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비록』(韓末秘錄)이라는 책이 있다. 몇 해 전 한국은행이 규장각에 기탁한 고서의 하나이다.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필사한 책인데 필사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필사 범위는 원본의 본편과 결론까지이고 그 밖에 캉유웨이의 서문이나 신규식의 후서(後序), 박은식의 서언(緖言) 등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한말비록』의 가치를 알아볼 단서를 하나 발견했다. 『한국통사』 원전을 읽다가 오자로 의심되는 글자[更]를 찾았는데 『한말비록』을 보니 올바른 글자[臾]가 기입되어 있었다. 예상 밖이었다. 원본은 정식 출판물이고 필사본은 나중에 이를 옮겨 적은 것인데 필사본이 원본의 잘못을 바로잡는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 ㅜㅜ

『한국통사』는 명색이 한국의 고전으로 평가되는 책이지만 현대 한국인이 이 책을 이해하는 수준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원본 교감이 완전하지 못함은 물론이지만 번역본 역시 적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일찍이 ‘백암 박은식 선생 특집호’로 꾸며진 『나라사랑』 제8집(1972)은 박은식의 유문과 이에 관한 연구자의 논집을 모았다. 서지학자 백순재는 해방 직후 박노경의 번역본을 검토하고 번역본의 7가지 문제점을 제시했다. 1. 장(章)의 누락. 2. 행(行)의 누락. 3. 심한 초역(抄譯). 4. 목차 순서 도치. 5. 원본에 없는 내용 첨가. 6. 원문 내용과 다른 번역. 7. 번역본의 장(章)에 다른 장의 글이 혼입. 그는 오역 문제는 차치하고 근본적인 문제만을 지적한다고 밝혔다. 이것은 『한국통사』에 국한된 논의이지만 당시 한국의 번역 세태를 고발하는 귀중한 글이다. 이에 앞서 이 책의 선구적인 번역은 1917년 미주 한인사회에서 이루어졌다. ‘하와이 한인 문학계의 태산북두와 같은’ 김병식이 번역한 책이라는데 원문의 정확한 이해가 반영된 번역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박은식이 「서언」에 쓴 ‘生丁陽九’(생정양구)를 ‘정사년 구월에 생하여’라고 잘못 번역했는데, 후일 박은식의 출생 연도를 1857년으로 오해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미주판 한글본은 『한국통사』의 대중적인 이해에 기여했다. 한글 문체에 익숙한 대중을 위해 원본에 없는 표현도 삽입하고 초역도 불사했다. 원본에는 본래 캉유웨이의 서문도 있고 신규식의 후서도 있지만 모두 삭제되었다. 이 영향인지 오늘날 『한국통사』의 번역본에서 이들의 글을 찾기 어렵다. 이로써 이 책의 메시지가 지은이의 서언과 결론에 의해 전달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면 이것은 원본의 원형에서 멀어진 잘못된 감각이다. 원본과 번역본 사이에는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본래 원본은 캉유웨이의 서문, 박은식의 서언에 이어 ‘한국’과 ‘통사’에 관한 12가지 삽화가 있다. 12가지 삽화는 크게 3가지 주제(전통 한국, 당대 한국, 그리고 통사 주역)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의 전통과 당대, 그리고 통사에 관한 시각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은 한국사학사에서 볼 때 대단히 이채로운 현상인데 범우사 출판물을 제외하고는 해방 후에 이렇게 삽화를 담고 있는 번역본을 찾기 어렵다. 원본의 선진적인 작사(作史) 방식을 후대의 번역본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기간 『한국통사』는 원본에 토대한 원전적인 이해의 추구가 부족하였다. 막연히 이 책은 민족주의 역사가의 국혼의 역사책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지은이의 서언을 읽어도 주로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니 정신을 보존하면 형체가 부활할 것이라는 구절에 주목했다. 이것은 지은이가 왜 한국의 ‘통사’를 쓰지 않을 수 없었는지 지은이의 역사 집필을 추동하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왜 한국의 역사가 ‘통사’라는 것인지 이 책의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 ‘통사’에 관한 지은이의 기본 관념을 말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처지가 노르웨이, 헝가리, 이집트, 캐나다에 비할 바도 아니고 한국인의 처지가 인도, 베트남, 필리핀보다 못한 처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 원본에서 캉유웨이의 서문을 읽으면 금세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이를 삭제한 번역본만 읽으면 까막눈이 될 수 있다. 사실 지은이의 독서와 문필 이력을 보면 미국의 독립사, 프랑스의 혁신사, 폴란드의 말년사, 이집트의 근대사, 일본의 유신사, 베트남의 망국사, 스위스의 건국사 등을 차례로 거쳤다. 세계사 속의 한국사, ‘통사’의 기본 시야였다.
박은식 『한국통사』를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독자마다 다를 수 있다. 책의 내용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번역본을 고를 수 있다.(김병식, 이장희, 김태웅) 지은이의 삶과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인물 전기를 고를 수 있다.(김삼웅, 김순석, 노관범) 지은이의 한국 근대사 인식의 지속과 변화를 알고 싶다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함께 읽으면 좋다. 중국 소설계의 한국 근대사 인식도 알고 싶다면 『조선망국연의』를 함께 읽으면 좋다. 『한국통사』의 주요 토픽, 예컨대 흥선대원군에 관해 더 알고 싶다면 관련 연구서나 평전을 함께 읽으면 좋다.(제임스 팔레, 연갑수, 김종학) 『한국통사』는 단지 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서술한 책은 아니고 그 이상으로 유교 문명의 쇠망에 관한 역사 철학이 투영되어 있다. 문명 쇠망사에 관한 역사 철학의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또는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을 함께 읽으면 어떨까? (후자의 경우 이브 라코스트의 『이븐 할둔』을 추천한다.) 체코의 역사가이자 민족운동가 팔라츠키의 명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체코 민족사』는 『한국통사』 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이해에 보탬이 되는 적절한 비교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다음 주(2.17.~2.21.) 필자가 재직하는 학교에서는 <동아시아 고전 아카데미>가 열린다. 원전 강독과 주제 평설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의 ‘고전’에는 『한국통사』도 포함되어 있다. 금년은 박은식 서거 100주기가 되는 뜻깊은 해인데, 『한국통사』를 필두로 그의 저술을 정확히 읽는 법, 그의 저술을 새롭게 읽는 법을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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