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시기 그리고 경쟁 / 김동규

진화론에 따르면 여느 생명체에 비해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은 원숭이다. 그 원숭이가 조삼모사(朝三暮四) 고사에 등장한다. 아침에 넷을 주고 저녁에 셋을 주던 순서를 바꿔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준다고 하니까 화를 버럭 낸 그 동물 말이다. 유전적 친근함 때문인지 인간은 고사 속 원숭이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이 고사는 보통 ‘간사한 꾀로 사람을 희롱한다’라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선후의 순서가 중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되기 전엔 몰랐는데, 막상 아이를 길러 보니 태어난 순서(맏이와 막내를 정하는 순서)가 인성 형성의 핵심 요소임을 깨닫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 하나만 낳는 요즘 시대에는 아이들이 특정한 인성으로 획일화되는 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한 ‘외동’ 캐릭터로 획일화되고 있다. 그런데 그 외동의 정체성을 이루는 정서는 ‘질투’다.


스탕달은 연애의 일곱 단계를 말했다. 1단계는 연인에게 감탄하는 단계이며, 2단계는 접근 충동, 3단계는 설레고 들뜨는 희망, 4단계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시기이다. 5단계는 세상에서 연인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첫 번째 결정(結晶) 단계이며, 6단계는 의혹과 질투가 생기는 단계이고, 마지막 7단계는 사랑을 확신하며 두 번째 결정 작용이 일어나는 단계다. 여기에서 스탕달은 연인 미화의 마음 작용을 ‘결정’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흥미로운 것은 두 결정 작용 사이에 질투의 단계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질투의 시련을 거쳐야만 아름다운 사랑이 안착할 수 있다는 뜻일까?



사랑이 먼저일까 질투가 먼저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을 분석하면서, 가라타니 고진은 이 질문을 잘 정식화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선생’은 하숙집 주인 딸을 좋아한다(like). 그저 호감 수준이지 아직 사랑한다(love)는 자각에 이르지는 못한 상태다. 그때 친구에게 같은 집에서 하숙하라 권하는데, 얼마 후 친구가 주인공에게 하숙집 딸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친구의 말에 강한 질투심이 일어나고 나서야 주인공은 사랑을 자각하고 결혼을 서두른다. 이처럼 질투가 사랑의 조건이자 사랑의 원동력이라면, 삼각관계는 연애 서사의 근본 구조라 말할 수 있다.


둘이 아닌 셋이 연애의 상수(常數)다. 연적의 출현을 통해서만, 사랑의 정념이 타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질투가 미지근한 호의를 응결시켜 사랑을 이루는 긍정적 계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이 너무나 위험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질투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잘루지(jalousie)는 원래 창문에 거는 블라인드를 뜻한다. 질투의 화신은 몰래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며 연인을 감시한다. <오셀로>에서 셰익스피어도 ‘녹색 눈을 가진 괴물’로 질투를 묘사한 적이 있다.


사전에서 질투(嫉妬)는 “우월한 사람을 시기하고 증오하고 깎아내리려 함”으로 정의된다. 이 정의 속에는 질투와 시기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똑같은 뜻일까? 정신분석가인 장-다비드 나지오는 질투심, 시기심, 경쟁심을 다음과 같이 매우 명쾌하게 구분하고 있다.


“질투심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고, 시기심은 타인이 소유한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고, 경쟁심은 자신이 아직 갖지 않는 걸 얻기 위해 적과 싸우는 마음이다."

장-다비드 나지오, 『카우치에 누운 정신분석가』, 임말희 옮김, NUN, 2013. 89쪽.


Juan-David Nasio

이런 개념 규정을 통해서 출생 순서가 가지는 의미를 따져 보자. 첫째 맏아이는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다. 그렇게 얼마를 지내다가 둘째가 출현하면서 자기 소유라 여겼던 부모의 사랑을 잃어버릴까 봐 불안해한다. 첫째는 운명적인 질투의 화신이다.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첫째의 기득권을 탐할 수밖에 없다. 첫째의 악착같은 기득권 고수에도 굴하지 않고 둘째는 시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온갖 방법을 궁리해낸다. 둘째의 자리는 시기심의 자리다. 마지막으로 막내는 자기 몫으로 주어진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형, 언니와 싸워 이길 자신도 없다. 그래서 막내는 일찌감치 가족을 떠난다. 아직 누구의 소유도 아닌 걸 쟁취하기 위해 가족이란 울타리 바깥의 세계, 치열한 경쟁의 세계로 내몰린다.


저출생 사회에서 외동일 수밖에 없는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모두 질투의 화신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면,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질투, 은수저 출신은 시기, 흙수저 출신은 경쟁심이 핵심 정조라고 말해야 할까? 물론 막내 중에 창의적인 인물이 많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과연 이 말이 얼마나 위안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질투, 시기, 경쟁심 셋 모두 사랑이 모자라서 생겨난 정념들이다. 이것들은 사랑을 배우는 과정에서 기필코 극복해야 할 마음의 장애물이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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