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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없는 삶, 그 이유 -국내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에 참여한 소감과 함께- / 김보슬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입 터짐’, ‘먹방’과 같은 말들에 현기증이 몰려온다. 신체 가학적이고 음식을 탐닉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마치 구경거리 대하듯 제 입을 “터졌다”고 하거나, 먹방 카메라 앞에 앉아 입 속에 음식물을 욱여넣는 장면이 범람한다. 말과 숨이 드나드는 통로로서 입은 뚫려 있어야 마땅한데도 본래 닫혀 있어야 할 곳이라는 양 “터졌다”고 스스로를 꾸짖는다. 연관검색어로 떠오른 것들 중에 섭식장애라는 말은 거식이나 폭식을 연상케 한다. 사전은 “과도한 식이 요법의 부작용 또는 여러 가지 생리적·정신적 원인으로 인하여 비정상적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증상. 거식증과 폭식증이 있다”고 풀이하며 비슷한 말로 ‘다이어트 장애’를 제시한다. 공식적인 진단명으로도 쓰이는 섭식장애라는 말에는 과연 아무 문제가 없을까? 너무 많은 식이 요법들이 고안되고 권장되는 판국에 대체 무엇이 정상인지 잘 모르겠다. 정상이 있다 한들 정상에서 이탈하는 게 그리 대수인가? 명상자는 수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여러 날 굶는다 한다. 달걀에 한이 맺혔던 탈북자는 남에 온 후 한 판을 한 자리에서 먹어치운다는 얘기를 하며 껄껄 웃는다. 전부 있을 수 있는 일. 그러니 ‘장애’로 분류되는 데에는 뭔가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다. 적어도 ‘먹었다’, ‘안 먹었다’, ‘한꺼번에 먹었다’ 정도로 끝나는 이야기보다 심각한 사태이지 않을까.

그렇다. 대개 이 문제는 우울, 강박, 불안, 자기학대, 공포, 호르몬 교란 등의 신체적·정서적 반응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수면장애가 그렇듯 말이다. 다른 문제의 일부로 부분집합을 치면서 복잡성을 띤다. 삶을 위협하는 재난 안에 둥지를 틀고 있기에 장애로 인식된다. 그런데 이 장애 앞에 ‘섭식-’이 붙는다는 사실은 음식에 관한 씬만 무대에 올려 조명을 받게 한다. 한갓 ‘광란의 다이어트’에 빠진 이들이 한 시절 감당해야 할 자업자득 정도로 여겨지게 만든다. 그래서 섭식장애라는 용어가 어째 석연찮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 섭식 포커스 자체는 비록 사태 전체에 비해서 지엽적이라 할지라도 고립된 당사자의 삶 총체적 재난현장에 외부의 개입을 소환하는, 그리하여 이해와 도움을 구하는 관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 일주일간 국내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이 개최됐다. 『삼키기 연습』을 쓴 박지니 작가가 기획하고 잠수함토끼콜렉티브·인제대가 함께 주관한 이 시리즈는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라는 슬로건과 더불어 서울의 일곱 개 책방에서 열렸다. 매일 다른 장소에서 토론, 강연, 공연, 강독, 낭독 등이 이어졌고 모든 행사는 현장 참여 외에도 유튜브로 생중계되어 온·오프라인에서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회차마다 객석이 가득 찼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리를 기다려왔던 듯하다.


사진 1. <섭식장애 인식주간> 포스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섭식장애는 젊은 여성들의 유난스런 신경증, 사회적 관심의 우선순위에서 겨우 끄트머리에 있을 만한 대수롭지 않은 질환, 다이어트 강박에 빠진 여성들이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회복될 허영의 중독, 혹은 ‘의지력만 발휘하면’ 당장에라도 깔끔히 포기할 수 있는 건강을 해치는 습관으로만 주로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더욱이 섭식장애는 일종의 ‘윤리적 실패’로 여겨지기도 쉬웠습니다. 어떤 불행의 원인이 당사자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불행을 외면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지금까지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지금-여기라는 이 복잡계는 어떤 이유로 섭식장애의 온상처럼 되어 버렸을까요? 우리는 섭식장애에 관한 그동안의 ‘납작한’ 이야기들을 어떤 힘으로 걷어내고 해부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아는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 행사 소개글 발췌 -

이 소식을 접한 것은 나의 <저녁 없는 삶> 프로젝트가 진행 중일 때였다. 내가 나를 대상으로 30일간 실행하기로 한 일종의 실험에 저런 제목을 붙였던 이유는 취침 전 여덟 시간가량 공복을 유지하면 숙면에 도움에 된다는 연구 결과 때문이었다. 오랜 불면을 겪던 나는 저녁을 먹어 보지 않기로 하면서 총체적으로 건강을 업그레이드하자고 결심했다. 점심이 하루의 마지막 식사였고, 밀가루·설탕·트랜스지방을 배제한 자연식으로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으며, 알코올과 카페인을 통제했다. 그 전에도 나는 이미 수년째 몸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남들보다 건강한지는 모르겠다. 과민한 대응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법이다. <섭식장애 인식주간>에 참여를 신청한 것은 어쩌면 내가 건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일말의 두려움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건강하지 않아 보이는 게 가장 문제였다. 밀크셰이크, 짜장면, 도넛, 케이크, 라면, 떡볶이처럼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음식을 남들과 같이 먹기를 꺼리는 일이 수 년째 반복되면서 결벽증 환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복잡한 식품 원료 사이에서 안심하고 먹을 만한 것을 고르는 나를 ‘장애화’하는 그들의 시선을 느꼈다. 때로는 나도 포기하거나 특별한 예외를 두었지만 그것대로 신경이 쓰이곤 했다.

10년이 훨씬 넘게 다양한 다이어트 장르, 식이 요법, 건강보조제, 의학, 운동 따위를 기웃대며 건강과 미모를 모두 거머쥐기를 꿈꾸었던 나는 여러 가지 절제에 익숙해져 있고, 그 절제에 방해되는 것들에 맞서 싸울 각오가 돼 있다. 그리고 나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제대로 된 점심 메뉴를 찾기 어려운 학생과 직장인의 현실에 마음이 아프다. 시중에는 영양이 불균형하고 화학성분이 잔뜩 들어간 데에다 가격마저 오른 대중음식이 대세다. 식당가뿐만이 아니라 주거환경과 직장문화도 한 몫 한다. 원룸에 사는 학생들이 환기조차 되지 않는 좁은 조리대에 도구를 갖춰놓고 제대로 조리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고, 야근 많은 직장인으로서는 시간을 쪼개어 장을 보거나 점심·저녁 도시락 싸는 일도 부담이 된다. 학식의 질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구내식당을 갖춘 회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여기에 편의점이 나서 도시락의 질을 높이겠다는 사업전략을 구상하기도 한다.

매일 찾아오는 점심시간. 어제는 부장님이 부대찌개를 고르셨고, 오늘은 팀원들이 전부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데, 막내 사원은 싫어도 따라야만 하겠지? 아니, 그건 거의 불가항력에 가깝다. 어쩌지 못하고 사 먹는 음식과 배달음식에 의존하다가 다이어트 스트레스를 받고, 먹방이 던지는 유혹에 넘어가거나, 식욕이 불안정해지고 나면 입이 터졌다는 말로 자책하기 일쑤다. 아토피나 위장병 같은 질환을 맞기도 한다. 이것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일꾼들의 건강과 입맛을 좀먹는 한편, 맹목적인 소비를 부추기는 양날의 검이다. 패스트푸드를 먹는다고 하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건강한 선택지를 요구하면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야 한다.

이에 대한 비판적 입장 때문에 나는 <저녁 없는 삶>에 돌입했다. 식사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첫 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적어내린 선언문은 그 자체로 내가 오랜 세월 무엇에 경도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무엇을 목표하는가?

1. 대사체계 정상화:

무심코 먹는 식품 중에 대사활동을 방해하는 물질이 너무 많다. 사회생활 중 원치 않는 메뉴 앞에서 솔직하기 어려운 현실은 무리에서 거리를 두는 요령과 용기를 요구한다. 내가 먼저 실천하겠다.

2. 예술의 역할 복기:

문화예술의 표기는 슬래시를 넣어 ‘문화/예술’이 되어야 한다. 통합되기 어려운 가치들. 예술은 문화에 균열을 내는 힘이다! 이방인이 식구 되는 한 끼 — 그러한 한 식사문화는 소중하지만 강요된 문화에는 저항도 따른다. 이 실험은 내 식습관을 철저히 내 결정 아래에 두는 퍼포먼스다. 예술 작업이자 자기 돌봄이다.

3. 생활습관 개선:

금주의 의미를 포함한다. 친교도 절제할 수밖에 없다. 관계에 휘둘리거나 만족이라는 감정에 중독되지 않기로 한다. 절도 있는 생활은 자기를 다스리는 기본 조건이다.

30일의 실험이 끝나자 뜻밖의 수확도 있었고, 수정할 사항도 도출되었다. 나는 내가 유혹의 홍수 속에서 그럭저럭 타협하지 않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상 나도 자제력을 잃곤 한다. 과업에 도무지 진전이 없을 때, 백지 앞에서 공황장애가 올 것만 같다. 그럴 때면 아몬드를 한 움큼 쥐고 씹기 시작한다. 식사를 거른 채 아몬드만 씹다가 이틀 만에 500그램짜리 한 봉지가 바닥이 나면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낸다. 스프링처럼 튀어 건강 생활 속으로 다시 몸을 던진다. 속죄하듯 몸에 안 좋은 것들을 모조리 걷어내고 운동에 매달리는 내가 가족이나 친구들, 동료들 눈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쯤으로 ‘장애화’된다. 그래서 섭식장애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스스로에게 장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 고작 이 정도로 장애일 리가? — 남들이 섭식장애로 어떤 고독을 겪는지에 무심할 수 없다. 그런데 관심을 가질수록 묘하다. 내 생활에 지장을 주었던 것이 음식이 아니라 관계였다고 달리 해석된다!

‘정말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지도?’

미국에서는 orthorexia(건강식단강박증)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철저한 자기검열로 대표되는 증세는 인간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인터넷에는 의학 상식, 다이어트 레시피, 섭식장애 탈출 노하우를 전하는 채널이 셀 수 없이 많다. 논문 분석, 전문가 대담, 채널지기 경험담을 바탕으로 이들은 공통되게 건강 가이드를 안내하면서도 식이와 사회생활의 충돌에 관해 입을 모은다.

사진 2. 이사벨 카로의 사진이 담긴 캠페인 홍보물.

섭식장애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알려진 것은 그 여러 갈래 중 하나인 거식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010년에 프랑스 모델 이자벨 카로가 스물여덟의 나이에 31킬로그램의 몸무게로 사망한 사건은 모델계에 경종을 울리며 세계 곳곳에서 무리한 다이어트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이끌어냈다. 우리나라에서도 거식증은 미디어에서 여러 차례 다루어졌는데, 살을 빼기 위해 거식증을 옹호하고 지향해 ‘프로아나(pro-anorexia)’라고 불리는 이들까지 등장했다. 반면 한국에서 만든 유행어 ‘먹방(mukbang)’은 해외에서 이를 따라하는 크리에이터들을 만들며 파급되어 나갔다. 구독자 3백만 명이 넘는 채널을 보유한 Nikocado Avocado는 미국의 먹방 유튜버인데, 한국 인스턴트 음식 먹방으로 조회수를 올렸다. 산소호흡장치를 단 채 괴성을 지르며 산처럼 쌓인 음식을 해치우는 괴물을 연기하는 그도 처음에는 건강 식단을 알리려고 유튜브를 시작했던 인물이다.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날렵한 몸집에 다정한 미소를 지녔던 청년이 온데간데없다. 그의 광기 어린 모습과 자극적 콘텐츠는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기를 얻으며 많은 수익을 창출한다.

사진 3. 미국의 먹방 유튜버 Nikocado Avocado의 영상 장면.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어느 날, 거식은 반드시 — ‘운이 나쁘면’이 아니라 반드시 폭식으로 돌아온다고, 굶어 죽지 않은 이상 필연적으로 그렇다는 언급이 패널 사이에서 있었다. 그것이 개인적 차원에서 거식과 폭식의 인과관계를 설명한다면 사회적 차원에서는 그 반대 역시 가능하다. 폭식이 거식을 낳는 것이다. 폭식 이미지가 집단적 무의식을 지배할수록 먹는 행위에 대한 막연한 혐오가 자리 잡는다. 먹방과 프로아나는 정비례 관계에 있다는 의혹이 든다.

사방을 둘러봐도 음식으로부터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다. 먹을 것이 넘친다는 것은 싼 값에 먹거리를 가공할 수 있는 산업이 발달했다는 뜻이므로 좋은 먹거리는 상대적으로 점점 희소해진다. 급기야 정말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은 우리 모두가 환자가 될 가능성을 안고 살기 때문이다. 음식과의 관계에 실패하여 섭식장애 환자가 되든지, 주의가 부족해서 성인병 환자가 되든지 어느 쪽으로든 가능성이 열려있다. 더욱이 우리가 실패, 상실, 노화, 억압, 죽음의 불안 속에서 갈기갈기 분열된 채 살아가는 한 섭식장애는 입맛을 다신다.

내가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통해 확인한 것은 여기에 모인 이들이 과거나 현재에 아자벨 카로 같은 거식증, 또는 극단적 병세를 경험한 사람들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섭식장애의 많은 부분은 섭식장애라는 진단명으로 명쾌하게 포착할 수 없는 여러 경계에 처해 있어서 더 곤란하다는 것이다. 과연 이 사태는 납작하지 않아서 여러 각도에서 살펴야 한다. 섭식장애를 앓는 것은 나인가, 나의 의식과 유리된 나의 몸인가, 아니면 나를 둘러싼 환경인가. 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가, 안팎을 나누는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물음이 끊이지 않는다.

매회 Q&A 시간에 열띤 질문이 오갔다.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다이어터’와 ‘웰빙충’, ‘건강염려증 환자’와 ‘건강전도사’ 사이를 배회 중이었다.

사진 4, 5. <섭식장애 인식주간> 제3일차, 박은아 글항아리 편집자와 박지니 작가가 여러 텍스트를 종횡하는 중.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모든 행사는 유튜브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채널을 통해 다시보기 할 수 있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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