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연성화된 시대를 거치며 문화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대조류에 맞춰 마침 아날학파를 비롯하여 심성사, 미시사, 도시사 등 다양한 분야의 서양 연구들이 번역,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들을 곁눈질하면서 그들의 실천이 한국사를 서술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을지, 가능은 할지 여러 가지 모색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일 뿐이고, 다른 곳의 역사서술은 그곳의 사료를 가지고 실천한 하나의 서술 사례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물・유적은 어떠한 연구를 열 수 있는가
서울에서 나고 자라면서 사대문 안 도심을 사랑했다. 시험이 끝나면 친구와 경복궁 산책을 하다가 아직 조선총독부 건물을 쓰던 국립중앙박물관을 구경하고 교보에서 책을 사 오는 게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렇기에 대학 와서 답사를 다니고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것을 역사적으로 다뤄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을 때, 그 대상으로 궁궐을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무렵엔 서울 안의 조선시대 궁궐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만한 여러 가지 사건도 있었다. 경복궁은 왁자지껄한 논란 속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1995년) 고종대를 기준으로 삼아 전각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종묘와 창덕궁은 각각 1995년과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서울 안의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계속된 경희궁 발굴을 통해 정전인 숭정전 일곽과 그 주변 핵심 전각군의 유구가 드러나게 되면서, 이곳을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궁궐로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도교수였던 한영우 선생님은 조선시대 전공자로서 이러한 일들에 관여를 하셨고, 학생들을 데리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궁궐 영역 등에 답사를 다니면서 궁궐 연구를 독려하기도 하셨다.
여러 조건과 상황이 맞아떨어졌으나, 막상 궁궐을 연구하자고 주제를 잡고 보니 상당히 막막했다. 단순히 하나의 소재주의에 떨어지지 않는 연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궁궐을 미학적으로 다룰 것인가? 이 시기에 이런 유물・유적을 미학적으로 다룬 글은 ‘우리 궁궐 미학의 정수’라든가 ‘다른 문화와는 구별되는 차이점’ 같은 것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곤 했다. ‘무계획의 계획’이라든지 ‘자연미’ 같은 단어를 찾아내던 수준에서 설명이 조금 세련되어졌을 뿐, ‘우리 문화에 대한 찬탄’이라는 답이 정해져 있는 연구였다. 또한 이것은 역사성을 담지 못하는 설명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역사성’이란 시간에 따라 사회와 사람이 변화하며, 그 모습은 매우 개성적이고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만의 미학을 찾으려는 노력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역사상을 필연적으로 단순화시키고 그중 몇 가지만을 부조적으로 집어내어 그것이 원형이라고 설파하기 마련이다. 이런 식의 설명에는 그다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정치사적으로 궁궐을 다룰 것인가? 조선의 정치가 이루어진 핵심 장소가 궁궐인 만큼 정치사적 설명은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통로였다. 학부 졸업논문을 다듬어 낸 첫 논문인 광해군대 궁궐 건설에 대한 글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당대 경덕궁(경희궁)과 인경궁이라는 궁궐의 건설과정을 다룬 것이었다(1997 <광해군대 궁궐영건-인경궁과 경덕궁(경희궁)의 창건을 중심으로->). 그러나 궁궐에 대한 정치사적 설명은 대부분 그 결론이 ‘해당 사안의 목표나 동기가, 혹은 그 결과가 왕권 강화였다.’로 끝나기 일쑤였으며, 나의 논문 역시 그 한계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기에 마음 한편 불만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내가 보다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정치사 자체보다는 궁궐 계획의 이념이었다. ‘당대인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생긴 궁궐을 건설했는가’가 주 관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부를 시작한 초기에 접한 연구들에서는 흡족한 방법론이나 설명을 찾기 힘들었다. 대부분 해당 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역사성이 살아 있지 않았으며, 어떤 경우에는 현대 미학을 적용한 분석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의식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양감과 질감을 가진 구체적인 건축 구성물로부터 어떻게 추상적인 사상을, 계획이념을 추출해낼 수 있는지는 막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목조 건축은 기본적으로 관습적인 건설 관행을 따라 지어지기 때문에, 양식과 구조에서 어떤 이념의 변화를 읽어낼 만큼의 큰 차이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좌충우돌하다 찾은 한 가지 길이, 바로 조선 초 정도전이 경복궁의 전각 이름을 지으면서 남긴 기문(記文)을 분석한 것이었다. 유학자들은 도(道)가 언어에 담겨 있다는 의식에서, 주로 장소의 이름에 자신들의 지향이나 이념을 담았다는 착안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정도전이 남긴 기문에서 인용하는 경전이 고려 말 조선 초라는 특수한 시대적 맥락에서 어떻게 호출되고 재해석되었는지를 분석하면서 비로소 경복궁이라는 물리적 실체에서 당대의 사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읽어냈다는 약간의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경복궁 시대를 세우다≫(2018, 너머북스)는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 기문의 분석과 고려 말 조선 초 천도와 궁궐 건설로 이어지는 정치사를 결합하여 쓴 책이다.
유물・유적을 의미 있게 읽어내는 방식은 다양하다. 정치사, 사상사적 접근법 역시 유물・유적에 따라, 또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정치사의 서술이 단순히 권력의 의도만을 다루고 만족하거나, 동기와 결과를 혼동하거나, 단순히 강화와 약화라는 구도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사상사에서 항상 역사적 맥락 속에 사상을 배치하고 사상과 현실의 연결고리와 그 실재성을 항상 고민하는 것처럼, 유물・유적과의 연결고리와 실재성 역시 고민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전근대 동양의 도시사는 가능한가
어떤 소재와 주제를 잡든지 해당 시대의 총체적인 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 역사서술의 목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서는 궁궐에서 조선의 한성으로 소재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도는 해당 시대의 정치적 중심지로 그 권력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이기에 사상사적 접근을 도모하던 나에게 도성 계획의 이념이야말로 안성맞춤의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994년 정도(定都) 600주년을 계기로 서울학연구소나 서울역사박물관과 같은 기관들이 태동하면서 조선시대 한성 관련 자료들이 수집되고 연구들도 많이 배출되었기에 연구를 위한 조건도 좋은 편이었다.
막상 주제를 잡고 연구를 시작하자 조선의 한성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이 많아졌다. 당시는 이제 막 도시사 연구가 시작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연구 성과 자체가 그다지 많이 축적되지 않은 상황이었던 데다 한성에 대한 연구도 주로 조선 후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가 시각 자료는 물론 다종다양한 사료들이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에서 조선 후기 한성의 도시적 발달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에서 조선 후기 한성은 18세기 이후 인구가 증가하고 공간적으로는 성외로 영역이 확대됐으며, 상업과 계약적 임노동 관계가 발달하고 신분제도 이완되며 근대적 상업도시로 변모하는 장소로 설명되었다.
조선 후기 한성에 대한 설명은 유럽사에서 도시를 보는 관점과 관련이 깊었다. 유럽에서 도시는 문명을 보여주는 역사적 척도이자 근대가 발상하는 원천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중세의 도시는 외부의 권위로부터 독립하여 주민의 자치가 이루어지며 자유로운 공간으로 일찌감치 조명되었다. 주민은 시민으로 성장하여 봉건적 신분관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경제 관계를 맺었고, 이것이 근대가 발상하는 원천이었다는 설명이었다. 조선 후기 한성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시각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 후기 한성의 도시적 발달, 근대를 예비한 장소로만 주목하는 것은 일견 근대의 맹아를 찾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동양의 도시는 전제적 국가의 행정 중심지일 뿐이므로 서양과 같은 자유도시가 아니었다고 보는 베버의 도시론에 긴박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조선 후기의 상업적 발달만을 강조할 경우 그 이전 시기의 도시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론은 찾기 힘들기 때문에 베버의 도시론을 더욱 강화시키게 될 수밖에 없다. 비교사적으로 본다면, 조선 후기 한성의 도시적 발달 양상이 주변국에 비해 뒤처진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조선 후기를 강조하는 서술이 갖는 한계는 분명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조선시대 한성은 어느 시기이건 기본적으로 권력의 중심지이기에, 그 권력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소로 접근해야 한다는 관점을 택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 수도의 위상과 성격은 조선의 세계관(천하관) 속에서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집필한 논문이 <고려 말 조선 초 봉건제 이상 속의 수도 인식과 그 위상 – 천하 질서 속의 봉건과 수도>(2015)이다. 마침 서양의 도시사 연구에서도 이전의 ‘자유도시’는 일부 지역의 사례이며, 지역별 국가별로 다양한 형태와 성격의 도시가 존재했고, 국가권력에 따라 수도의 위상이나 성격도 다르다는 점들이 밝혀졌다.
조선시대 한성을 권력의 성격을 보여주는 장소로 접근한다면, 이제 문제는 그 권력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문제가 그렇게 깊이 고민된 바가 없었다.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교국가 고려’ 대 ‘유교국가 조선’이라는 단순한 구도 속에서 조선의 한성은 당연히 유교적인 권력의 장소로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미 고려와 조선을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을 재검토하는 여러 연구가 나오고 있었다. 근래의 여러 연구에서는 조선을 유교 국가라고 그렇게 단순히 설명하지도 않고, 고려를 불교 국가라고 그렇게 단순히 설명하지도 않으며, 두 시대는 좀 더 다층적이며 복합적인 층위를 지녔다고 설명하고 있다. ‘유교국가’, ‘불교국가’라는 말 자체의 모호성 역시 이러한 단순 비교를 주저하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권력의 성격을 설명하는 데에도 세심해야 하지만, 그 권력과 수도라는 공간의 관계성은 더욱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권력은 공간에서 ‘발현’만 되는 것인가? 공간이 권력에 영향을 미치는가? 미친다면 어떠한 방식과 기제를 통해 미치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여하간 궁궐에서 도성으로 주제를 확장하며 그 계획의 이념을 설명할 수만 있다면, 공간과 권력, 이념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를 위해서는 조선이라는 국가, 그리고 그 이전의 고려라는 국가, 둘의 관계와 성격, 변화의 면모 등을 설명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수도라는 공간을 들여다볼 때 더욱 잘 보인다는 점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 길은 생각보다 멀고 울퉁불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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