이하다. 나에게 있어서 그 새싹은 순전히 나만의 것이자 나의 욕망의 대상이었지만, 어떤 다른 이에게 있어서 그 새싹은 주인 없는 잡초에 지나지 않았거나, 혹은 자신의 화분에서 기르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어떤 공통된 이해나 생각 없이도, 나와 타자는 모종의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 그 관계 맺음이 설령 오해나 갈등에 기반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공유된 생각이나 사상은 만남에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해와 오독 속에서도 여전히 타자와 만날 수 있다. 사랑이 결코 동일한 이해에 도달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모든 연인들의 좌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랑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눈먼 채로 있는가. 그 균열을 끊임없이 메우거나 적어도 짐짓 못 본 체하는 한에서만 연인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 사랑의 사건은 무한히 어긋나는 공동의 움직임 속에서만 출현할 수 있을 것이며, 연인들의 연인됨은 그 사이에 놓여 있다.


해바라기 실종 사건 직후에, 나는 꽃집에서 한 송이에 이천 원씩 해바라기를 사다가 방에 꽂아 놓았다. 내가 타자의 간섭 없이 온전히 개인적으로만 지닐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해바라기가 아니라 목 잘린 해바라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간이 야금야금 훔쳐먹어 금새 생기를 잃어버리고 만다. 어쩌면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기 때문에, 나만이 지닐 수 있는 꽃은 그저 불임이 되어버린 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직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무언가를 잉태할 수 있다. 꽃을 피워내겠다는 욕망은 끝내 나만의 개인적인 사건이 될 수 없다. 꽃은 공원 전체가 그리고 그 공원을 지나다니는 모두가 함께 피워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 타자의 손길을 결코 완전히 통제할 수 없고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지만,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야 비로소 생의 경이로운 순간이 발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첨언하자면, 사실 나는 일전에 해바라기를 심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씨앗 딱 하나만이었다. 해바라기는 기운차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그 샛노란 꽃송이와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은 분명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여름 장마의 비바람 속에서도 해바라기가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가 만들어놓고 간 버팀목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누군가는 나와 함께 해바라기를 보살폈고, 나는 그 친절한 그 타자의 손을 지금까지 줄곧 믿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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