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종교학은 비교적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학계나 일반 사회에 잘 알려진 형편은 아니다. 종교학과가 설치된 대학도 드물어서 전공자도 소수에 그친다. 학문 분과 간 장벽이 높은 현실에서 종교학에 대한 학계의 인식은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고 판단된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한국 종교학이 지나온 길과 최근의 흐름을 간단히 소개한다.
한국에서 근대적인 학문 체계가 성립된 이후 종교학은 나름의 전통과 공동체를 형성하며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근대 학문 대개가 그렇듯이 서구에서 출현한 종교학은 국내로 유입되어 새로운 환경과 조응하면서 한국 종교학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렇다면 한국 종교학은 어떤 고민을 안고 여기까지 왔을까. 그동안 한국의 종교학자들을 사로잡았던 문제는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았던 것일까. 최근 종교학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새롭게 떠오르는 과제는 무엇인가. 이런 일련의 물음들을 해명하는 일은 한국 종교학의 성격과 지향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한국 종교학사 전체를 조망하는 일과도 관련된다. 하지만 짧은 지면을 통해서 온전히 풀어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며 개인의 능력 밖의 일인 것도 분명하다. 여기서는 다만 자의적인 선택의 한계를 무릅쓰고 몇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 종교학의 단면을 스케치하는 것으로 그친다.
현재 국내에서 종교학과가 설치된 대학은 서넛에 그친다. 이 중에서도 최근 폐지를 고려 중인 대학도 있다고 하는데 녹록하지 않은 한국 종교학의 현실을 대변하는 듯하여 불편하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종교학의 역사가 짧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한국에서 종교학과는 해방 직후부터 국립대학교인 서울대에 설치되었다.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에도 있었으니 이 땅에서 종교학이 지나온 역사는 웬만한 학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한때 종교학이란 이름조차 낯설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학계는 물론 일반에도 종교학이 어느 정도 알려진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종교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예전에 비해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아서 씁쓸하기도 하다.
종교학에 관한 편견이나 오해라고 할 만한 태도로 다음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신학이나 교학, 종학과 같이 특정 종교의 신앙 및 진리 주장을 체계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호교론적 연구와 종교학을 동일시하는 태도가 있다. 종교학을 그 목적이나 방법과 상관없이 종교에 관한 연구라면 무엇이든 포괄하는 용어로 이해하는 데서 빚어진 오류이다. 호교론적 연구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 신학과 종교학을 동일시하는 관점이 주로 눈에 띈다. 둘째는 종교학을 비교종교학으로 여기는 관점이다. 본래 서구에서 종교학은 지리상의 발견 이후 다종교 상황을 맞이하면서 종교 간 비교를 통해 종교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종교학을 비교종교학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종교학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비교종교학이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호교론으로 변질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종립대학교 신학과나 교학과에 비교종교학이 커리큘럼에 포함되거나 비교종교학 담당 교수를 채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여기서 비교종교학 과목은 대개 종교 간 비교우위를 따지는 용도로 개설된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이와 같은 유형의 비교종교학은 종교학에서 추구하는 비교종교의 목적과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종교학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는 종교를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과 관련이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아직도 종교는 초월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존재와 연관된 현상이므로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대상으로 여긴다. 종교는 신학이나 교학처럼 처음부터 초월적 존재의 실재성을 전제한 채 신앙의 참됨을 입증하거나 옹호하려는 관심을 지닌 분야라면 모르되 근대적인 학문 체제 내에서는 연구 대상으로서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종교의 허구성을 주장하거나 반종교적인 견해를 펼치는 진영이라면 종교학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한국 종교학의 전개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출발점부터 학문으로서 자기 정체성 문제에 골몰한 흔적이 역력하다. 앞서 언급한 종교학에 대한 주변 환경의 몰이해는 그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학이 처한 내부 조건도 정체성 확립의 시급함을 환기하는 데 한몫했다. 5, 60년대 당시 국내 유일의 서울대 종교학과 커리큘럼을 참고하면 거의 그리스도교 신학 과목으로 구성되었고, 담당 교수진도 대부분 신학 전공자였다. 적어도 종교에 대한 중립적 접근을 유지해야 할 종교학과가 그리스도교 중심으로 치우친 상황은 누가 봐도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종교학과라는 제도적 장치는 마련되었는데 실제 운영은 그에 걸맞지 않은 모순은 그야말로 종교학 자체에 관심을 가진 종교학도들에게는 가장 우선해서 극복해야 할 장애였다.
한국에서 종교학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은 여러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종교학을 특정 종교의 자기장 밖에서 새롭게 정립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커리큘럼의 개정이라든지 교수진의 교체와 같은 제도적 개편 이외에 더 근본적으로는 학문으로서 종교학의 성격을 전면적으로 다시 가다듬는 일이 중요하였다. 종교학이 거리를 두어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교 신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대개 각각의 종교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진리가 신성할 뿐만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도 우월하며 심지어 절대적이라고 여긴다. 더욱이 종교란 신앙의 영역으로서 앎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종교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는 종교학이란 각 종교의 관점에서 볼 때 불필요한 학문으로 비추어질 공산이 크다.
종교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을 포함하여 특정 종교의 진리에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성립된 모든 분야와 철저하게 다른 길을 걷는 학문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분야들은 종교학의 연구 대상이라고 해야 적합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신학이건 교학이건 종교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종교학은 자신을 차별화하며 독자적 학문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종교학이 신앙의 영역인 종교를 연구 대상으로 취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는 무엇인가. 한국의 종교학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동원한 내적 논리나 방법론적 진술은 어떤 것인가.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적인 학문으로서 종교학의 가능성에 회의를 표명하는 분위기가 학계 저변을 감싸고 돌았던 점도 한국 종교학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또 한 가지 계기였다. 과연 성스러움의 영역, 초자연적 영역, 초월적 영역, 초역사적 영역 등의 용어로 묘사되는 종교가 근대적 학문의 연구 대상으로서 채택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는 종교학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요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근대적 학문 분과에서 전혀 연구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가령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등의 분과에서 종교의 실체를 해부하기 위해서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는 이미 학술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여기서 이러한 분과들이 종교를 연구한 인식론적 기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할 듯하다.
위의 근대적 학문 분과들이 종교를 연구할 수 있었던 배경은 한 마디로 종교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란 그 자체로는 허구로서 종교 아닌 다른 실재의 외피로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때 종교 연구는 종교라는 외피에 둘러싸인 실재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초월적 영역인 종교를 어떻게 연구할 수 있는가와 같은 회의론은 더는 제기되지 않는다. 종교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자연주의나 세속주의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이글에서는 일단 역사주의라 부르고자 한다. 역사주의에 대한 정의는 한 가지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역사주의를 논쟁이나 반론의 여지를 줄이기 위하여 가능한 한 소박하게 규정하면 다음과 같은 정도의 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역사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자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가리킨다. 역사주의는 역사란 신적 존재와 같은 타자의 개입 없이 인간 스스로 만든다는 관점을 취한다. 역사적 사건에 관한 설명이나 이해도 초역사적인 별도의 준거에 의존하는 일 없이 사건 자체가 지닌 고유의 가치나 구조적 연관성을 분석함으로써 달성된다. 역사주의가 근대성의 산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대성은 인간의 삶으로부터 초월성의 지표를 탈각시키려는 강력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종교학자 엘리아데(M. Eliade)는 근대사회에 팽배한 역사주의의 한계를 비판한 바 있다. 역사주의는 인류의 기나긴 삶의 역정 가운데서 가장 최근에 나타난 세계관이자 인식론에 불과하다. 인간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역사주의를 유일무이한 창구로 보는 태도는 오류이다. 엘리아데는 역사주의를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비판한다.
근대적인 학문 분과에서 종교를 연구했던 배경으로 역사주의가 끼친 영향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각 분과가 얻은 연구 성과의 자리에는 종교가 증발해 있다. 종교 연구가 종교의 소멸을 초래하는 상황은 당혹스럽다. 한국의 종교학은 종교가 종교 아닌 다른 것으로 환원되는 국면에서 어떻게 종교의 실재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근대적 학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을까. 종교학은 두 진영으로부터 학문적 가능성을 의심받는 가운데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진영은 모두 종교를 인식의 대상으로 설정할 수 없다는 데 입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양자가 그러한 견해를 취했던 배경은 다르다. 한쪽은 종교의 실재성을 독점하려는 의지가 강하지만 다른 한쪽은 종교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한국 종교학이 처한 과제는 종교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앎의 대상으로 다루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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