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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백삼십 일의 런타임, 이틀의 커튼콜 / 김보슬

2020년 7월 13일, 나는 2년 동안의 임기제 지방공무원이 되었다. 전날 옷가지를 몇 벌 꾸려가지고 목포 북항에 있는 호텔에 가서 하루 묵은 뒤 전라남도 신안군청에 출근했다. 새로운 도전 ― 도전인 동시에 자발적 유배 ― 에 대한 일념으로 그 해 봄 채용시험에 응시했었지만, 막상 합격을 하고 나서 현실적인 두려움이 밀려왔다. 섬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신안군. 광주보다도, 목포보다도 멀고 아는 이 하나 없는 그곳에서 내가 과연 잘 지낼 수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정말 견딜 수 없거든 언제고 마포구 우리집과 서울에서 원래 하던 일로 돌아오겠다는 마음을 먹고서야 용기를 냈다. 발령지에는 거처도 구해놓지 않았고, 내가 서울을 벗어난다는 소식은 가족과 측근 몇 명을 제외하고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 뒤 서울에 와 있을 때에는 여전히 '김피디'로, 청사에 있는 평일에는 '김주사'로 불렸다.


첫날 임명장을 받아들고 보건소 건물 5층에 마련된 사무실로 안내 받았는데 (여기서 '러브하우스' BGM이 깔리면서 카메라는 천천히 사방을 훑고, 눈부시듯 플레어(flare) 효과가 입혀지는 상상을 해 주시라!) 천고가 높고 널찍한 방은 문을 열자마자 커다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전망이 인상적이었다.


'아! 이런 곳이구나!'


사무실 전경으로 인해 새 직장에 마음이 활짝 열렸다. 여차 하면 도망가겠다는 악독한 마음을 은장도처럼 품고 왔다가, 도망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첫날 굳혔다. 바로 전남도청 앞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그렇게 비로소 김주사 된 내가 일할 곳은 '섬문화다양성네트워크'라는 이름이 붙은 조그만 추진단인데, 군청에 속해 있긴 하지만 이전에 없었던 섬에 관한 일들을 지방정부가 나서서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적이고도 특수한 조직이었다. 막 출범한 여기에 나는 국제협력 담당자로 온 것이었다. 신안, 목포, 무안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돼 있다. 오피스텔이 있는 무안군 남악리로부터 목포를 거쳐, 다리로 바다를 건너 사무실이 있는 압해도에 진입하기까지 운전으로 20분 가량. 주말에는 목포역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간다. 이렇게 내 삶은 수도, 지방도시, 농어촌에 걸쳐 삼분할 되었다.


천 개가 훨씬 넘는 섬들로 이루어진 신안군은 육지인 목포시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섬부터 머나먼 바다의 흑산도, 홍도, 대한민국 최서남단 가거도에 이르는 섬들을 모두 품고 있다. 그 해상 면적은 서울의 스무 배가 넘고, 전라남도 육지부 전체를 능가하는 규모다. 그렇다 보니 섬마다 갯벌, 심해, 평야, 모래해변 등 각기 다른 환경이 펼쳐지고, 그에 따라 식생과 언어, 생활양식도 다르게 발달해 있다. 이것을 '섬문화다양성'이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섬은 국토의 최전방으로 영해와 영공의 기점이며, 독특한 생태환경과 역사문화 자원의 보고다. 섬의 자원과 자산은 급속한 기후변화와 같이 현재 지구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쓰일 수 있는 미래 성장동력으로 여겨져 기대가 매우 크다. 그러나 아직까지 섬의 중요성과 가능성은 충분히 공유되지 못한 실정이다. 이에, 문화 다양성을 근간으로 세계 섬들 간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고, 창의적인 섬 문화, 언어, 몸짓으로 전 지구적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한다. 특히 세계의 섬 관련 기관, 지방정부, 단체, 활동가, 예술가, 연구자를 망라한 초국가 네트워크의 구축은 절실해 보인다." [단체소개 중, www.islands-network.or.kr]


이곳에서 내가 맡았던 일들은 대략 이렇다. 국내·외 섬 전문가/전문기관과의 협약 체결, 네덜란드 카스코아트인스티튜트(Casco Art Institute)와의 협력으로 신안군 주민들의 이야기를 작품화한 미술전 개최, 예술가들의 작품 활동으로 해저숲 보호의 중요성 인식을 요청하는 '바다숲 살리기 산다이' 국제 캠페인 조직,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 최우수관광마을이 된 신안 퍼플섬을 대표하여 국제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하려야 할 수 없는 고유한 '섬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들 말고도 나의 동료들이 참여하는 섬문화다양성네트워크의 큰 그림 안에 섬 데이터댐 구축, 유휴공간 재생 프로젝트, 안전한 여객선 운행을 위한 기술 개발 등 섬 생활이 오랫동안 필요로 했던 숙원사업이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우리들 중 트랜스로컬(여러 지역에 동시에 속해 있는 사람이나 현상)은 내가 유일했다. 매주 월요일은 서울에서 섬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새벽 네 시에 눈을 떠 네 시 삼십 분에 현관을 나선다. 운동 삼아 60여 분을 걸어 용산역에 도달하면 여유있게 다섯 시 오십 분발 목포행 열차에 오를 수 있다. 한겨울, 밤하늘처럼 컴컴한 서울을 열차로 벗어난다. 계절이 바뀌면 집을 나설 때에 칠흑 같았던 세상이 역에 도착할 무렵 밝아 있다, 5월은 그런 달이다. 열차 안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나면 어느덧 종착역. 인근에 세워두었던 차에 시동을 걸고 압해대교를 건넌다. 사무실 도착은 약 여덟 시 오십 분, 책상에 앉으면 바다가 보인다. 불과 얼마 전까지 어둑한 공덕오거리 빌딩숲과 효창공원 즈음을 거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완전히 다른 배경이 내 뒤에 흐르고 있으니, 아무리 반복을 해도 이건 늘 초현실적이었다. 이렇게 도보, 열차, 자동차, 교량, 선박 등으로 국토를 누비는 동안 애환 같은 것이 마음 한켠에 자라나고 있었다. 그 애환은 나 자신의 것이기도 했고, 섬의 것이기도 했다. 도시 안에만 머무는 것과는 달리 이동에 큰 대가를 치르는 섬살이의 고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남도 간의 이동에 드는 시간과 기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른 관계들을 철저히 줄여야만 했고, 나는 차츰 시간빈곤자, 메마르고 무정한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왜 섬이 도시인에게 친절하지 않은지, 왜 불편해야 하는지를 진심으로 헤아릴 수 있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타인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은 진실로 아픔이 따르는 일이었다. 말에 담긴 의미를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이거나 표현을 다르게 해석해서 서로 어색해지는 순간들이 왕왕 발생했다. 그건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던 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상대가 아예 외국인이면 나와 다른 게 당연하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니 기대치도 낮은 법인데, 모국어가 통하는 상황에서는 그런 걸 바랄 수 없었다. 유독 붙임성도 융통성도 부족한 내 성격 탓이었겠지만, 서울 사람은 외국보다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상대적 거리의 원리를 새삼 터득하기도 했다.


내 수줍음과 어색함을 활짝 열고 그 거리를 좁히지 못해 절망할 때면 찾아들었던 생각.


'나는 온몸으로 섬이다!'


아무렇지 않은듯 타향에 내 몸만큼의 자리를 점하고, 사무를 처리하고, 내가 가진 말투와 음성으로 그곳 공기를 울리면서도 그 상당 부분이 나만의 영역으로 쓸쓸히 반향되어 돌아옴을 확인하노라면 다름 아닌 내가 바로 섬이었다. 월요일 새벽이 다가오는 일요일 밤부터 그 느낌이 더 강렬해지곤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자긍심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거침없는 실천력이나 체력은 다른 이에게서 찾기 힘든 내 강점이며, 원거리 이동은 비단 출근을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의 사명이었다. 나의 관심이 차츰 균형 잡힌 지역발전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누군가는 그 편치 않은 거리 안에 머물고, 그것에 참여하고 그것을 관찰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2년이 흘렀다. 다시 헤어짐을 맞았다. 완전한 확신 없이 단출한 짐 가방으로 이곳에 왔었던 내가 결국은 사명감을 갖고 일 욕심까지 내게 되었으니 어찌 새옹지마란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3년 연장 제안은 다른 계획들로 인해 수락을 하지 못하고 애초 약속된 시간을 채우는 것으로써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나에게 섬의 일을 할 기회를 주고, 공부할 기회를 주고, "각자 선 자리에서 네트워킹 하는 섬의 플랫폼 사고"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준 나의 보스, 나의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 내 세계는 이전보다 강건하고 두터워졌다. 천 개가 넘는 신안의 섬들 중에서 내가 어디까지 가 닿았는지 마음 속으로 세어본다. 압해도, 암태도, 팔금도, 자은도, 안좌도, 반월·박지도, 기점·소악도, 흑산도, 가거도, 우이도, 병풍도, 하의도, 옥도…. 그러고도 못 가본 섬들 천지다.


공식적 마지막 출근이었던 이번 달 12일, 인수인계서에 서명을 했다. 여기까지는 한 편의 공연을 잘 마치는 심정이었다. 서울과 남도와 수많은 섬들로 만들어진 커다란 무대에 내가 출연하는 공연, 런타임은 80분이나 90분, 120분이 아닌 장장 730일.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퇴사 직전에 준비던던 워크숍 날짜가 14일과 15일로 잡혀버린 것.


'자산 바다학당 문화도시 대학'.


알다시피 신안은 자산 선생이 머물던 곳이다. 섬문화다양성네트워크와 자매관계에 있는 신안군 문화도시지원센터, 행복전남 문화지소 신안이 공동으로 마련한 이 워크숍은 해양과 관련된 창작 활동을 하려는 이들의 배경지식을 풍부하게 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자산 정약전의 이름을 땄다. 준비를 맡아 내가 섭외하였던 이들로 채워진 이 자리에 나는 더 이상 직원이 아닌 옵저버로 동행하게 되었다.


이번 자산 바다학당은 섬의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를 대표하는 강연 하나씩을 들으면서 생생한 섬 현장을 둘러보는 '렉처형 투어'였다. 목적지는 비금도와 도초도. 갯벌이 드리워진 연근해가 검푸른 바다로 연결되는 길목에 위치한 두 개의 이웃섬이다. 비금도 일대는 백악기에 형성된 응회암와 사구를 관찰하기 좋은데, 도초도는 자산어보 촬영지와 수국, 팽나무숲길과 과거 제주로부터 전해진 석장승으로도 유명하다.


[사진 1. 비금도 하누넘, 일명 '하트해변']









[사진 2, 3. 도초도 고란리 석장승과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

해안자연을 알아보는 시간을 비금도에서 먼저 가졌다. 국내 최고의 사구복원 전문가인 최광희 교수의 해안사구 강연 '바닷가 모래언덕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사구 보존의 생태적 가치와 사구 식물의 모습들을 직접 모래 위를 걷는 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해양문화를 알아보는 시간은 다음 날 도초도에서 이어졌다. 음식문헌가 고영 작가는 '바다가 품은 상상력' 강연을 통해 전통문헌에서 채집할 수 있는 물고기 도안이나 시구와 같은 창작의 실마리뿐 아니라 수산업과 교호하는 물 속 상상력을 제안했다.


[사진 4. 해안자연 강연 중 명사십리에서 만난 사구식물 순비기나무]

[사진 5. 해양문화 강연 자료 중에서, <점석재화보>에 실린 사료]

자연사와 인문학이 어우러진 투어에 선뜻 따라나서 준 사람들이야말로 평소 한 자리에 모으기 어려운 귀한 이들이었다. 방송과 공연에서 활약 중인 현대무용가 김이슬, 카리브해 출신 사진작가 Randy Richardson, 전통과 현대의 경계와 국경을 넘나드는 가야금 연주자 박경소, 해양 쓰레기를 주제로 설치미술 작업을 해 온 양쿠라, 지역참여 프로그램 개발로 잔뼈가 굵은 문화기획자 최엄윤 그리고 양윤희, 챔발로와 피아노로 한국형 피아니즘 개념을 열어가는 최현영, 우리나라 기계비평 개척자 이영준,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였던 구민자, 지질학적 소재로 조각과 설치미술을 해 온 정소영, 공공미술 기획 단체의 대표로 도시 생태계의 자생적 구조를 제안하는 장석준.


나에게서 섭외 연락을 받고 흔쾌히 응하여 주셨던 분들. 나는 본 공연을 마치고 다시 무대에 올라 인사를 올리는 기분이었다. 이것으로 이틀간의 커튼콜이었던 셈이다.


섬문화다양성네트워크에 근무하면서 나의 보스가 처음 가르쳐 준 남도의 말은 '싸목싸목'이었다. 무언가를 "싸목싸목 한다"는 것은 서두르지 않지만 게으르지도 않게, 느릴지언정 꾸준히 행한다는 뜻이다. 보스는 묵직하고 무겁고 느린 것이 더 아프다고 했다. 그리곤 아파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것을 명심하는 것으로 남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0여 년 간 나는 문화계에서 일했다. 장르상으로는 주로 현대무용과 월드뮤직 두 가지 영역에서 현장을 기획·운영했고, 직무면에서는 그러한 이벤트나 콘텐츠를 해외에 유통시키고 해외 기관과의 협업을 추진하는 국제교류에 중점을 두었다. 나는 이렇게 연결에 연결을 보태는 나의 직업을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지 꽤 오래 혼란을 겪었는데, 최근에 딱 떨어지는 직업 이름을 얻었다. 어느 번역가의 공인데, 내가 섬문화다양성네트워크에서 일하니 내 직업은 바로 '네트워커(networker)'라는 것이다. 흡족한 이름을 얻은 듯하다. 여기서 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분간 나는 네트워커로 살 것이다. 내가 개성을 드러내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직업과 비로소 매칭이 된 기쁨을 안고 서울에 돌아왔다.


나는 네트워커로서, 이제 온몸으로 섬인 것이 오히려 더 좋을 것 같다. 더 많은 배들이 나를 거쳐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배일수록 어딘가에 멈춰 연료와 식량을 보충해야 한다. 섬은 그들로 인해 부단히 연결되어 간다. 나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비금도, 도초도에 모여주었듯 이제까지 만나온 사람들과 그들과의 귀한 일들을 싸목싸목 엮어갈 일이 남았다.


[사진 6. 비금도 명사십리에서 워크숍 단체사진]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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