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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촌극 빚은 문화인 등록 사업(1962) - 문화예술계에 대한 국가 통제와 그 저항의 단면 / 강부원

최종 수정일: 9월 25일


1962년 6월 26일 서울시 교육국 문화과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의 관리와 지원을 위한 목적으로 공식적인 문화인 등록 사업을 시작한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이때 “소설가 김동리와 화가 김환기를 제치고” 제일호로 등록한 사람은 2년 전인 1960년 10월 25일 일본에서 귀국한 정연규(당시 나이 62세)였다. 정연규는 문교부 명령에 따라 서울시가 ‘문화인 등록’을 개시한 첫날 서울시청을 방문하여 자신의 증명사진 두 장을 제출하며 예술인 등록원부에 “1922년 11월 『혼』, 『이상촌』 등 배일소설을 썼다가 일본으로 추방되었으며 그밖에 일본에서 『사스라히노소라』(鄭然圭, 『さすらひの空』, 宣伝社, 1923) 등을 썼다”고 밝혔다.


정연규가 문화․예술인 등록을 하기 위해 서울시 계원에게 제출했던 서류 원부에 기록된 내용 중 가장 강조된 것은 식민지 시기 저술 작업을 통해 배일(排日) 사상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작품이 압수됐던 이력과 그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일본으로 추방되었다는 처벌에 관한 내용이었다. 문화인 등록 서류에 식민지 시기 검열 경력과 처벌 이력을 적어낸 그는 당연하게도 문화인 등록 심사에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로 간주됐다. 결국 그는 서울시 문화인으로 제1호 등록된다.


정연규가 등록 서류에 직접 적어냈던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로 확인된다. 1921년 7월 14일 『동아일보』 사회면에서 “鄭然圭作 “魂” 押収 漢城圖書株式會社 발행 鄭然圭씨 저작인 소설 “혼” 초판은 지나간 오일에 발행할 예뎡이든 바 돌연히 압수되얏다더라”라는 기사를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정연규는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 정확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일본으로 이주해 도쿄에서 저술과 출판 활동을 지속한 것으로 보아 1922년 이후 일본에 거주했던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연규가 제1호 등록한 1962년 서울시의 ‘문화인 등록’ 사업은 당시 문화계에서도 제도의 목적과 실행과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던 사건이었다. 당시 문화․예술계는 ‘문화인 등록’을 전혀 환영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편해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문화예술분야 각 계를 막론하고 ‘문화인 등록’의 절차와 방법을 문제 삼는 의견들이 속출했고, 등록 사업을 시행하는 정부의 의도와 목적은 곳곳에서 의심받았다. ‘문화인 등록’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문화인 등록 신청을 하는 정연규( 『동아일보』, 1962년 6월 27일)

  소설가 김동리씨는 현재 예총에는 거의 95%이상의 예술․문화인들이 등록하고 있으며 문학 부문에만 해도 종래에 겨우 7,80명밖엔 넘지 못하던 회원들이 5.16이후엔 거의 3백여명이나 자진 가입하고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문인들이 이처럼 총망라되다시피 한 공보부 산하 <예총>을 통하지 않고 문교부가 별도로 예술․문화인들의 등록을 받는다는 것은 “정부 시책에 어떤 혼선이 있는 것”이라고 김동리씨는 지적했다. 김씨는 이어 정부가 호의적이며 선의를 가지고 등록을 실시한다면 구태여 기피할 의도는 없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시인 서정주씨는 “등록하라면 하겠다”고 쉽게 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문화인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을 계기로 정부는 종래(5.16전)와 같은 “양념식 후원”을 버리고 “문화인들이 살 수 있는 힘을 적극적으로 북돋아 달라”고 건의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후원책이 서있어야한다고 서씨는 주장했다. “협조는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문학평론가 이어령씨는 정부의 확실한 의도가 이해되기 전엔 “등록하지 않겠다”고 태도를 명시했다. 그는 정부가 지금까지 문화예술인들의 동태를 모르고 있었다면 그것은 정부의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예총>에 가입하고 있는 사람들이 새삼 문교부에 따로 등록할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술가 박고석씨도 “문화 예술인의 ‘리스트’가 없어 문화정책을 못세울리 없으니 등록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문화인 등록 시비」, 『경향신문』, 1962. 6. 26)

     


대학로에 자리한 예총 회관.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지어졌다. 출처-한국건축

실제로 1962년에 시행된 ‘문화인 등록’은 완전히 실패한 사업이었다. 소위 문화인 자격을 갖춘 문화예술계의 인사들은 이 등록 사업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였다. 문화예술계의 반발이 점차 극렬해지고, 실제 등록 성과도 만족스럽지 않자 문교부 당국은 문화인 등록 사업에 대해 “강제가 아니다”라는 해명을 내놓기도 했으며, 등록 사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등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문교부 장관이 직접 나서 “당초 문교부가 의도한 문화․예술인의 기록 <카드> 작성은 행정상의 자료를 얻고자 한 것인데 이것이 법적인 등록인 것 같이 잘못 전해져 말썽이 되었기 때문에 문교부는 일반의 오해를 사지 않고도 전국문화예술인에 대한 행정상 자료를 수집하는 방안을 강구중에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간섭에 대한 저항 심리 외에도 애초에 문화인 등록의 기준 요건 역시 까다로워 예술계의 극심한 반발은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문화인 등록’을 위해 제출하는 서류에 필수적으로 기재해야 하는 사항은 “본적, 주소, 학력과 학위, 소속단체, 저작관계, 어학능력, 포상과 서훈, 외국여행경력, 아호, 전공부문, 종교관계 등 무려 10개 이상의 항목”이나 되었다. 게다가 접수 후 심사 절차를 거쳐 통과해야만 ‘합격’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당국은 세목별로 나뉘어 있는 정보 수집에 대해 “예술 문화인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문화행정을 수행하는데 원활을 이루자는 것”이라고 그 목적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이처럼 번거로운 등록 절차에 비해 지원이나 보상 정책은 선명하게 내세우지 않았다. 이는 문화인 등록 과정에서 밝혀야 하는 과거 행적과 기술해야 하는 정보들이 보상과 지원을 위해서라기보다 개별 작가와 예술가들에 대한 정부의 단속과 관리에 목적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1962년의 ‘문화인 등록’ 사업은 결국 제한된 정규 등록 기간에 세 명 등록이라는 초라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이때 최종 등록한 세 명 중 한 명이 바로 “소설가 정연규”였다. 문화인 등록이 무참하게 끝나고 나자 등록 첫날 등록용지를 문화과에서 받아 간 것으로 보도된 김동리와 김환기 등은 “그런 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는 반박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화과 담당관은 “두 분이 다 우리 서울문화위원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으며 모두 대리인이 용지를 가져갔다. 우리도 본인들이 직접 오리라고 생각지는 않았다”고 해명하는 등 ‘문화인 등록’과 관련한 촌극은 계속됐다.


문화․예술인들이 1962년의 ‘문화인 등록’에 이처럼 부정적이었던 까닭에는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정부가 문화․예술인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것에 대한 생래적인 반발이 있었을 터였고, 간섭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보상과 지원은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이미 10년 전 동일한 ‘문화인 등록’ 사업이 이미 한차례 먼저 시행돼 큰 파장과 분란을 일으켰던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이 끝을 맺기도 전인 1953년 5월 정부 최초의 ‘문화인 등록’ 사업은 공보부 주관으로 실시되었다. 이때의 ‘문화인 등록’ 사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화계의 일대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공보부는 문화․예술인들에게 ‘문화인 등록’이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약속받는 조처인 것처럼 홍보하고 서둘러 등록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문화․예술계의 반응은 예상외로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1960년 5.16 이후 국가 주도로 어용 예술인들을 동원해 결성된 예총(문화예술인총연합회) 기획에 대한 신문보도. 출처-월간 객석

  「문화보호법 제8조와 제19조의 규정에 의하여 ‘문화인 등록령’이라는 묘한 법령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한다. (......)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알리기도 전에 노점상인 감찰식으로 등록증을 받아야 이 나라에서 문화인 자격을 인정하겠다는 인상을 먼저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 하기야 문화인이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는데 국가적 보호원조와 생활의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그야말로 막연한 희망적 상정이야 있을 것이며, 약간의 계획도 있을 줄은 짐작 못하지 않지만 그 사업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고 문화 및 문화인을 어떠한 방법과 어느 정도로 보호 원조한다는 실천안을 먼저 공표하여야 할 것이다. (......) 또 등록 않거나 등록 못된 자는 집필도 못하고 출연도 못하고 교수 노릇도 못한다는 경찰성을 띠운다면 그도 모른다.」(「문화인 등록령 어떠케 운영될까」, 『경향신문』, 1953. 4. 4)

     

1953년 5월 5일부터 시행된 최초의 ‘문화인 등록’ 사업은 처참한 실패로 귀결되었다. 등록 마감일인 6월 5일까지 단 한 명의 등록자도 나타나지 않자 정부는 마감일을 한 달 뒤로 연장한 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문총)에 문화인 등록 협조를 요구했다. 애초 목적했던 자발적인 등록은 사라지고 정부가 주도하여 창립한 예술인 조직들의 협력으로만 간신히 인원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후에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문화인 등록을 심의 의결한 위원들과 등록자들을 중심으로 정부에서는 최상위 심급의 문화예술인 단체인 <학․예술원>을 구성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문화인 등록’ 사업의 예술가 자격 심사위원으로 문학 분야에는 박종화, 염상섭이 선정됐으며 최종적으로 120명이 서류를 접수하여 105명이 합격했다. 1953년의 ‘문화인 등록’ 사업은 사실 <예술원> 선거의 사전 작업에 가까웠다. 1954년 3월 25일에 선거를 통해 선출된 초대 <예술원> 회원 25명 중 문화 분야에는 염상섭, 박종화, 김동리, 조연현, 유치환, 서정주, 윤백남이 자리를 얻게 됐다.


문화인 등록과 예술원 선거를 둘러싼 잡음은 <예술원> 선거가 끝난 뒤 곧바로 표면화됐다. 그중 주요한 시빗거리는 기한이 정해져 있던 문화인 등록을 수속 기일을 지난 뒤에도 여전히 계속 받았다는 점과 예술원 선거가 절차에 맞지 않게 이뤄졌다는 점, 친일파가 예술원 초대 회원으로 등재되었다는 점 등이었다.


‘문화인 등록’ 사업에 관여한 <문총> 등 “당시 조직된 문단기구는 국가의 검열을 대행하는 일종의 친정부적인 정치조직이었다. 문교부가 정한 소정의 서류를 접수하면 이를 심사하여 문화인증을 교부하여 예술가임을 인정한다는 발상 자체도 기괴”한 것이지만 1953년의 ‘문화인 등록’과 <예술원> 선거로 이어지는 연속 과정이야말로 전쟁 시기 문화와 예술을 통제하고 활용하려는 근대 국가의 욕망을 보여주는 사례였던 것이다.


사실 최초의 ‘문화인 등록’은 순수한 지원 사업이라기보다 정부 수립 직후 성급하게 국가 주도하에 설립된 <문총>의 기세를 보전하는 차원에서 시행된 사후 조치에 가까웠다. 또한 전쟁 말미 반공의 교두보를 마련해야했던 공보부 주도의 전시 문화 정책이기도 했다. 실제로 1953년의 ‘문화인 등록’ 사업에는 대부분의 <문총> 회원들만이 가입 절차를 밟았다. 약한 지반 위에 첫발을 내디디며 출현하게 된 <예술원> 역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리하게 진행된 ‘문화인 등록’과 부실하게 이어진 ‘<예술원> 선거’에 대한 지적과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1953년에 있었던 최초의 ‘문화인 등록’ 사업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정부 수립 이후 국가 주도적인 예술가 조직을 창출하려는 기획과 한국전쟁이라는 시대 상황 또 식민지와 군정 경험을 채 떨쳐내지 못한 문화․예술인 집단 내부에서 불거져 나온 국가 통제에 대한 트라우마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1962년의 ‘문화인 등록’ 사업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권을 장악하며 새롭게 시행하는 문화․예술인 지휘 통제 사업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정부는 이때도 역시 등록에 부정적이었던 문화․예술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한국문입협회>(문협)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를 적극적으로 활용 하려했지만 이미 일정 수준의 질서를 확보하고 조직 내부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 <문협>과 <예총>은 일방적인 등록 정책을 불필요한 ‘이중 등록’으로 간주하며 거부감을 드러내 1953년과 같은 ‘밀어내기식 등록 성과’조차도 얻어내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부원( 작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현재는 성균관대, 한양대, 방송대 등지에서 강의하며 학생들과 문학·문화와 역사에 대해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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