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에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처음은 사뭇 인상적이다. 영화의 처음은 바로 ‘아파트 속의 외로움’으로부터 시작한다. 뉴스의 리포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지금 거대한 시멘트 구조의 아파트 속에 작은 점으로 서서 문득 외로움 같은 것을 느낍니다. ”
그나마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80년대의 장면은 경제성장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쟁이었고, 재난이 덮치기 전의 세상과 비슷하다면, 현재의 한국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무너진 세상과 닮아있다. 영화 속에서는 무너진 건물들이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무너져가는 경제, 후퇴하는 정치와 삭막해지고 있는 사회가 존재한다. 특히 폐허 속 콘크리트 더미들은 무너져가는 지난날의 성취를 상징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2000년대까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던 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이 서서히 낮아지고, 자원은 고갈되어 가면서, 국가들은 국가 내·외부의 적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은 어떤 정당도 풀 수 없는 문제이다. 새로운 바이러스는 주기적으로 세계를 덮치는 수준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 혹한과 지진이 계속되는 것처럼, 근원적 문제들은 어느 한 국가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섰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권들은 주민대표 영탁처럼 마치 몸을 바쳐 모든 것을 해결할 듯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어떤 정권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대신 그들은 영화 속 ‘바퀴벌레(아파트 외부인)’나 ‘바퀴벌레를 숨겨주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처럼, 국가 외부의 세력이나 ‘자신과는 다른 정치적 스탠스를 지닌’ 정당이 문제의 근원인 것처럼 몰아세우고, 이들을 배척하고 반성하게 하면 문제가 해결될 듯이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뒤에 남는 것은 중도파들의 침묵과 사회적 반목이다.
이는 비단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기본적인 의식주를 누릴 때에도 경쟁과 차별의 연속이다. 영화에서 나오듯이 계층을 구분짓고 자신보다 더 나은 생활조건(영화에서는 드림팰리스)에 지닌 사람에게 열등감을 가진다.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해 당장의 현실을 희생해왔던 사람들에게, 모든 것에 대가가 있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다리의 상처 때문에 방범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박소장이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한 식량을 배분받는 것처럼, 사람이 존재 자체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취로 평가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기보다는, 우선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관례를 따르는데 관심이 있다. 결국 영화의 첫 장면에서 말하듯 시멘트 속의 외로운 사회가 된다.
그런데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포커싱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사회 속의 문제만은 아니다. 영화는 궁극적으로 극단적 상황에서 드러나는 “집단 속 인간의 본성”을 다룬다. 이는 원작 웹툰의 특징이기도 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웹툰 원작 “유쾌한 왕따”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2부 “유쾌한 이웃”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직접적 모티브가 되는 작품이다. 1부와 2부에 걸쳐 웹툰이 시종일관 가장 날카롭게 파고드는 부분은 ‘인간의 악함과 이기심’이다. 그런데 웹툰은 생존을 향한 이기심이 사람을 극단적으로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지적하는 동시에,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오히려 사람을 진정으로 살아나게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는 ‘극도의 이기심으로 인해 벗어날 수 없는 외로움을 겪은 후, 결국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캐릭터’(1부에 등장)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타적 캐릭터에 대한 입체적 묘사가 바로, 영화가 웹툰과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영화 속의 이타적 캐릭터인 명화와 도균은 상대적으로 이기심이 두드러지는 캐릭터인 부녀회장 금애, 주민 대표 영탁 및 기타 황궁 아파트의 주민들에 비해 인원수도 적고, 배경 서사도 없으며 캐릭터도 평면적이다. 이러한 이타적 캐릭터들은 생사가 걸린 긴박한 상황 속에서 현실에 대한 이렇다 할 대책이 없이 이타심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이타성에 대한 역설은 웹툰에서만큼의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그 외에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색의 대비와 종교적 상징이 문제의 해결과 결부되어 활용된다. 인간의 온갖 성취들이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는 청회색의 차디찬 절망적 세계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와 대비되는 이타적 마음이나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는 주황색의 불빛 혹은 노을이 일렁인다. 종교적 구원의 기호들도 곳곳에서 보인다. 타인들을 숨겨주다가 발각되어 끌려가는 주민의 집에 붙어 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경의 문구, ‘타인’에 불과할 뿐인 영탁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된 902호의 십자가, 명화를 구출해주는 사람들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뒤에서 나타나는 장면 등이다. 영화는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적 제도가 아닌, 인간을 인간 자체로 존중하는 종교적 가치관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이미 무너져버린 콘크리트 더미 속의 세계와 세상을 뒤집어 보는 발상의 전환이 촬영 각도의 비틀기를 통해 마주한다. 우리에게도 콘크리트 더미같은 지금의 사회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회고하고, 다시 만들어나가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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