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을 인물평으로 시작하자. 학자라고 그의 저서만을 볼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용병으로 전쟁터를 전전하며 시로써 현실과 대결했던 인물이다.
나는 에뉘알리오스 왕의 시종이며
무사 여신들의 사랑스러운 선물에도 능통하다.

스넬의 삶은 아르킬로코스를 떠오르게 한다. 그는 무사 여신들의 사랑스러운 선물”, 다시 말해 2,000년 전의 그리스 로마 문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능통한”) 고전문헌학자로, 그리고 동시대의 야만에 대적했던 (전쟁신 아레스 에뉘알리오스의 시종) 지성인으로 평생 투쟁하며 살았다. 스넬을 제외하면 아마도 니체만이 또 한 명의 아르킬로코스일 것이다. 니체는 음악정신의 부활이 산업혁명 이후 시대의 독일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로서 음악정신이 빛나던 그리스 비극과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테네를 고전문헌학자로서 탐구했다.
스넬은 세계대전이 독일인들에게 남긴 뼈아픈 교훈을 되새기며,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와 자아, 스넬의 말로 하자면 ‘정신’에 주목하고 그리스 문학에서 ‘정신’이 드러나고 의식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스넬은 전후세대가 가야할 길을 보여준 정신적 스승이었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에서 파문당한 불행한 철학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스넬은 명예로운 고전문헌학자로 남았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그린비판 <정신의 발견>은 브루노 스넬이 생전 마지막으로 개정한 <정신의 발견> 1986년판을 번역한 것이다. 1986년은 스넬이 구순을 맞은 해였다. 스넬은 세계대전 직후 1946년 <정신의 발견>을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1994년에 까치출판사에서 출간된 <정신의 발견>은 저자의 1955년판이었다. 1955년판은 삭제, 수정, 대체되어 많은 변화를 겪으며 1986년판에 이르렀다.

서양 고전문헌학이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1986년 전후였고, 서양 고전문헌학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정신의 발견>은 고전문헌학 전공자들 이외에도 서양 고대 철학과 서양고대사를 전공하는 주변 연구자들에게 알뜰한 안내자였다. 서양 고대 문학과 철학의 우리나라 수용사에서 스넬의 영향이 지대했음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스넬의 영향을 받은 논문들이 여럿 등장한 것에 알 수 있다. <정신의 발견>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아르킬로코스와 사포의 서정시, 핀다로스 찬가, 아이스퀼로스 등의 비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헤로도토스의 역사, 헬레니즘 시대의 칼리마코스와 테오크리토스까지 그리스 문학사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스넬의 주장은 신선하다. 오늘날 ‘정신’이라고 불리는 것이 호메로스의 서사시 시대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언어는 이를 지칭할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호메로스의 신들은 매번 인간의 결정에 개입하며 인간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이 ‘자신’의 결정이 아닌 ‘신’의 개입으로 받아들인다. 헤시오도스는 신들의 계보를 통해 세계 질서라는 추상적 사유로 접근한다. 아르킬로코스와 사포 등의 그리스 상고기 서정시에서 드디어 “나”를 말하는 개성이 등장한다.
‘정신’의 전개와 발전을 과연 문학 작품에 쓰인 어휘를 근거로 추정할 수 있을까? 호메로스에서 어떤 어휘가 쓰였다고 해서 그것이 당대의 ‘정신’을 파악하는 근거가 되는가? 무려 500년의 구전 전승으로 켜켜이 쌓인 어휘 지층을 스넬은 다른 문헌 증거가 존재하지는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섬세하게 그 층위별로 구분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호메로스에서 안 보이는 어휘들은 사정이 다르지 않을까? 다른 것은 다 양보하더라도, 도대체 왜 호메로스를 지나면서 ‘정신’이 개화되기 시작한 것인가?

이런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우리가 스넬에게 경탄하는 것은 그의 비극론 때문이다. 니체와 크게 대립하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비극의 정수를 음악정신, 그러니까 디오뉘소스적 광기와 도취에서 찾았던 고전문헌학자는 에우리피데스에서 비극 합창대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을 보고, 동시에 에우리피데스 이후 비극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것을 목격하고, 비극의 죽음을 소크라테스에 놀아난 에우리피데스의 과오로 단정해버렸다. 여기에 힘을 보탠 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선택이었다. 타락하고 패망하는 아테네의 구원이 비극의 손에 달렸다며 아이스퀼로스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비극은 에우리피데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비극의 종말과 함께 아테네도 몰락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니체가 틀리고 스넬이 옳았다. 비극의 종말은 음악정신의 소실과 무관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아테네의 몰락도 비극의 죽음과 무관한 일이었다. 다만 그것은 그리스 비극의 시대적 요청이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러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완성에 이르러 이제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남지 않았을 때 극히 자연스러운 일은 하나뿐이다. 아이스퀼로스에서 시작된 일이 에우리피데스에서 완결되었고 에우리피데스 이후 비극은 다만 어쭙잖은 변주와 모방을 생산해내면서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퇴장했을 뿐이다.
아이스퀼로스가 선대의 비극과 구분되는 전환을 시작한 이래, 에우리피데스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자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고 선택과 행동에 따른 책임을 감당하는 인물을 더욱 의식적으로 추구했다. <탄원하는 여인들>에서 시작되고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거쳐 발전해오던 경향은 마침내 <메데이아>에서 완결되었던 것이다.
<정신의 발견>은 아리스토파네스에서 시작되고 니체를 통해 굳어버린 편견을 이렇게 바로잡았고 비극의 완성자에게 그의 정당한 권리를 돌려주었다. <정신의 발견>은 호메로스의 아킬레우스에서 벗어나 아르킬로코스의 “나”로 향한 그리스 문학이 그리스 비극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였는지 그 발자취에 담긴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