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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폭력과 배움에 관하여 / 마준석

최종 수정일: 1월 2일


고등학생 때 친구와 함께 지역아동센터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버스에 내리고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외곽 지역이었고, 주택 계단이나 도롯가 연석에 어르신들이 하염없이 앉아 있는 그런 동네였다. 지역아동센터에는 머무를 곳 없는 아이들이 모여든다. 봉사 활동의 명목은 학습 멘토링이었으나 아이들의 엉덩이는 놀랍도록 참을성이 없었다. 고등학생 둘이서 쫄랑거리는 열댓 명의 초등학생들을 휘어잡기란 요원했고, 자연스럽게 학습 멘토링은 방과 후 돌봄 서비스로 변질되었다. 아니 나는 방과 후 투쟁 활동이라 부르고 싶다.


그 일 년 동안 나는 수차례 목숨의 위협을 느꼈는데, 그중 하나는 함께 수영장에 놀러갔을 때다. 수영장에 들어가자마자 일고여덟 명의 아이들이 들러붙어 나를 넘어뜨렸고, 물 밖으로 일어설 수 없게끔 무릎과 발로 짓눌렀다. 그 육중한 힘에서 나는 어떤 강인한 의지를, 순순히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읽을 수 있었다. 함께 봉사하던 친구가 아이들을 밀치고 구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나는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물놀이를 빙자한 전투를 했는데, 다행히도 모든 살인 시도는 미수로 그쳤다. 또 다른 사건은 동네 놀이터에서 일어났다. 센터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나는 놀이터에 있던 아이들의 놀이를 중단시켰다. 그때 놀이의 중단에 앙심을 품은 한 아이가 돌멩이를 집어 곧바로 내 얼굴에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다행히 오른팔로 돌멩이를 막아낼 수 있었고, 아이는 나에게 붙잡혀 이성이 반쯤 날아간 내 표정을 봐야만 했다. 그 아이를 때리지 않고서 훈육하기 위해 정말로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글로 다 옮길 수 없는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시를 가르치러 온 국문학과 대학생들이 활동 30분 만에 도망가는 것도 보았다. 아이들은 날것의 존재들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사회적인 규범에 맞게 매개할 줄 몰랐고, 나는 언제나 아이들의 순수한 적의와 직접적인 폭력을 감당해야만 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항구적인 투쟁 상태 속에 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헤겔 “정신현상학”의 4장 ‘자기의식’에 등장한다. 흔히 목숨을 건 투쟁 혹은 인정 투쟁이라고 불리는 그 서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자기의식적인 존재는 자기 자신의 자유를 입증하고자 한다. 자기의식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며 그럼으로써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규범을 제정하는 권위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허한 혼잣말에 불과하다. 따라서 타자는 자신의 자유를 입증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다만 타자는 그 입증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승인된다. 그러나 타자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입법자로서 스스로의 권위를 주장한다. 각자는 자신의 자유와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에 빠져든다. 끝내 목숨을 부지하려 하는 자가 패배를 시인하게 되고, 생을 전부 내걸었던 자가 승리한다.


최근의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인정 투쟁에 대한 헤겔의 서술을 비유적인 것으로 읽는다.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은 폭력적인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주장과 권위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검증하고 논쟁하고 때로 우호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실현한다. 이러한 입장의 대표적인 연구자로 하버마스가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의미 형성 과정은 폭력적인 투쟁 없이도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 투쟁에서 ‘투쟁’의 계기를 약화시키는 독해는 헤겔의 명시적인 서술과 분명 상충한다.1)


두 자기의식들은 자기 자신을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입증한다. 그들은 반드시 이러한 투쟁에 들어서야만 한다.2)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자유가 획득될 수 있다. 자유롭다고 확언하는 것만으로는 자유를 획득하기에 불충분한 것이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과 타자를 죽음의 위험에 노출시킴으로써만, 자신의 자유의 능력을 입증한다.3)


어째서 자신의 존재와 믿음을 인정받기 위해 ‘반드시’ 투쟁에 들어서야만 하는가? 또한 그 투쟁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폭력적일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인정 투쟁은 하버마스의 해석과 달리, 물리적 다툼 외에는 상이한 입장 간의 대립을 평화롭게 조율할 수단이 아직 부재한 상황의 원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각자의 믿음과 주장들이 보편적인 규범이나 기준을 통해 매개되지 않고 난립한다면, 그 경우에 가능한 선택지는 직접적인 투쟁밖에 없다. 이는 적절한 사회적 규칙을 함양하지 못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의 혼란스러운 무질서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럼에도 그 투쟁은 협력과 대화가 의문시되는 곳에서 최초의 보편 규범을 수립하려는 시도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헤겔의 인정 투쟁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시기나 사건을 일컫는 개념이 아니고, 인간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매번 투쟁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에서 폭력적인 투쟁이 서로 상이한 주장들의 우열을 결정하는 수단으로서 계속 활용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인정 투쟁은 인간이 자신의 믿음을 형성하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가능성을 조건 짓는 논리적 기반이다.


이기심의 굴복은 진정한 인간 자유의 시작을 이룬다. [...] 복종함의 습관은 모든 사람들의 도야에 필수적인 계기다. 자신의 의지를 부러뜨리는 훈육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거나 이성적이거나 명령하는 능력을 지닐 수 없다.4)


모든 사람은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명령하는 자는 복종했어야만 하며 복종하는 법을 배웠어야만 한다. 명령하는 자는 그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의지, 즉 그의 이기적 욕구를 따라서는 안된다. [...] 옳은 것은 보편적이고 그것의 내용은 이기적 욕망이 아니다. [...] 그리고 보편적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의식의 개별성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이들의 생에서 발생하는 계기이며, 버릇이 없고 자신의 의지에 어떠한 제한도 두지 않았던 자는, 뒤이어 가장 약한 자이며 참된 목적들과 이익을 얻을 수 없으며 진정한 목적들에 종사할 수도 없다.5)


인정 투쟁 이론의 흥미로운 지점은 투쟁에서 패배한 쪽이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획득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의지를 부러뜨리는 근본적인 폭력에 의해 인간은 복종하는 법을 배우고, 복종할 수 있는 자만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공동의 의미를 형성하며 보편적인 규칙을 수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투쟁은 이성 외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성의 근거를 이루고 이성의 한계를 설정하는 원리이다.


예컨대 아이들은 오로지 애정과 긍정, 따뜻한 대화를 통해서만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운다는 것은, 올바른 것이 자신의 무분별한 욕망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익히는 것이고, 때로 자신의 심지를 부러트리는 상황에 적응하는 일이며, 주어진 규범과 권위를 따르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점을 배우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교육이 매 순간 신체적 폭력과 겁박, 공포 속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가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신체가 통제되고 욕망이 지연되며 특정한 금지들을 내면화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다.





애초에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소위 ‘정상인’(신경증자)들은 모두 근본적인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출생 이후 유아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신체를 자신의 연장된 신체로 받아들인다. 유아는 어머니와의 항구적인 합일 속에서 만족을 성취하려 하지만, 이러한 근친상간적 동일시는 동시에 어머니가 아이를 삼켜버릴 위험을 동반한다. 아버지6)의 역할은 이 동일시를 금지하고(“안돼!”)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아이와 어머니 모두를 보호하는 것에 있다. 아이를 어머니로부터 찢어내는 최초의 금지는 아이에게 최초의 결여를 야기하는 고통스러운 폭력이지만, 이 폭력 덕분에 아이는 자신의 자아를 형성할 수 있고 정신병의 위험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 폭력과 강제, 억압을 점진적으로 소거해야 한다. 훈육을 통해서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은 결코 아이들에 대한 정서적이고 신체적인 학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때로 길들여야 할 동물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을 짐승처럼 다뤄서는 안된다. 아이들을 항상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한에서만, 아이들은 그와 같이 성숙한 인격체로 자라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정함과 안온함만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는 까닭은, 종종 어떤 메세지는 폭력적인 방식으로만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이들의 잘못을 처벌하고 스스로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도록 훈육한다.





최근 어떤 부모들은 자녀에 가해질 모든 부정성과 고통을 소독하는 것으로 자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들은 식당에서 다른 손님들에게 배려를 강요하고(“애가 그럴 수도 있지!”) 학교에서 선생님들을 협박한다(“당신 교육청에 신고할거야!”). 그러나 사회가 그러하듯이 교실이나 가정은 무균실이 아니다. 아이들은 아플 것이고 때로 그 고통은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를 무균실에 가둬놓는 한, 아이는 배우지 못할 것이고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것이며 끝내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1) 나의 석사학위 논문도 자기의식 장을 비유적으로 독해하는 맥도웰을 비판하고 있다. 다만 본 칼럼의 논의가 석사학위 논문에서 다뤄진 것은 아니다. 이하의 논의는 주로 Barba-Kay, Anton, “Locating Hegel’s Struggle for Recognition”, Hegel-Studien, 50, 2016, pp. 33-62에 의존한다.

2)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Phänomenologie des Geistes, Gesammelte Werke, Bd. 9, Meiner Verlag, 1980, p. 111.

3) Hegel,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s subjektiven Geistes Ⅱ, Gesammelte Werke, Bd. 25,2, Meiner Verlag, 2011, p. 1079.

4) 같은 책, p. 1081.

5) Hegel, Berliner Phänomenologie, Trans. Michael John Petry, Springer Netherlands, 1981, p. 88.

6) 여기서 아버지가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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