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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학을 읽는 세 가지 키워드 / 조강석

작성자 사진: 한국연구원한국연구원

최종 수정일: 2월 4일

  1. 이미지-사유


한강은 대학 재학 중에 교내에서 주최하는 윤동주 문학상에 시로 당선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1993년에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등단했고 이듬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물론 먼저 시로 등단한 후 소설 쪽으로 선회한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러나 등단 이후 30년 동안 소설을 써온 작가가 “강렬한 시적인 산문”이라거나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가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와 함께 노벨상을 받는 일은 이례적이다. 저 찬사에 담긴 “시적(poetic)”이라는 표현에 새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시적’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한강의 등단 이력을 떠올릴 수도 있고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베스트셀러 목록에 언제나 빠짐없이 시가 올라 있고, 다양한 종류의 시 전문 문예지가 전국 각지에서 발간되고 있으며 한 해에도 수많은 시집들이 출판되고 실제로 독자들에 의해 널리 읽히고 있는, 현재 전 세계에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든 한국적 문학(시장)만의 독특한 환경과 그런 가운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시의 열기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적”이라는 표현이 한강의 작품에서 지니는 함의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등단 이후 작가로서 본격적인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의 한강의 작품 세계는 틀림없이 동시대 소설의 대개의 흐름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1980년대적 거대 서사의 붕괴를 지연시켜보려는 ‘당위적’ 요청들이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반작용의 일환으로 일상성에 주목하거나 일상 내에 도사린 아이러니를 풍자하는 경향, 또는 소위 신세대의 문화적 체험의 목록을 열거하면서 과시적 허무를 강하게 표현하던 소설들과는 다른 경향을 한강의 소설은 보여주었다. 당대의 시류를 영민하게 반영하는 재기와 날카로움이 아니라 근원적 층위에서 우리네 삶이 지닌 비의를 꿰뚫어 보려는 집요함과 둔중함, 어쩌면 1960년대의 이청준이나 김승옥과 같은 작가가 보여주었던 삶의 정서적 저류에 대한 탐색과도 닮아 보이는 작품들로 인해 언뜻 ‘시간착오’(anachronism)의 인상을 준 것도 사실이다. 오해를 미리 차단하자면, 여기서 ‘시간착오’는 낡고 진부함과 결부된 시대착오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새로움이 각광받는 때에 오히려 오래된 것이 새롭게 보이게 만드는, 시간대가 뒤섞이며 생겨나는 합류와 혼입을 형용하는 말이다. ‘신(新)’이라는 접두어가 이념의 시대를 떨쳐낼 것처럼 만능의 역량을 발휘하던 1990년대의 한복판 속으로 선형적 서사의 속도감대신 강렬한 이미지에 붙들리고 오래 몰입하게 만드는 밀도 높은 소설을 오래된 전통들과 더불어 한강은 내밀어 놓았다. 그는 선명한 기승전결과 분명한 대단원을 지닌 플롯이 아니라 정서적 동요의 마루와 심연을 품고도 평형을 한동안 집요하게 지속시키는 이미지들을 소설 속에 펼쳐놓았다. 기실 시가 그렇다. 대개 시는 정점과 심연의 최대치를 통해 파국과 대단원을 만드는 대신 미세한 정서적 변이와 흐름이라는 의미의 정동(情動, affect)을 지속시키는, 즉 진폭이 아니라 강렬도를 통해 호소하는 장르가 시이며 특히 이미지의 고유한 역능이다. 한강의 소설은 등단작인 「붉은 닻」으로부터 가장 최근작인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이례적이고 적극적으로 마치 스스로의 삶을 지닌 듯한 이미지들을 중심에 두고 있다.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에서 ‘시적(poetic)’이라는 형용은 정서적이고 비유와 수사가 승하다는 장르 규정적 사실관계보다는 이미지의 강렬도가 지속시키는 사유의 힘, 즉 이미지-사유의 힘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지 없는 서사는 없지만 다량의 이미지-사유의 싹을 산포하는 서사는 드문 만큼 귀하고 그렇기에 “현대 산문의 혁신”이라는 평에 값한다. 왜냐하면 이미지-사유는 이미지이자 사유이고 따라서, 과거를 현재 속에 데리고 오거나 현재를 과거에 파견하는 ‘시간착오적’ 기능을 여실히 수행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이런 양상과 관계 깊은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한강의 장편들의 표제를 보라.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같은 문장의 시제는 모두 현재이다. 과거를 반추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현재화하면서 동시에 역사화하는 것, 모든 시간을 강렬도와 지속의 관점 위에 세우는 것, 그것이 시적 사유, 이미지-사유가 하는 관할하는 일이다. 단적으로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화자인 ‘나’(경하)가 인선의 환영과의 조우를 통해 본격적으로 과거와의 대면을 시작하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2부 도입부에 놓인 다음 문장들은 과거를 현재에 합류시키며 문제를 현재화한다. 과거를 눈앞에 현전하게 하며 사건을 다시 살게 한다는 것이다.


온다.
떨어진다.
날린다.
흩뿌린다.
내린다.
퍼붓는다.
몰아친다.
쌓인다.
덮는다.

우리는 풍경화가는 풍경이 아니라 풍경화를 모방한다는 앙드레 말로의 통찰과 모든 양식은 역사를 갖는다는 E.H. 곰브리치의 말을 도움 삼아 여기에 다음과 같은 시를 잇대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다. 시작한다. 움직이기 시작한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소리난다. 울린다. 엎드린다. 연락한다. 포위한다. 좁힌다. 맞힌다. 맞는다. 맞힌다. 흘린다. 흐른다. 뚫린다. 넘어진다. 부러진다. 날아간다. 거꾸러진다. 패인다. 이그러진다. 떨려나간다. 뻗는다. 벌린다. 나가떨어진다. 떤다. 찢어진다. 갈라진다. 뽀개진다. 잘린다. 튄다. 튀어나가 붙는다. 금간다. 벌어진다. 깨진다. 부서진다. 무너진다. 붙든다. 깔린다. 긴다. 기어나간다. 붙들린다. 손 올린다. 묶인다. 간다. 끌려간다. 아, 이제 다 가는구나. 어느 황토 구덕에 잠들까. 눈감는다. 눈뜬다. 살아 있다. 있다. 있다. 있다. 살아있다. 산다.

-황지우, 「527」, 『나는 너다』


현재 시제 용언들로 이루어진 황지우의 시가 1980년의 광주로 우리를 데리고 가면서 동시에 1980년 5월 27을 현재에 합류시키듯 『작별하지 않는다』의 도입부에 제시된 ‘검은 나무들의 꿈’ 이미지로부터 전개된 일련의 사태는 이제 1948년 4월 3일을 ‘나’와 독자의 눈앞에 현전시킨다. ‘나’의 환영 속 혹은 몽상 속에서 과거가 현재에 틈입하거나 현재가 과거에 손을 내미는 사태가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은 시 혹은 시적 산문이 지니는 이 현전의 힘 때문이다.

한강의 소설에 빈번하게-빈번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것인데-꿈과 환영이 사용되고 이것이 서사를 밀고가는 주된 동기가 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초기 단편 「붉은 닻」이나 「여수의 사랑」과 같은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꿈과 환영, 그리고 작품의 주된 동기와 심지어 주제를 구성하는 강렬한 이미지들은 단지 소재나 계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서사와 사유의 중심에 위치한다. 예컨대, 「붉은 닻」에서 갯벌에 깊이 박혀 녹슬어가는 “붉은 닻”은 소설 속 등장인물의 삶과 정서를 즉각적으로 환기하는 이미지이며, 「여수의 사랑」에서 “여수”는 구체적 지명이면서 동시에 모든 문제를 풀어낼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되며 소설의 주된 사건을 추동한다.

심지어 『검은 사슴』, 『바람이 분다, 가라』, 『작별하지 않는다』와 같은 장편은 아예 전체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기가 되는 꿈의 한 장면으로 시작되며-이때 꿈은 소설 속 세계로의 입사를 가능하게 하는 관문이자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의 두 세계를 매개하는 포털이 된다- 『채식주의자』에서 꿈은 다른 어떤 설명보다 영혜의 태도 변화를 가장 잘 이해하게 만들고 『소년이 온다』는 환영 자체가 서사의 배경이자 무대를 구성한다.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면, 일례로 『작별하지 않는다』는 서두에 제시된 “검은 나무들의 꿈”1)이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들을 움직이는 동기로 작용한다. 작중 화자인 경하와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선이 바로 이 꿈, “깨어난 뒤에도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을 것 같은 꿈”(23쪽)에 붙들려 있다. 어긋날 것 같은 두 인물을 다시 중재하는 것은 이 꿈을 대리보충하기 위해 구상된 다큐멘터리 작업 계획이다. 꿈 이미지를 보완할 현실의 이미지를 가공하다 인선은 상처를 입고 경하는 인선의 작업 현장을 방문하며 자신의 계획과 일부가 포개어지면서도 어긋나 있는 경하의 ‘이미지 보완 계획’을 확인하며 과거와 조응하게 된다. 이로서 모든 현실이 검은 나무의 꿈을 대리보충하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하며, 심지어 2부와 3부에서는 이 꿈 이미지의 실제적 계기들이 환영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때 검은 나무의 이미지는 과거를 현재에 생성하고 현재를 과거에 파견하는 매개이자 이 소설의 핵심 주제 의식을 응축하며, 반성적 인식만으로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는 현전의 효과를 이미지-사유를 통해 수행하고 있다. 한강은 노벨상 수상 소감에서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로 고쳐 묻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시간착오’의 가장 극적인 양상을 『작별하지 않는다』의 2부와 3부의 환영과 이미지-사유 속에서 독자는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질문을 품은 이미지-사유의 힘이다. 한 논자의 설명을 여기에 원용해보자면, 이미지는 “개념적 사고를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수께끼같은 방식으로 충격을 주고, 이를 통해 사유를 움직이게 ”2)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미지가 굳어 있는 사유를 자극하며 일종의 “지적인 단락(short-circuting)을 통해 불꽃을 일으”3)키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불현듯 비추고 여기에 불을 붙”4)이기 때문이다. 한강의 작품이 “강렬한 시적 산문”이며 “실험적이고 시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을 혁신”했다고 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미지-사유를 통해 실제와 실재의 관습을 뒤흔들고 익숙한 것과 낯선 것에 불을 붙여 독자의 사유를 움직이게 한다. 독자로 하여금 사유하고 질문하게 한다.



  1. 날 위에 선 인물들


한강의 소설이 “강렬한 시적 산문”,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읽히게 된 두 번째 사정도 있을 법하다. 많은 경우에 있어 한강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 전형적이라기보다는 강렬하게 형상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인물들은 디테일과 전형적 상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략과 집중 속에 있으며 상징적이다. 예컨대, 초기 단편집 『여수의 사랑』과 아직까지는 마지막 단편집인 『노랑무늬영원』 속의 여러 주인공들, 그리고 『채식주의자』의 영혜, 『희랍어 시간』의 남과 여,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하와 같은 인물들은 세부적으로 묘사된 풍경 속의 구체적 시공을 점하고 있는 실감보다는 ‘상징적 상관관계(symbolic correlations, 조셉 니담)’ 속에서 상징적 의미의 일단을 담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 번 더 미리 오해를 차단하자면, 인물들이 인형처럼 조종된다는 것이 아니라, 마치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에서처럼 사실적 필치와 전형적 구도 속에서 직업과 성격이 대번 구체적으로 떠올려지는 인물들이 아니라 마치 여백이 가득한 공간 속에 생략적 필치로 그려졌지만 크기에 상관없이 상징적으로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동양화 속 인물들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형적 상황 속에 있다기보다는 날 위에(on the edge) 서 있다. 여차하면 넘어 설 심미적, 윤리적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때로 극단적이다. “급기야 나는 모든 사물에서 썩어가는 냄새를 맡기에 이르렀다”는 「여수의 사랑」의 ‘나’,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와 그가 수강생으로 만나는, 말을 잃어 가는 여자, “더이상 일도 가족도 계속할 일상의 의미도 존재하지 않게 된”, 습관성 위경련을 일으키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화자 경하, 육식을 거부하다가 급기야 식물이 되어가는 『채식주의자』의 ‘나’와 같은 이들이 모두 날 위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자신에게는 전 존재처럼 느껴지는 하나의 체험과 이미지와 태도를 집요하게 끝까지 밀고 가서 끝내 경계의 날 위에 선 인물들(characters on the edge)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보충하자면, 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공유하는 삶에 대한 태도가 있다고 믿는데 「에우로파」의 인아가 보이는 태도가 그것이다: “근본적으로 나라는 사람한테는 위대함이 결핍돼 있어”5)

이런 태도는 한강의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이 전형적인 근대 소설의 주인공들과는 확연히 성격을 달리함을 의미한다. 주지하듯 루카치 같은 이는 근대 소설의 주인공은 타락한 사회에서 총체성을 추구하는 문제적 인물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에우로파」의 인아는 이를 뒤집고 있다. 한강 소설 속 상당수의 주인공들은 세계의 총체성과 씨름하는 문제적 인물이라기보다는 결벽증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사람들이다. 이는 자신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에서-있을지 없을지 불분명한-해결을 보기 위해서다. 세계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시계에 포착된 예각적 문제에 우선 골몰하는 인물들이 한강의 소설에서 다수 눈에 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와 상처의 면적에만 집중하다 그 끝에서 오히려 우리네 삶의 핵심 질문과 결국 마주서게 되는 인물들도 그들이다. 자신을 끝내 날 위에 세우는 사람들, 대표적으로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그렇다.

2007년 발매된 『채식주의자』 표지.
2007년 발매된 『채식주의자』 표지.

  1. 질문으로서의 문학


2007년 초판이 발행되었을 때 『채식주의자』의 표지에는 ‘연작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2004년과 2005년에 각기 독립적으로 발표된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라는 세 작품이 묶인 책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확인한 바로는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로 바뀌었다. 연작소설과 장편소설의 차이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느슨한 연관과 일관된 주제의식에 의한 통합의 차이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3부작이, 많은 헬라 비극이 그러하듯, 질문에 최적화된 형식이라는 사실이다. 『채식주의자』는 종국에는 하나로 통합될 수도 있는, 그러나 각각 그 자체로 유의미한 질문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인터뷰에서 한강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채식주의자』는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인데, 극단적인 채식을 선택하고 결행하는 ‘영혜’의 모습이, 그녀와 가까운 세 사람의 눈으로 한 장(章)씩 그려지고 있어요. 작품 속에서 채식으로 상징되는 질문.......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인데요. 주인공 영혜는 끝까지 자신의 결행을 밀고 나가, 마침내는 자신이 식물이 되었다고 믿으며 먹는 행위 자체를 거부하게 되지요. 그 과정에 폭력과 아름다움, 욕망, 죄와 구원에 대한 질문들이 합해지게 되었는데요. 특히 마지막 장 ‘나무 불꽃’에서, 파국 속에서 영혜를 이해해 내려고 몸부림치는 언니 인혜의 목소리를 쓰는 시간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6)

『채식주의자』의 각 장은 “극단적인 채식을 선택하고 결행하”여 스스로 식물-되기를 감행하는 영혜를 둘러싼 세 명의 시점에서 각기 전개된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가 화자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나무 불꽃」은 3인칭 시점이지만 사실상 영혜의 언니인 인혜의 시점에서 서사가 진행된다. 독립적이며 상관적인 이 세 장은 각기 영혜로 인해 촉발되는 중요한 질문들을 담고 있는데 1, 2부의 화자와 3부의 인혜는 각각 자신이 선 자리에서 인혜의 변화를 지켜보는 가운데 질문 혹은 의문을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인물들로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1장 「채식주의자」가 배태하는 질문은 “만약 우리의 일상이 어떤 종류의 폭력에 연루되어 있다면?”인데, 이 질문의 함의에 가장 둔감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영혜의 남편이 화자로서 서사를 진행시킨다. 갑자기 일상의 상궤를 벗어나는 듯한 영혜의 선택과 행동은 그런 남편의 시야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부각된다. 이해와 몰이해를 오가는 남편의 관점 속에서 영혜의 변화 과정은 우리의 일상이 연루되어 있을 법한 폭력들의 윤곽과 양상을 점차 문제적으로 지시하기 시작한다. 「몽고반점」은 이렇게 불거진 치명적 인식, 즉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어떤 식으로든 폭력에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인식에 눈뜬 이에게 일상 속에서가 아니라 심미적인 방식으로 혹은 상징적 치환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있을지를 묻는다. “일상적 폭력의 문제를 심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방법과 해결이 될 수 있는가?”가 2장의 질문이다. 영혜의 형부는 모든 전시회, 영화, 공연 따위가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고 매혹적인 하나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그에게 영혜는 함께 풀어내야 할 질문을 품은 자가 아니라 자신이 몰두하는 심미적 맹목의 끝에 놓여 있는 기호일 따름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맹목 역시 폭력이 된다. 따라서 그간 많은 논쟁과 오해의 대상이 되었던 2장 「몽고반점」은 심미화가 아니라 심미화의 파국이라는 맥락에서 읽어갈 필요가 있다. 성문화되거나 혹은 암묵적으로 합의된 공동체의 행동 규약 안에서 영혜의 치명적 인식이 해답을 구할 가능성은 1장 「채식주의자」에서 차단되었다. 1장의 화자인 영혜의 남편의 시각과 태도가 직접적으로 이를 보여준다. 만약 그렇다면, 키에르케고르적인 질문을 거꾸로 던져보자면, 공동체의 행동 규약을 위반하며, 즉 윤리적인 것을 목적론적으로 정지시키고 심미적인 방식으로, 감각으로부터 승화에 이르는 스펙트럼으로 이 치명적 인식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는가? 영혜의 형부의 시선이 극단적인 감각적 쾌와 겹쳐지는 지점에서부터 이 시계(視界)는 심미적 해법의 파국을 고스란히 시연한다. 경계의 날 위에 서 있는 영혜는 이제, 3부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인 인혜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다. 이와 함께, 이 작품에서 가장 치명적인 질문은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영혜로부터 인혜에게로 인계된다.

그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의사에게 표했던 재발에 대한 우려는 단지 표면적인 이유이며, 영혜를 가까이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는 것을. 사실은, 그애를 은밀히 미워했다는 것을. 이 진창의 삶을 그녀에게 남겨두고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을7)

영혜가 궁극적으로 가닿은 질문은, 한강의 육성에 있는 것처럼,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반면 ‘진창의 삶’ 속에 남겨진 인혜는 이 질문을 안고도 경계를 넘어서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인혜는 “딸로서, 언니나 누나로서, 아내와 엄마로서, 가계를 꾸리는 생활인으로서”8)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스스로 감당할 줄 아는 성실한 인물이다. 그녀의 남편-즉 영혜의 형부-는 인혜가 지닌 선량함, 안정감, 침착함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조금도 부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태도”9)라고 간주한다. 그런데 작품의 마지막 대목에서 날 위에 서 있는 것은 결국 영혜가 아니라 인혜가 된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문제적 질문은 인혜의 몫이 된다는 것이다. 거기가 독자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 소설을 읽으며 때론 영혜의 남편의 시선으로, 때론 형부의 시선으로 영혜의 인식 과정과 ‘변신’ 과정을 따라가지만 결국 인혜의 자리에 함께 남겨진다. 그리고 물을 수밖에 없다. 이미 일상에 배태된 폭력의 기미를 인지하거나 의식하게 된 나는, 완전히 결백한 존재가 될 수 없을 나는 경계를 넘지 않고 어떻게 일상 속에 있을 수 있는가?


문학은 치유가 아니라 증상이다. 문학은 삶에 숨겨진 증상을 드러내며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증상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해답과 치유가 아니라 증상과 질문을 위해 존재한다. 한강의 문학은 그 최상의 양상을 집요하게 발신하고 있다. 증상이 있던 곳에 주이상스가 있다는 진단은 증상으로 지복을 전하는 문학 언어와 짝패임이 분명하다.



1)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23쪽, 이하 쪽수만 표시

2) Theodor. W. Adorno, “Benjamin’s Einbahnstrasse”, Notes to Literature Ⅱ, traslated by Shierry Weber Nicholsen, New York: Colimbia University Press, 1992, p.323.

3) ibid., p.323.

4) ibid., p.323.

5) 이와 관련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은 필자가 『노랑무 늬영원』에 붙인 발문 「겹과 곁」 참조,

6) 조강석, “Eyes that Pierce into the Hinterland of Life”, _list: Books from Korea. vol.15, Spring 2012.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영어와 중국어 등으로 발행하는 이 잡지는 해외에 한국문학을 소개하기 위한 취지로 간행된다. 이 지면에서 필자는 『희랍어시간』 출간 직후 한강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삶의 뒤안을 꿰뚫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한강의 문학세계를 소개한 바 있다. 한강의 문학세계와 관련하여 중요한 참조점이 될 만한 내용들을 한강 자신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아래 사이트에서 원문을 찾아 볼 수 있다. https://issuu.com/ltilibrary/2

7) 한강, 『채식주의자』, 2007, 창비, 173쪽.

8) 같은 책, 169쪽.

9) 같은 책, 161쪽


조강석(문학평론가, 연세대 국어국문과 교수)
조강석(문학평론가, 연세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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