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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지금 교직 사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다정함 / 오란주

고전을 함께 읽는 독서모임, ‘고전살롱’을 운영하고 있다. 독서모임 멤버 중 그 누구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서평도 성실하게 작성하고, 독서 토론 시간에는 고개 끄덕이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경청하고 공감해주시는 분이 있다. 토론하는 책 내용 이외에 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아서 과묵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번 9월 모임에서 고(故) 서이초 교사의 49재 추모집회에 다녀왔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셨다. 그녀의 직업은 교사다. 왜 몰라봤을까. 그분이 책과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 그대로 나타났던 ‘열심히’, ‘성실하게’, ‘경청’하고 ‘공감’하는 선생님들만의 그 고유한 그 특징을.

선생님은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추모집회에 다녀와서 느꼈던 마음을 나눠주셨다. 학교에서 혼자 조퇴를 내고 추모집회에 가는 길이 무척 쓸쓸했다고 하면서 그 학교의 교무실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셨다.

“교무실에 앉아 있는 선생님들 대부분 각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어요. 교무실에서 힘든 아이들과 상담을 할 때 저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도 주변에서 아무도 아는 척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아요. 다들 자기 일이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는 거죠. 이어폰을 꽂고 있다는 것은 ‘주변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나는 내 개인 일만 하겠다’라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점점 마음을 닫았어요. 그저 월급 나오는 만큼만 일하자. 이런 생각으로 지내다 보니 처음 교사가 되어 다짐했던 보람이나 긍지는 어느덧 사라졌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답답한 마음을 책 읽는 것으로 풀고 있어요. 아마 교무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저를 이상하게 볼지도 몰라요. 저 선생님은 왜 늘 저렇게 말도 없이 책만 읽을까 하고요. 하지만 공감이나 소통이 없는 답답한 교무실 안에서 저만의 탈출구가 바로 독서예요. 그래서 요즘처럼 교직 생활이 더 힘들 때는 일부러 미친 듯이 책을 찾아서 보고 있어요.”

이분의 이야기를 들으니, 몇 년 전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 앞에서 큰 소리로 훈계하고 있는 나를 바라볼 때 언뜻 스쳐 지나갔던 교무실 선생님들의 안도하는 눈빛. “휴~ 저 애가 우리 반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야.” 그 눈빛과 무관심한 얼굴들이 떠오르자 가슴 한쪽에 찌르르한 통증이 인다. 똑같은 상황이었다. “나는 주변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나도 담임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누가 누구를 챙겨. 내 일만 하자.” 무엇보다 섬처럼 고립되고 혼자라는 생각이 나를 더 힘들게 했었다.

그날, 나와 우리 독서모임 멤버들은 토론이 끝난 후에도 거의 1시간 동안 남아서 그녀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주고’ ‘공감’해주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 선생님의 답답함과 마음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 함께 각자의 방식으로 응원해주었다. 어떤 이는 힘들 때 읽어보면 도움이 되는 책을 소개해주었고, 나는 영화 한 편을 소개해드렸다.

내가 소개해 드린 영화는 홍콩 배우 양자경이 출연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멀티버스(다중우주론 : multiverse)가 소재라 여러 우주를 넘나들며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산만하고 정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인생의 정수,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 영화의 제목처럼 말이다.


주인공은 가난한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중국계 여성 에블린이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간다. 매일의 일거리들을 처리하느라 관계가 소원해진 남편 웨이먼드는 에블린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하나밖에 없는 딸은 반항의 끝을 달린다. 다시 말해 현생의 에블린은 그녀의 삶 자체가 카오스다. 이 와중에 세무당국의 깐깐한 조사까지 받는다. 하필 그 중요한 타이밍에 다른 세계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가 등장해 에블린에게 망해가는 멀티버스의 온 우주를 바로 당신이 구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소리까지 한다.

“엄마 기다려봐” 사춘기 딸 조이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엄마는 일에 치여 딸을 돌아보지도 않고 또 다른 일들을 처리하느라 내달린다. “기다릴 시간 없어. 바쁘다니까!” 한편, 현생의 남편 웨이먼드는 바빠서 자신과는 눈도 마주쳐주지 않는 아내와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한다. ‘이혼서류라면 같이 앉아서 아내와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을 거야.’ 이 유약한 남편 대신 가정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가장의 역할을 해내는 에블린에게 다른 우주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까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서 왔어.”라고 도움을 구하지만, 그녀는 대답한다. “오늘은 너무 바빠서 도와줄 시간이 없어.”

“너무 바빠. 시간이 없어.” 이 말은 우리도 매일 입에 달고 사는 말 아닌가?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우리는 가족은 물론 타인과 함께 나누는 시간을 잃게 된다. <Giving time gives you time> 연구에서는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연구 결과를 도출해 낸다. 바로 시간을 나를 위해서만 쓰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연구 결과 이 가설은 정답으로 밝혀졌다. 시간이 없기에 돕지 못하는 게 아니라 돕지 않기에 시간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주는 것’은 행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이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주는 것을 즐긴다. 비단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시간을 내어주는 것, 그 사람을 위해 관심을 갖고 귀 기울여주는 것, 타인을 돕는 행위는 나에게도 여유와 시간을 선사해주고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이 행복의 비결을 영화 속 주인공 에블린도 멀티버스의 남편 알파 웨이먼드를 도와가며 깨닫게 된다.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알파 웨이먼드는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에블린에게 말한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각각 다른 선택을 했다면 미래의 모습도 달라졌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선택지마다 최악을 선택했던 현재의 에블린에게 온 우주를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이유는 바로 '가능성'이다. 나 또한 과거의 내 최악의 선택들을 되돌아본다면 우울감이 찰랑찰랑 차오른다. 과거만 생각하고 과거의 잘못된 선택들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나의 우울은 강이 되고 바다가 되어 아마 그곳에 빠져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수하고 실패했던 경험들이 모이고 쌓여서 나는 물론 타인의 삶까지 구원할 수 있는 힘이 키워진다. 그 힘을 제대로 분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버튼은 뭐니 뭐니 해도 '다정함'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숨겨진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버튼이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왼쪽 오른쪽 신발 바꿔 신기부터 시작해서 입술에 바르는 챕스틱 씹어먹기 등 엉뚱하고 엽기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어이없어서 실소가 터져 나오지만, 이는 결국 자신의 감춰진 내공이 빛을 발하려면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관점으로 나와 상대를 바라보고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행동들로부터 시작한다는 메시지다.

영화 속에서 이 메시지는 무술 능력까지 뛰어나 보이는 우주에서 온 능력자 남편 알파 웨이먼드의 입을 빌려 전한다. “전략적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사는 법을 배웠지. 다정함의 무기로 나는 이 세상과 맞서 싸우는 중이야.”, “지금 당신의 모든 것이 엉망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모든 과정을 겪은 후, 주인공 에블린은 온 우주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우주 공간 그 어떤 곳에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될 수 있었다해도 바로 지금 이 순간 엉망인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금 다정하게.

제목을 들어봤으나 읽어 본 사람들은 거의 없는 책,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도 다윈은 자연에서 친절과 협력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번성하여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라고 썼다. 우리는 적자생존의 개념을 잘못 해석해왔다. 다정하고 자상함이 생존 가능한 후손을 남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능력임을 그동안 간과해 왔던 것이다.

친절과 협력, 그리고 다정한 태도는 진정 개인주의 사회에서 공동체 문화를 이끌어내는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우리 학교 이야기로 예를 들어보겠다. 현재 내가 학교에서 맡은 업무는 전문적 학습 공동체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이다. 전문적 학습 공동체, ‘전학공’에서 교사들은 함께 연구하고 배움을 통해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강화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에서 강조하는 ‘다정한 소통’을 주제로 전학공을 기획해보았다. 영화 속 엄마와 딸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었던 ‘세대 갈등’은 가정뿐만 아니라 교직 사회에도 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교직의 길을 먼저 걸어오신 선배 선생님들이 그들의 지혜를 나눠주고, 후배 선생님과 함께 모여서 정답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된다면 조금은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눔과 소통의 시간으로 선생님들이 배우고 싶은 주제로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장을 열어드렸다. 우선, 오랜 시간 동안 교직 생활을 해온 선배 선생님들 몇몇 분들을 섭외했다. 그분들이 전문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분야를 강좌로 개설해서 전체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수강신청을 받았다. 총 6개의 교직 생활에 도움이 되는 강좌들로 주제만 제시하고 강사 이름을 밝히지 않는 블라인드 형식으로 오픈했다. 1, 2, 3지망까지 선착순으로 수강신청을 받아서 클래스를 개설했다. 클래스 주제에 따라 분임 별로 이동하여 소규모의 인원이 모여 함께 배움의 시간을 보냈다. 이후 식사 자리를 통해 더 깊은 소통과 나눔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소통지원비’로 식사비용을 지원해드렸다. ‘다정한 소통’을 주제로 한 전학공의 부제는 ‘우리에게 듣는 진짜 우리 이야기’다. 활동을 마치고 전학공 전반적인 운영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하니 약 88% 이상 ‘매우 좋다’라고 응답해 주셨다. 무엇보다 서로 배움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의미 있었고, 함께 대화를 나누며 힐링 되었다는 피드백을 전해주셨다.

이처럼 서로 소통하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학교 환경’이라면 이를 전학공 운영 등으로 시스템화해서 나눔과 소통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힘든 시기를 건너고 있는 교직 사회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다정함이다. 내가 행복해지는 가장 좋은 길은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내 주변에 있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고 다정함의 온기로 교직 사회를 채워갈 수 있다면 힘든 시기도 조금은 힘들지 않게 함께 잘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귀 기울여주는 것,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돕는 행위는 나에게도 여유와 시간을 선사해주고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임을 잊지 말자. 다정함으로 내가 속한 교직 사회에서 무사히 살아남고, 더 나아가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은 물론 세상까지 구할 수 있다!

참고사진 : 오산중학교 전학공 ‘우리에게 듣는 진짜 우리 이야기’ 주제별 클래스 안내


오란주(오산중학교 교사 &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행복수업 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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