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짜리 자기소개 / 오문석

지난 5월 24일 [뉴욕 타임즈]는 1면 전체를 1000명의 사망자 명단으로 채웠다. 코로나 19로 사망한 미국인을 추모하기 위한 기획 기사였던 것. 하지만 그것도 전체 사망자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 기사의 표제가 말해준다. “미국인(U.S.) 사망자 대략 10만 명,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그들은 단순한 명단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us)이다.” 여기에서 소문자 us(우리)가 대문자 U.S.(미국인)의 축소판임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활자로 된 거대한 공동묘지인 셈인데, 마치 1면에서 받은 충격에 100배를 더해야 그 실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받은 충격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말하자면 명단 작성의 원칙 같은 것. 사실 부고에 실린 사람들은 다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과 나이, 주소지 정도만 밝히는 것으로도 명단 작성은 충분했을 수 있다. 그런데 신문사는 해당 지면에 주소지 다음으로 그들 모두에게 한 줄짜리 간단한 소개(가령, ‘웃음이 많은 자상한 할머니’)를 허용했다. ‘죽은 자들의 자기소개’라고나 할까. 그 소개를 읽다 보면 알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이란 것이 그렇게 짧은 소개 문구 안에 모두 구겨져 들어간다는 것을 말이다. ‘세 자녀의 어머니’, ‘3년 전 미국 이민자’, ‘평생 바닷가에 살기를 소원했던 사람’ 등등. 그 짧은 문구들은 죽어간 사람들의 삶을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다. 의도치 않게 갑자기 중단된 삶. 그래서 그 문구들은 바로 죽기 직전까지의 성적표처럼 보였다. 더 살았으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을 성적표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천 명의 삶을 압축하는 데 신문의 지면 한 면이면 충분하다는 사실. 죽은 자들의 자기소개라는 것이 그만큼 압축적인 탓도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법’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줄짜리 자기소개는 산 자들의 자기소개가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망자를 기억하는 가장 쉽고 편리한 방식인 것이다. 그 문구들은 마치 공적인 기억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지극히 사적인 기억으로 남았을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가, 그 문구들은 죽음이란 결국 기억의 문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누군가의 죽음은 살아생전 그의 삶을 하나의 결정체로 만들 것을 강요한다. 그 기억의 결정체가 산 자들의 마음에 생긴 그의 무덤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 마음속 무덤이 훼손되지 않고 오래 가기를 염원한다. 불멸의 소망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비단 종교적 사후세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불후의 명작이라는 말은 불멸에 대한 예술가들의 오랜 소망의 표현이다. 그래서 모든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인 것이다. 특별히 선택받은 예술가들의 사후세계는 그 무덤이 훼손되지 않는 한 영원할 것이다. 비단 예술가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조차도 그런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아이를 낳고 일가를 이루고 족보를 만드는 것도 그렇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누구의 부모, 누구의 자식인 것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것이다. 족보는 죽은 자들의 명단일 뿐 아니라 불멸을 향한 범인들의 욕망이 소박하게 표현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이란 죽음 이후에 이어지는 그들의 새로운 삶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의 길이만큼 이 땅에서 그들은 더 살게 되는 것이다. 사후세계는 저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종교적 사후세계와 구별하여 ‘세속적 사후세계’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불멸을 꿈꾸는 방향은 이로써 둘이 된다. 저기와 여기. 양자는 많이 닮아 있다. 종교적 사후세계가 생전의 삶에 대한 보상처럼 여겨지는 것처럼, 세속적 사후세계 또한 망자의 삶에 대한 평가에 근거한다. 또한 종교적 사후세계의 향방에 대해서 망자에게 더 이상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세속적 사후세계가 어떻게 얼마나 지속될지에 대해서 망자는 전혀 개입할 수가 없다. 그 모든 권한이 전적으로 타인의 손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 사후세계는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심판인 탓이다. 죽은 자들이 남긴 무덤의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에 대한 산 자들의 마음 속 무덤의 크기는 그와 다를 수 있다. 진시황제의 거대한 무덤은 산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원히 나를 기억하라고 말이다. 불멸에 대한 그의 집착을 알고 있는 우리이고 보면, 물리적 규모에 의한 강요가 때로는 성공적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마음 속 무덤의 색깔까지 결정지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공적과 더불어 기억되는 폭력적인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최근 세 사람의 죽음이 화제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남긴 영화음악 작곡가. 정치인, 그리고 군인이 그들이다.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사후세계는 아마도 각기 다를 것이다. 길이만이 아니라 색깔도 다를 것이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사후세계를 한 줄에 구겨넣는 작업을 진행중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무덤은 산 자들의 싸움터가 되었다. 아마도 아직 응고되지 않은 기억의 전쟁터였음이 한 줄짜리 자기소개에 포함될 것이다.



그 사후세계를 살아서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들의 인생 멘토 톨스토이의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그것이다. 이반 일리치라는 판사 출신의 망자 이야기. 소설은 그의 장례식에서 시작된다. 당연하게도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법이 잠시 소개되고, 그 다음으로 소설의 대부분이 죽음을 선고받기 이전과 이후의 그의 삶을 그리는 데 바쳐진다. 물론 죽음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열거되겠지만, 그보다는 죽어가는 자들을 대하는 주변인들의 태도에 대한 서운함과 분노, 질투가 더욱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병을 얻어 죽어가는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마도 그의 사후세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관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그가 그러한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이반 일리치가 구멍 속으로 굴러떨어져 빛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빛을 발견한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여태 잘못 살아왔으며, 아직은 이 잘못된 삶을 바로잡을 기회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올바른 일’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물은 뒤, 조용히 귀를 이울이며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때 누군가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아들이 보였다. 그는 아들이 가엾어졌다. 아내가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입을 벌린 채 눈물이 코와 목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흐느껴 울며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아내가 불쌍해졌다. (중략) 그는 가족들이 불쌍했고, 가족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뭔가를 해야 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강요했던 것들, 즉 죽어가는 자의 고통에 대한 동정과 공감을 바라던 마음을 내려놓고 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산 자들에 대한 동정과 공감이 들어서고 있다. 판사로서 자신의 거만한 행동을 자신의 병을 판정하는 의사의 태도에서 발견했던 것처럼. 그의 삶의 방향이 180도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삶은 중단된다. 그것을 전달할 틈도 없이. 자신의 사후세계를 선고할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죽음은 이처럼 항상 언제나 늦게 찾아오는 것의 이름인 것이다.


오문석(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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