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여름, 홍대 걷고싶은거리의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서 가발에 원색 스커트, 총천연색 치장을 하고 농협과 국민은행을 외쳐 부르는 한 청년을 봤다.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노랫말과 리듬은 단순했지만 다소 전복적이었기에 친구들과 함께 분위기에 취해 소리 지르며 열광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도 몇 번 ‘아마츄어증폭기’와의 인연이 이어졌다. 같은 축제의 옆 텐트에서 각자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고, 그의 음반들과 단행본 <탐욕 소년 표류기>를 들고 와 적극 추천하던 친구도 있었는데 한받은 내게 음악보다는 독특한 캐릭터로 먼저 각인되었다. 그 후로 가내수공업의 방식으로 제작된 앨범을 구매하며 그가 직접 대구의 내 집 우편함에 앨범과 아내의 시집 선물까지 놓고 간 것을 보고 그 정성에 탄복했었다.
이후 <동아시아 자립음악 연구>를 구매하거나 책방 만유인력을 방문했을 때도 그는 언제나 판매와 소비가 아닌 ‘정서와 정성의 교환’을 통해 관계의 층을 두텁게 만들어 갔다. 사실 한받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부담된다. 이미 위키백과를 비롯해 그에 관한 인터뷰, 기사, 저서 등이 축적되어 있고, 앞서 언급한 두 저서를 통해서도 그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뷰를 빌미로 한받을 만나 나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이 어쩌면 나와 비슷한 질문,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죠? 어떻게 생각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죠? 라는 다소 나이브하고도 윤리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탐욕소년, 민중엔터테이너가 되다
한받의 2010년 저작 <탐욕 소년 표류기>를 보면 영화감독을 꿈꾸던 그의 20대와 ‘아마츄어증폭기’ 활동을 통해 좌충우돌, 망나니의 삶 속에서도 비틀비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민중 엔터테이너가 되어가는 그의 행보를 간략히 요약해 보자면 스무 살의 한받은 1993년 여름 방학, 대학 영상동아리의 회지를 만들기 위해 선배를 만나러 서울로 왔다가 보헤미안적인 홍대 앞의 공기와 기운에 매료되었고 홍대 앞에 오면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고 한다. 클럽 빵에 데모CD를 만들어 보내고, 오디션을 보고 공연을 시작하게 되면서 2006년 문화연대에서 FTA 반대 집회를 할 때 빵에서 활동하는 음악가로서 함께하게 되었고, 이후 빵이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연대공연을 하면서 ‘아마츄어증폭기’도 자연스럽게 연대했다.
그러다 대구에서 함께 영화동호회 활동을 하던 정용택 감독을 조우하면서 기륭전자 노동자 단식투쟁 문화제에서의 공연을 제안 받고 ‘야마가타 트윅스터’를 시범적으로 해보게 된다. 단식투쟁의 현장에서 댄스 음악을 틀고 춤출 분위기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호응도 있었고 가능성을 봤다. 그 현장에서 ‘처절한 기타맨’이 같이 공연을 했었는데 그는 매주 금요일 전태일 동상 앞에서 펼쳐지는 전태일 문화제에 한받을 초대했다. 전태일 동상 앞에서 공연을 계속하면서 전태일의 기운이 시나브로 들어와 의지와 에너지를 계속 함양 받았던 것이 아닌가? 한받은 그렇게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홍대 앞에서는 ‘아마츄어증폭기’라면 아는 사람도 있고 어느 정도 호응도 있지만 동대문 시장 바닥에서 아무리 노래해봤자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자립음악가를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2009년 크리스마스이브 홍대입구역 부근 칼국수집 두리반의 강제철거 소식에 그곳으로 가고, <뉴타운컬쳐파티 두리반51+>를 개최하는 등 음악을 기폭제로 531일간의 점거 투쟁을 펼치게 된다.
이제 곧 민중 엔터테이너의 시대가 올 것이다. 민중이 엔터테인먼트의 주요 소비층으로 대두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야마가따 트윅스터(Yamagata Tweakster)’가 민중엔터테이너에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싶다.
한받, <탐욕 소년 표류기>, 2010, 텍스트출판사, p.64.
선비 같은 아버지와의 어려웠던 관계와 그의 영향 아래서 수줍음 많고 조용한 소년이었던 한받은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 폭발적인 에너지가 색다르게 나오기도 했다. 분출하는 욕망과 지질한 현실을 노래한 ‘아마츄어증폭기’의 4집 앨범 <수성랜드>(2009)를 끝으로 그의 한 시대는 마무리되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 새 가족의 탄생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고 자립음악의 길로 더 큰 걸음을 내딛는 단계이기도 했다.
자본의 질서에 맞서 거꾸로 선 자립음악(人.터.Dependent Music)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야마가타 트윅스터’는 2011년부터 여러 투쟁현장과 호흡하며 만든 노래들을 수록한 앨범들을 발매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공연 중 짜파게티를 끓여 먹거나, 방송 중 관객을 데리고 ‘돈만 아는 저질’을 부르며 세트장 밖으로 나가버리거나, 숨이 턱밑으로 차오를 때까지 이단옆차기를 하고 여러 투쟁의 현장에서 땅을 거꾸로 딛고서는 퍼포먼스를 펼쳐 보이는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락페스티벌과 공연예술제에서 공연하는 한받을 보았고, 을지로 작은 클럽들에서 디제잉을 하는 한받의 소식을 들었으며, 코끝이 시리고 손발이 꽁꽁 얼어붙을 것만 같은 허름한 동묘 구제시장 한가운데서 스산한 국제음악축제를 진행하는 한받을 만날 수도 있었다. 전국의 투쟁현장을 뛰어다니며 크고 작은 무대를 마다하지 않고, 책방을 운영하며, <칠-인의 노숙자>로 이십년이 훌쩍 지난 후 영화감독의 꿈을 이루고, 성실한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남편이고자 하며, 그리고 신앙생활까지 하는 그의 종횡 무진한 생활 폭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수줍음이 많아 종종 모자 아래로 감춘 얼굴과 무대 위 트랜스의 경지에 오른 그의 모습이 주는 간극만큼이나 그의 일상 역시 경계를 훌쩍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한받이 지금까지 활동할 수 있게 된 힘은 홍대 앞의 공기에서 생성됐던 것 같다고 하는데, 자본의 공세 속에서도 홍대 앞은 하나의 작은 로컬 음악 씬으로 존속되어 왔고 거기엔 나름의 유희를 앞세운 젊은이들의 저항운동이 있었을 것이라 의미를 부여한다. 더불어 현장이 주는 에너지는 한받을 계속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거꾸로 서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두리반이라든지 포이동에서의 투쟁이 그러했는데 포이동은 화재 이후 재건마을이 되고도 몇 년간 마을잔치에 계속 초대해주어 가족과 같이 가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거꾸로 설 수 있느냐? 이단옆차기를 날리고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헤드뱅잉을 계속하기 위해 평소 체력 관리를 하냐는 물음에 그는 현장의 경험과 기억들이 쌓이면서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원이 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받은 일본의 환경 운동가 쓰지 신이치가 ‘덕분에’라고 풀이한 Inter-Dependence를 ‘자립’의 영어번역어로 제안하고 최종적으로 ‘人.터.Dependence’라는 혼종어를 제시한다.
사람(人)이 ‘터(장소)’에서 계속 발생시키는 음악이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연대하며 파장을 일으키며, 자본의 씬이 아닌 ‘덕분에’의 씬을 이루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자립이며 진정 모든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한받, 동아시아자립음악연구, 2019, 만유인력(꾸뽀몸모), p.33.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한받은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예술가라기보다는 엔지니어적인 마음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했다. 세상의 부품들이 망가지거나 고장 났을 때 수리도 해주고 싶고, 엔지니어는 자기가 드러나기보다 보조해주는 역할이니까 그런 마음으로 계속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 그가 말하는 ‘자립음악(人.터.Dependent Music)’은 현실을 기반으로 삶을 반영하여 자신의 체험과 이야기를 노래(음악)로 표출하는, 현실의 투쟁하는 사람들 사이로 다가가는 음악이다. 그리고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있도록 한받은 기꺼이 엔지니어의 역할을 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틈이 되는 책방, 만유인력
어릴 때부터 글쓰기와 책을 좋아했던 한받은 시인 아내를 만나 만유인력이라는 책방을 열게 되었다. 책방에 대한 꿈은 대만으로의 신혼여행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곳에서 24시간 책방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홍대 앞이 24시간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니 24시간 열린 책방이 있으면 술 취한 젊은이들이 들어와 책을 보고 대오각성하고 자기 삶을 새롭게 불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오랫동안 자본금이 없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2017년 마침내 만리동에서 시작하게 된다.
오래된 주택가 언덕에 있다 보니 24시간 운영은 하지 않지만 공연이나 다른 일이 있을 때도 문을 열어두어 무인책방이 되기도 한다. 서교지하보도에서 뮤지션들이 자유롭게 공연했던 기억, 경의선공유지의 정신 등이 스며든 만유인력은 한받 자신에게는 베이스캠프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하나의 틈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수익에만 매몰되어 수익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내치고, 발 디딜 틈이 없는 공간이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만유인력은 누구든지 들어와 쉴 수 있고, 돈과는 상관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인력이 작용하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공간이고자 한다.
원론적인 것을 탐구하고 싶었다던 한받은 실험하고 시도하고 부딪치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 왔고 계획을 세우거나 어떤 의도를 갖고 접근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 위주로 계속해오면서 거기서 재밌는 것들을 보아왔다고 한다. 그의 마음 밭을 이루는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자본에 대항하는 태도 역시 의식적이기보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했던 것 같다고 한다. 공간을 기꺼이 열어 공유지를 실험하고, 어떤 무대에서도 당당히 노래 부르는 한받에 대한 나의 마음은 2006년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받의 행보는 나를 웃고 울게 만들고 가슴 벅차게 만들기도 한다.
그가 완벽한 해답을 줄 수는 없더라도 거짓 같은 삶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유튜브에서 그의 공연 영상을 찾아 위로받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한번 찾아보면 좋겠다.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돈만 아는 저질이 가득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어둠에 빠진 사람들이 한받의 영상을 보고 어떤 위로와 힘을 얻고 있는지. 그리고 연대하는 삶의 현장에서 그를 꼭 한번 만나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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