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사람들로부터 철학에 쉽게 입문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다른 학문에는 그런 입문 과정을 잘 서술해 놓은 책들이 있나 보다. 자연과학에는 대학 수업인데도 교과서까지 사용한다고 한다. 여기서 교과서란 공신력 있는 여러 저자들이 힘을 합쳐 그 분야에서 꼭 알아야 될 지식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책을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철학에는 이런 입문서가 없다. 왜 없을까? 물론 찾아보면 철학에도 그와 비슷한 형식을 갖춘 책들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런 책이 과연 철학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을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철학입문>이란 책을 읽고 철학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사람은 지금껏 본 적이 없다.
개강 첫 수업 시간에 칸트는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여러분께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을 가르칠 겁니다.’ 이 말에서 철학(Philosophie)과 철학함(Philosophieren)을 대비시킨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철학에 대한 지식, 즉 이것만 알면 철학적 교양을 뽐낼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대신 알아가는 과정과 방법, 비유컨대 지식을 잉태하고 낳는 법을 스스로 깨치게끔 유도하겠다는 약속이다. 상투적인 말로 바꿔 보면,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는 법을 가르치겠다는 말이다.
사실 요즘 시대에 철학에서 배울만한 특별한 지식은 찾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볼 때 철학은 분화되기 이전의 학문을 총칭하는 명칭이었다. 그러다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분야별로 숱한 학문들이 분화되었다. 소위 ‘전문 지식’이란 것은 이렇게 분화된 개별 학문이 생산한 성과물이다. 전문 지식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철학은 어느덧 할 일 없는 ‘뒷방 노인 신세’가 된 것이 분명하다. 동료 철학자들에게 욕먹을 만한 말이고 어려운 상황에서 묵묵히 철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철학이 그렇게만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시대, 과학만능주의 시대에서는 그 이유가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많은 대학에서 철학과가 사라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철학의 존재이유는 학문 간의 융합이 요청될 때, 지금보다도 훨씬 더 긴급하게 요청될 때, 분명히 드러난다. 개별 학문에서 산출하는, 부분에 대한 정밀한 인식은 그 자체로는 유의미하기 어렵다. 오직 전체와 접속할 때만 유의미해진다. 전체에 대한 비전을 갖고 개별 학문의 지적 의미와 위상을 해명해 주는 일, 그것이 철학에게 남은 과제가 아닐까 싶다.
철학의 소명을 완수하려면, 멀찌감치 동떨어진 학문적 거리를 부지런히 횡단해야 한다. 동시에 그럼으로써 얻은 지식을 분화 이전의 단계, 곧 생각의 줄기세포로 되돌아가는 데 써야 한다. 철학의 자리는 가장 높은 지식 피라미드의 정점이 아니라 가장 낮은 역피라미드의 영점에 있다. 이곳은 뚜렷한 역할이나 사회적 기능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한 자리다. 하지만 동시에 지적 잠재력이 넘쳐나는 창조적인 시작점이다. 현명한 노인일수록 순진무구한 어린이와 닮아있다.
사실 이런 철학의 소임은 소박한 수준에서 플라톤도 알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오십대 이후에나 가르쳐야 한다. 먼저 충분히 경험하고 개별 분야의 전문 지식을 숙달하고 난 이후에야 철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학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선수과목을 가진 셈이다. 단 지식과 경험의 습득이 여타의 학문처럼 기지의 축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의 수정란으로 회귀하기 위한 것임을, (철인왕을 주장했던 플라톤과는 다르게) 우리 현대 철학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분화의 원점으로 돌아가 근본 개념을 창조하여, 개별 학문에게 새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 철학의 소임이다.
그런데 만일 한 젊은이가 당장 철학의 세계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면, 그래서 입문하는 길을 알려달라고 요청한다면, 마지못해 나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하나는 철학의 역사를 공부하는 길이다. 철학의 역사는 온갖 아이디어의 보고다. 앞서 말한 근본 개념들의 저장소다. 그 속에서 철학자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혔고, 그걸 풀려고 어떤 아이디어를 제안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철학사에서 우리는 투박한 것부터 시작해 세련된 아이디어까지 두루 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어필하는 철학자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것을 전제로, 그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길이다. 특정 철학자의 특정 책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진행하는 방법이다. 그러다 보면 그 철학자의 전집을 빠짐없이 읽게 되고, 앞뒤 선후배 철학자까지 읽게 된다.
물론 철학은 독서를 통해 얻는 지식이 전부가 아니다. 철학함이란 질서정연하게 체계화된 지식을 습득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놀라움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낯선 상황, 수수께끼 같은 문제의 한복판에 빠져들어,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라고 외치면서 지성의 촉수를 예리하게 세우는 일에 가깝다. 매뉴얼 책을 덮고 용기를 내어 물속에 빨리 뛰어드는 게 수영을 배우는 첩경이듯이, 생각의 미로로 빠져드는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 게 철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어원상 철학(philo-sophy)은 앎을 사랑하는 것이다. 혹은 사랑을 아는 것이다. 어원적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하면, 철학입문이란 앎을 사랑하자마자 펼쳐지는 지적 세계의 문지방 혹은 사랑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는 성숙함의 문턱을 넘는 일이다. 철학입문 과목을 준비하는 선생은 무엇(그 어떤 지식)을 가르쳐도 상관없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관건은 학생들에게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 특히 사랑을 알고픈 뜨거운 열정을 지피는 일이다. 배움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배움에의 열망을 육화하는 것이다. 이런 교육 풍토에서만 세상을 바꾸는 생각의 나무가 자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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