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임에서 생명을 굴착하기 / 김보슬

언젠가 어느 정신분석가에게 상담 요청 이메일을 띄운 적 있습니다. 그것을 독자들께 들려드리고 싶은 내용 중심으로 새로 씁니다.

저는 삼십 대 여성이고, 수차례 사랑에 실패했습니다. 결혼을 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결혼 마운드’에 등판하여 다양한 경험을 했죠. 부모님이 만드신 맞선 자리에도 나가 보았고, 결혼정보업체에 가입도 해 보았습니다. 여전히 미혼입니다. 이유는? 그 얘기도 언젠가 들려드리죠. 어쨌든, 사랑 문제는 (낭만적 연애의 측면에서도, 제도적 결혼의 측면에서도) 한 사회를 비춰보는 데에 제법 요긴한 프리즘 아닌가요? 저의 연애사건을 두고 ‘예술인’ 친구들이 벌인 구호 활동을 들려드립니다. 그로써 독자 여러분도 각자의 연애를 떠올리며 그 안에서 체험한 한국사회, 한국문화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느껴보실 것이리라 믿습니다. 경제, 문화, 법률, 철학에 이르는 다양한 이슈와 연결 짓는 것은 여러분의 몫으로 두겠습니다. 제가 펼칠 것은 여전히 예술계 안에서의 제 형편입니다. 자, 편지를 공개합니다.

자크(가명)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상담을 의뢰하고자 이메일 드립니다. 선생님께서 다루실 만한 내담자인지 판단하시려면, 제 상황을 설명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년간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결별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울적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멜랑콜리에 가까운 것입니다. 한때 병리적 상태로서의 신경쇠약에 이르렀습니다. 극심한 슬픔 뿐 아니라 빈맥, 불면, 원형탈모, 체력저하 등 신체 증상까지 수반되었거든요.

하지만 정신력이 강한 편입니다. 잘 버티고 있고, 아주 나빴던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운데 있습니다. 타고난 낙천적 기질 덕분에 건강하게 위기를 극복 중입니다. 예컨대, 수학문제 풀기, 운동, 음악 만들기, 신앙생활 등의 활동을 통하여 우울의 에너지를 나름의 쓸모 있는 것으로 변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창조적 보살핌 덕에 실낱같은 희망을 잃지 않고 삽니다.

극 연출을 전공한 친구는 제게 ‘영화 패러디’를 제안했습니다. 어떤 영화감독이 전형적으로 다루는 여성 캐릭터를 제가 닮아있다고요. 그 감독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을 흉내 내어 보았습니다. 친구들과 즉석에서 대사를 외고, 연기하는 제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저의 연기력이 예상보다 좋더군요. 그런데 연기가 어설퍼야 재미있어지기 때문에, 일부러 못하는 척 애쓰다 보면 깔깔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벼운 ‘장난’을 하면서, 한 사람에게로 달려가는 생각들로부터 멀어지는 훈련을 했습니다.

음악가 친구에게는 작곡을 부탁했습니다. 제 자신을 위한 노래를 짓고, 부르고 싶었거든요. “듀엣곡으로 써서 나도 함께 부를 수 있게 해 줘!” 흔쾌히 부탁을 받아 주었습니다. 내면의 혼란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몸소 싸우는 저의 모습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반갑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작곡 힌트가 될 수 있는 줄글이나 사진들을, 떠오를 때마다 자기에게 문자 메시지로 보내달라더군요.

생물학을 전공하고, 돌연 진로를 바꾸어 무용수가 된 친구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은 수학 공부입니다. 실연에 처한 저에게 고교 수학의 여러 단원들 중에서 ‘극한’ 챕터를 제안했습니다. 춤에 도전하는 몸, 사랑에 도전하는 마음은 무엇에 한없이 점근하는가. 예전에 시험을 보기 위해 수동적으로 익혔던 내용들을 예술 하는 사람의 고민과 교차시켜 봅니다. ‘십일(十一)’이라는, 덧셈 뺄셈 기호를 닮은 이름을 가진 식당. 우리가 만나 수학 안에서의 에로스를 논하기에 어울리는 곳도 찾았습니다.

이처럼 매일같이 생명 의지를 수혈 중입니다. 아무래도, 제 삶의 화두는 ‘어미됨’ ‘생명성’인가 봅니다. 저는 엄마가 되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성으로서의 가임기를 놓칠까 봐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미혼인데다, 대체로 이별한 상태에 놓이고 마는 탓에, 꼭 사람을 낳는 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대신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출산하는 이가 되기로요. 쉽게 말해, 예술 활동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아니면 사랑을 필요로 하는 크고 작은 생명체의 반려자가 되어 준다든지요.

그런데, 요 근래 깨달았습니다. 지난 1년간, 불식간에 제가 비로소 무언가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낳았지요. 차마 그의 어머니여도 줄 수 없었을, 아주 어렵고 뼈아픈 사랑을 저는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죽임’을 성찰합니다. 소멸로 돌아가는 죽음 말고, 우울을 방지하기 위한 애도작업 말고, 그에 선행하야 할 것으로 보다 적극적이고 급진적인 죽임을 생각해 봅니다. 내가 마음으로부터 낳은, 마치 자식 같은 그것(사랑)을 잘 죽일 수 있어야 다음으로 이행하고, 다시금 가치 있는 무언가를 출산할 수 있을 것이란 가정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선 한 마리, 꽃 한 송이처럼 칼로 베어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닌, <상징적인 죽임>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무엇일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

옷을 디자인하는 또 다른 친구는 준엄하게 이르더군요.

“아이를 갖고 싶으면 먼저 좋은 엄마가 돼야지.”

순서를 뒤엎었는데, 과연 그렇더군요! 그러니까, ‘죽임’을 배워 좋은 엄마가 먼저 돼야겠더군요. 그것이 어미의 도리겠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주변에 죽임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응?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라고 한 거야? 그래, 그건 좀 다르지.”

여러 답변을 확인했습니다. 지옥을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아내 아우리디케를 지옥에서 구출할 수 있다는 약속을 어겨 결국 아내를 잃게 된 ‘오르페우스 신화’를 거론하며, 에우리디케가 일부러 오르페우스를 호명하여 그로 하여금 뒤돌아볼 수밖에 없게끔 유도하지 않았겠냐는 해석을 제시한 이도 있었습니다. “오르페우스! 오르페우스!” 계속 불렀다는 것이지요. 오르페우스의 참을성 부족 또는 계약 망각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상실 말고, 에우리디케로부터 출발한 계획성과 의도성을 읽어내야 죽임의 힌트를 볼 수 있지 않겠냐고요.

Jean-Baptiste Camille Corot: Orpheus Leading Eurydice from the Underworld

두 손 두 발 다 들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 바로 “네가 이겼다” 하는 선언이 죽임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우아함과 지성을 포기한 채로 야만스레 갈 때까지 가 보는 것, 그리고 혼맹(spirit blindness)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의견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전문적 상담을 통해 제 고민의 동반자를 가져보고 싶습니다. 더 나아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계에 종사하며 출산의 고통과 기쁨만 바라고 있었는데, 정 반대편으로 달려가 보고 싶습니다.

회신 부탁 드립니다.

김보슬 드림

여러분은 죽임이 어떤 것이라 생각하시는지요. 생명성을 굴착하고 반려감각을 회복하기 위한 상징적 죽임을요. 댓글을 환영합니다. 저는 어느 미스테리한 춤사위를 반복해서 보고 있습니다.

(영상: <마더>(2009) 오프닝 시퀀스, 봉준호 감독)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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