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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에서 길을 잃다 / 최엄윤

작성자 사진: 한국연구원한국연구원

몇몇 공연 프로젝트에서 통역 일을 한 경험이 있다. 일대일의 수행 통역일 때도 있지만 협업 작업에서 다수의 목소리를 통역하며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장시간 통역을 하다 보면 집중력을 잃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나 표현이 나타나서 다시 물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언어를 아는 것도 말의 뉘앙스와 의도를 아는 것도 통역자에게 중요하다. 그건 한국어로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언어가 정확하게 듣는 사람에게 도달하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2007년 한국의 마당극단과 프랑스의 거리극단이 만나 한 달간 시골 마을에 머물며 공동창작을 했던 시간이 종종 떠오른다. 두 극단을 합친 총인원이 14명이라 통역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우려했었는데, 프랑스 배우 중 한명이 농인이었다. 농인 배우, 델핀의 참여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델핀은 들을 수는 없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입 모양을 보며 타인의 말을 유추했다. 이미 배우로서 오랜 경력을 가진 데다, 표현에 있어 자유롭고 적극적이었던 델핀의 장애는 어느새 인식에서 멀어졌고, 창작 과정에서 특별한 것이 되지 않았다. 프랑스어와 한국어, 수어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문제는 모두에게 있었고 그것은 어려움이기도 했지만, 표현을 찾아가는 아이디어, 도구가 되기도 했다. 마당극단과 거리극단이라는 신체 표현이 두드러진 두 장르가 만났다는 것은 협업에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한 달간 시골 마을 폐교에서 서로의 문화를 가르치고 배우고,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환경 역시 배우들의 친밀감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자신끼리 다양한 소통의 방법을 찾아 장면들을 구축해 나갔고, 한 달간의 창작 과정이 끝나고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할 때에도 한국어, 프랑스어, 프랑스 수어를 사용했지만,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작품에 참여했었다.    


<영화 ‘Lost in Translation’ 포스터 이미지, 본 원고의 내용과는 상관없음>
<영화 ‘Lost in Translation’ 포스터 이미지, 본 원고의 내용과는 상관없음>

     

‘다름’과 ‘결여’로부터의 매개자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최근 참여한 농인 배우(A), 연극인(B), 시각작가(C)의 협업 프로젝트 때문이다. 다른 장르, 수어와 음성 언어의 차이, 그리고 개개인이 가진 창작에 대한 생각과 경험의 차이 등을 안고 짧은 기간 진행된 협업은 결과보다도 방향과 방법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미션이 되었다. B는 수어를 능숙하게 하진 못해도 대화가 가능하고, 농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C는 이 프로젝트에 결합하며 농인은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상상했고 B의 목표에 동의했다. 하지만 뒤늦게 결합한 A는 자신의 이야기와 보여주고 싶은 소리에 대해 전혀 알려주지 않았고 프로젝트는 난항을 겪었다. 분명 A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당연할 것이라 상상했던 두 사람은 쓰기, 움직이기, 그리고 여러 질문과 대화로 A의 보이지 않는 소리를 찾고자 했으나, A의 프로젝트 참여 목표는 배우로서 쓰인 대본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B는 협업에 있어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 소통이라 생각하고 A와 C의 사이에서 수어 통역자의 역할을 했고, A의 이야기를 끌어내어 창작의 재료로 삼고자 했다. B와 C가 말하는 소통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의도의 전달과 대답을 끌어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의도란 ‘농인 배우’ A의 경험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고자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이었기에, B와 C는 마치 기자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듯 이 소통 안에서 한 걸음 비켜나 있었다. A의 청각적 ‘결여’가 너무도 명백하여 B와 C는 자신들은 ‘결여’가 없다고 믿거나 혹은 자신들의 ‘없음’에 대해 숙고해 보지도 않은 채, 즉각 A의 장애를 창작의 수단으로 삼는데, 대상으로 존재하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이야기하고 움직인다는 것, 혹은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결국 세 명의 예술가가 똑같은 위치가 아닌 A라는 대상,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장애로부터 협업이 시작되었기에 프로젝트는 불균형 위에서 삐걱거렸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농인 배우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그의 소리를 시각화하기 위해 시작된 작업은 B와 C의 협업에 시너지를 일으켰다. 생각처럼 반응하지 않고, 응답도 하지 않는 A와 함께해야만 하는 구조에서 B는 통역자에서 창작자로서 역할의 비중을 옮겨갔다. B와 C는 A의 물리적, 정신적 부재로 인해 다른 주제, 다른 소통과 창작의 도구,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고, 그 과정은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르로의 확장과 융화를 경험한 헛되지 않은 시간으로 남았다. 그런 의미로 B와 C에게 A는 오히려 그들의 실험을 끌어내는 존재, 타인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로부터 길을 찾도록 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다름’, 혹은 ‘결여’를 출발점에 둬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다름’과 ‘결여’로부터 출발할 때 좀 더 균형을 갖게 되지 않을까? 나의 무언가 ‘없음’은 질문의 대상이고, 그 ‘없음’은 채워야 할 무언가가 아닌 창작 도구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프로젝트가 앞으로 또 다른 A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균형을 발견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소통이 시작되고 협업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청인을 연기하는 법    


Ⓒ모두예술극장

  

지난 10월 19일, 모두예술극장에서 진행된 렉쳐퍼포먼스 <청인을 연기하는 법 서론 솔로 버전>을 소개하며 ‘소통’에 대해 좀 더 살펴보려 한다. 이 작품은 일본의 데프버드프로덕션의 대표, 에리 마키하라의 작품으로 농인 정상수가 연기하는 청인을 통해 “연기하는 자와 연기되는 자, 그 사이의 간극을 넘어 소통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무대 위에서 정상수는 청인을 연기한다. 관객들에게는 그가 연기하고 있는 짧은 대본이 주어지고, 10여 분의 공연이 끝나면 연출은 그가 청인처럼 연기했는지 묻는다. 만약 관객 중 발음, 말하는 속도, 쉬어 가는 지점, 움직임, 행동, 표정, 반응 등 그의 연기에서 청인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면 직접 무대로 나와 연기 지도를 해야 했다. 관객의 다수는 청인이었지만 농인 관객들도 많았다. 몇몇 관객이 손을 들어 그의 연기에서 청인 같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어 그 이유를 설명했지만, 다수 관객의 동의를 받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연기 지도를 받고 배우가 한 번 더 그 장면을 되풀이하고 나면 연출은 그가 더 청인 같아졌는지 관객의 의견을 재차 물었다. 나는 그의 첫 연기에서 목소리, 발음 등이 낯설었지만, 곧 그가 농인임을 인지하고 오히려 놀랐다. 객석의 관객들이 그의 연기를 지적하면, 꽤 설득력 있게 들렸으나 막상 새로 연기되는 걸 보면 딱히 더 청인 같아졌다고 볼 수도 없었다. 예를 들어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배우의 반응이 청인 같기 위해서는 더 놀라야 한다는 객석의 의견으로 정상수 배우가 과장되게 놀라워하는 것으로 연기를 다시 했는데, 그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았다. 놀라는 것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발음, 말하는 속도, 쉬어 가는 지점, 움직임, 행동, 표정, 반응 등은 개별적 특성에 가까워 정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 마키하라는 청인을 하나의 범주로 시각화하여 ‘연기가 좋다’는 평가의 기준,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을 제기했다.

     

에리 마키하라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농인을 연기하는 청인의 어색한 수어와 연기에서 괴리감을 느꼈지만, 청인 친구들로부터 “영화니까 괜찮지 않느냐.”, “나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등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고백건대 나 역시 이 영화에서 나오는 수어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고 아름답다고 느꼈었다. 에리 마키하라에게 이 경험은 “수어에 대한 평가는 누구의 몫인가?”, “누가 그 연기를 평가하는가?”, “그 환경은 누가 만들어냈는가?” 등의 질문을 야기했고, 역으로 ‘청인을 연기하는 농인’으로 연기론을 재조명해 보는 상황을 만들어 “청인과 농인이란 누구인가, 그 신체적 차이와 공통점은 무엇인가?”는 질문을 관객에게 돌려줬다.

     

관객의 적극적 참여가 요구되는 이 렉처퍼포먼스는 농인이 연기하는 청인과 관객이 생각하는 청인의 모습, 그리하여 다시 연기되는 청인,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수긍하거나 수긍하지 않는 현상, 현상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간극, 이 간극을 야기한 사회 구조적 문제까지 차례차례 접근하게 만든다. ‘청인을 연기하는 법’에 대해 관객에게 던져진 물음은 농인을 연기하는 청인에서 당연히 받아들여 온 “청각이라는 감각의 우위에 관해” 청인을 연기하는 농인이라는 전복적 상황을 만들어 “다른 신체를 연기하는 것”, 궁극적으로 차이와 불균형을 넘은 소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를 보여주기 위해 부조리한 세상을 만들어버린 에리 마키하라의 질문과 언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도달하길 바란다.

최엄윤, 사무엘 베케트의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말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언젠가 결국은 창작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omyu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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