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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 마준석

작성자 사진: 한국연구원한국연구원

아직도 비행기를 타면 창가 자리에 앉는 것을 선호한다. 기장의 흥얼거리는 듯한 안내 방송을 시작으로 비행기가 활주로에 자리잡고 나면, 엔진의 굉음과 함께 비행기는 앞으로 빨려 들어가고 어느새 가볍게 날아오른다. 비행기가 비상하는 찰나의 순간에 창밖으로 광활한 시야가 펼쳐지는데. 건물들은 순식간에 하나의 점이 되고 산은 작은 구릉들이 되어 사라진다. 비행기가 구름 속에 파묻힐 때까지 이어지는 그 마법과도 같은 풍경이 비행기를 타는 하나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 사람들은 풍경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산을 오르는 이들은 발 딛는 땅의 단단함과 약간은 서늘한 바람을, 그리고 피로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육체의 움직임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높은 지대에서 바라보는 전망을 빼놓을 수는 없다. 주말에 산을 찾아가면, 정상 부근에서는 걸터앉아 경치를 바라보고 웃으며 간식을 집어먹는 사람들로 가득이다. 꼭 등산이 아니어도 우리는 돈을 내고 전망대에 오르고, 높은 곳에 위치한 식당이나 바를 방문하고, 하다못해 집을 구할 때도 (흔히 타워팰리스로 대표되는) 고층 아파트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에 대한 열망과는 별개로. 서양 미술사에서 풍경화가 차지하는 자리가 매우 좁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독립된 장르로서의 풍경화는 인물화나 정물화 또는 종교적 회화들이 군림하는 오랜 시기를 거친 이후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풍경은 캔버스의 중심을 차지하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 주변의 여백을 채우는 역할을 주로 떠맡았을 뿐이고, 장르로서의 풍경화조차 20세기의 추상적 회화에 금방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이는 기이한 일이다. 눈 닿는 곳 어디에서나 자연을 볼 수 있었던 과거의 사람들에게 자연의 경치를 묘사하는 그림이 뒤늦게서야 등장하고, 등장하자 곧 그 영향력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이 말이다. 서양인들은 오랜 역사 동안 줄곧 자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기이한 사태를 뒤집어서 생각해야만 한다. 장르로서의 풍경화가 뒤늦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자연 그 자체를 넘어서서 풍경화의 대상으로서 출현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사상사적 전환이 필요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풍경화는 근대에서야 비로소 등장할 수 있었다.

     


존 컨스터블, 《위븐호 공원》
존 컨스터블, 《위븐호 공원》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프랑수아 줄리앙의 《풍경에 대하여》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1) 풍경은 하나의 시점에서 보여진 자연이며, 다시 말해 관찰자라는 시각적 권능에 따라 정돈된 자연의 외양이다. 이러한 풍경에서 중요한 것은 각 자연물들의 생동하는 내재적 힘이 아니라 자연의 겉모습들이 이루어내는 긴장과 조화의 장면이다. 또한 그 장면이 관찰자의 시점이라는 사실은 주관과 객관 간의 오래된 분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까 자연이 종교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학적 인식의 대상이 되었을 때, 즉 르네상스에 이르러 객관성이 발명되었을 때, 비로소 풍경이 출현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여기서 관찰자는 시점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며, 자연은 이 관찰자에 맞세워진 대상으로서 주체에 의존적이다.

     

자연이 시각적 주체에 의존하는 객체가 됨으로써, 자연이 내재적인 생동성과 상징적 가치들을 잃고 순전히 외양으로 간주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연은 기하학적 연장(res extensa)이 된다. 각각의 자연물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의미와 특수성으로 회화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실체의 한 양태들로서 출현한다. 연장된 양태로서의 자연물들은 이제 동질성을 그 특징으로 지니며, 균질화된 자연은 원근법에 따라 수학적으로 묘사될 수 있다. 자연은 더 이상 인간을 두렵게 하는 미지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은 자연만을 감상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풍경화는 뒤늦게 발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정점을 맞이한 풍경화가 20세기의 추상화에 금방 자리를 내어준 까닭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된다. 19세기 풍경화에서 자연이 그 외양에서는 다채로워 보일지언정 실제로는 추상적으로 동질화되어 있기 때문에, 풍경화는 20세기의 추상화로 이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에 20세기 현대 미술은 과거와의 전면적인 단절과 거부가 아니라, 바로 그 과거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단절의 운동이었다.

     

동양에도 풍경화가 있다. 줄리앙이 짚듯이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산수(山水)화가 있다. 동양에서 산수화가 독립된 장르로서 오랜 시간 동안 발전했다는 사실은, 흔히 그러하듯이 산과 물을 그린 풍경화가 융성했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풍경화와 산수화는 근본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산수화에서 산과 물은 관찰자가 바라보는 두 가지 상이한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산수화는 산과 물뿐만 아니라 산과 물이 표현하는 세계의 두 원리를 표현하려 시도하는 회화이다. 한쪽에는 산으로 대변되는 불변하는 것, 높은 것, 종적인 것, 무거운 것, 단단한 것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물로 대변되는 변화하는 것, 낮은 것, 횡적인 것, 가벼운 것, 유동적인 것이 있다. 이 두 가지 힘 간의 긴장과 조화,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유희가 바로 산수화가 겨냥하는 목표이다. 여기에는 주관과 객관 간의 분리도 없고, 관찰하는 시각적 권능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연장으로 균질화되거나 순전한 외양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로서 현전한다.

     


곽희, 《조춘도》
곽희, 《조춘도》

산수화에서 자연 외부의 관찰자가 전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기하학적 원근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으로도 짚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양에 공간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곽희에 따르면 먼 곳은 세 가지 방법으로, 즉 고원(高遠)·심원(深遠)·평원(平遠)의 삼원법(三遠法)으로 표현된다. 이는 각각 산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는 시점, 산 앞에서 산 뒤편으로 깊게 넘겨다보는 시점, 그리고 가까운 산에서 먼 산들을 옆으로 바라보는 시점이다. 풍경화의 일원적 시점과 달리, 산수화에서 시점이 다원화됨으로써 시점 간의 이동이 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역동적인 입체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관찰자의 시각적 우위를 분절함으로써, 산수화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현전하기 위한 지평을 마련한다.

     

결국에 동양의 산수화가 목표하는 바는, 자연의 형상(形)이 아닌 상(象)을 그리는 일이다.2) 다시 말해 자연의 외양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 안에 있는 자연 이상의 것을, 그러니까 세계의 운행 원리 자체를 잡아내고자 하며, 창작자와 감상자로 하여금 이러한 세계의 운동이 일으키는 감흥과 깨달음을 서로 소통하게끔 한다. 그래서 동양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감상하는 일 모두 도(道)에 이르기 위한 수양의 지위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산수화에서 인간의 지위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어우러짐과 동시에 자연 너머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로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산에 올라 풍경을 볼 때 순전히 어떤 너른 이미지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다. 성냥갑처럼 줄지은 빌딩들과 그 사이를 비집는 도로들, 그 위에 쌀알 같이 작은 자동차들, 이 도시 안에서 살고있는 수많은 이웃들, 이 작은 세상을 품은 채 굽이치는 산맥들. 마지막으로 그 풍경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이 도시와 이 세상과 관계맺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매혹된다. 풍경은 단순히 감상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경험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의미와 가치가 찾아지는 것이며, 그 앞에서 때때로 갈등하고 좌절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베를린에 있다. 그리고 당분간 여기에 머무른다. 흰 눈이 내린 베를린의 풍경은 다채롭고 번잡하면서도 낮고 스산하다. 산수화의 시선이 그러하듯 나 또한 베를린을 굽어보고 싶다. 한번은 아래에서 위로, 한번은 위에서 아래로, 때로는 가까운 것에서 먼 것을 뚫어보고, 때로는 먼 것을 가까운 것으로 당겨보면서. 이방인인 내가 여기에 결코 어우러질 수는 없겠지만, 긴장 속에서 또 감흥하면서 베를린 안에 있는 베를린 그 이상을 목격하고 겪어내고 싶을 뿐이다.    


          

1) 프랑수아 줄리앙, 《풍경에 대하여》, 김설아 역, 아모르문디, 2016: 10-27쪽.

2) 강여울, 육조시대의 철학사상과 예술론 -‘형이상(形而上, intangible)’과 ‘형이하(形而下, tangible)’의 상호관계-, 박사학위논문, 2017: 267쪽.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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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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