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학위 논문을 쓰면서 책이 많이 늘었다. 책만큼 또 무서운 똥짐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책 구매하기를 멈출 수 없다. 처음에는 지적 허영으로 사 모았으니 내심 죄책감이라도 있었는데, 공부하는 것이 업이 되다 보니까 이 알량한 죄책감마저도 사라졌다. 절판된 귀중한 학술 서적을 찾아 헌책방들을 들쑤시고 다니거나 몇 배 웃돈을 주고 사들인 경험을 몇 번 해보면, 이미 사고회로는 망가져서 어느새 또 택배 상자를 받아보고야 마는 것이다.
애초에 좋은 학술 서적이 세상에 나왔는데 철학 전공자가 돈을 아까워하는 것은 강호의 도의가 아니다. 나의 책 구매는 대한민국의 자생적 인문학이 자리 잡기 위한 조그마한 후원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사할 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어서 나름 자제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사 업체 직원분이 서재 문을 열고서 탄식하듯 내지르던 육두문자가 쉬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 놀러 온 방문객들은 대략 두 부류로 나뉜다. 한쪽은 들어오자마자 탐욕스러운 눈으로 서가를 훑어보면서 너는 이 희귀한 책을 어디서 구했는지 추궁하는 타입이다. 네가 가로채 가는 바람에 나는 못 구했다는 식의 원망과 질투도 가끔 보여준다. 이쪽 사람들은 책이란 읽었기 때문에 서가에 꽂혀있는 것이 아니라 자고로 언젠가 (생이 다한 시점에) 읽을 것이기에 꽂혀있다는 점을 충분히 통찰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 책이 어땠는지의 감상은 물어보지도 않는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이 많은 책을 다 읽었어?”라고 묻는 이들이다. 이 질문은 나의 지적 허영뿐만 아니라 게으름과 무능력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가슴에 비수같이 날아와 꽂힌다. 움베르토 에코는 때로 “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지요. 여기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말입니다”라고 능청스럽게 답해 질문자의 기를 죽였다는데, 양심의 거리낌만 살짝 외면하면 이것보다 효과적인 답변이 또 없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책을 산다는 행위 자체가 책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점이다. 책장 한편에 자리하여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책은 내가 언제나 가용할 수 있는 지적 자산이다. 내가 책을 ‘아직’ 펼치지 않았을 뿐 그 책의 정보는 ‘이미’ 나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점에서 마주친 책을 당장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과 충동을 느끼다가도, 책을 구매한 즉시 뿌듯한 해방감을 느끼며 책상에 던져두고 다시 집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구매할 때의 만족감은 읽을 때의 만족감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러한 경험은 주관의 내밀한 앎이나 믿음, 나아가 감정이 주관 외부에 객관화될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이는 단순한 착각이 아닌데, 흔히 종교에서 초나 향을 공양하는 것도 동일한 논리다. 기도문을 외며 초에 불을 붙이면, 초가 다 녹을 때까지 초가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준다. 돈을 좀 더 지불할 용의가 있다면 연등 공양도 좋은 선택이다. 간략한 인적 사항과 함께 기도문을 적고 20만 원 정도만 보시하면 일 년 내내 연등은 당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이다. 일 년 동안 당신이 아무리 세속적으로 방탕하게 산다고 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당신은 ‘객관적으로는’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책장에 빼곡히 쌓인 책은 일종의 내 앎의 객관물로 기능한다. 나는 읽지 않지만 근사한 책장이 나 대신 읽어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읽기가 순전히 관념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책은 실제로 읽혀야 한다. 우리가 책을 실제로 읽을 때에야 책은 비로소 쓰인 실재가 된다. 따라서 책은 자신의 완성을 위해 언제나 독자를 요구한다. 독자는 저자와 함께 혹은 저자 그 이상으로 책의 작성에 참여한다. 데카르트나 스피노자가 여러 번에 걸쳐 적대적인 태도의 독자들을 우려하며 마음을 열고 따라와 주기를 간곡히 부탁할 때1), 그들은 책을 완결하는 이가 자신이 아니라 독자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년간의 고뇌와 탐구가, 무한한 외로움과 고통이, 순진무구한 독자의 가벼운 판단과 우연한 흥미에 의해 왜곡되고 다시금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너무나도 무력하다.
그러므로 읽는다는 것은 무력한 저자를 대신하여 아직 쓰이지 않은 것을 이미 쓰 것으로 뒤바꾸는 도약이다. 그 도약에 의해 책의 침묵은 깨진다. 마치 유리같이 잔잔한 수면에 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듯이. 그리고 그 파문이 너울이 되어 뭍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텍스트를 두드리고 또 두드린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며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릴 것이니,”(마태 7:8) 문을 여는 열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두드리는 그 마음인 것이다. 서재에는 언제나 수많은 문들이 기다리고 있다. 문들의 많음은 그 자체로 기쁜 일이지만, 열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문은 실상 벽과 다르지 않다.
내 석사 학위 논문의 지도 교수님이신 남기호 선생님도 두말할 나위 없는 장서가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연구실의 양쪽 벽면은 책으로 가득 가려져 있고, 교수님은 언제나 창가의 햇살 속에서 담배를 물고 “커피 마실래요?” 물으셨다. 책의 이름들은 한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사유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9월의 반절은 다른 지도 제자들과 함께 셋이서 교수님의 연구실을 정리하며 보냈다. 전부 교수님의 유품이었다. 모든 책의 첫 장에는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하는지 ‘기호꺼’라고 적혀있었다. 책마다 빼곡히 채워진 젊은 남기호의 메모들을 보았다. 하도 펼쳐져서 헤지고 장정이 끊긴 책도 많았다. 나는 최대한 많은 ‘기호꺼’를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 서재에 걸어 다니기도 힘들 만큼 옮겨놨다. 그럼에도 더 많이 구해내지 못해 한스럽다. 좀 슬지 않도록 숯과 제습제를 바꿔가며 오래 보살핀 책들이다.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눈길과 손길로 기다림의 시간을 버틴다.
유품으로 남겨진 책들은 내가 직접 구매한 책과 달리 완전히 내 것이 되지 못했다. 이 책들은 내 책장에서 여전히 ‘기호꺼’로 남아있다. 새로이 가득 채워진 책장 앞에서 나는 기분 좋은 뿌듯함과 해방감보다는 왠지 모를 책임감을 느낀다. 그 책들이 어둠과 먼지 속에서 잊히지 않기를, 다시금 쓰인 것이 될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하여 교수님이 나아갔던 곳에 도달하기를, 그리고 그곳을 넘어설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우리 제자들은 교수님의 웃음을 사랑했다. 로버트 드 니로나 로빈 윌리엄스를 닮았다고 우리끼리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가 강독회나 술자리에서 벌인 모든 재롱과 익살들은 전부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함이었다. 학위 논문 감사의 글에 나는 이렇게 썼다. “교수님 그리고 다른 학우분들과 함께 독일어 원전을 붙들고 고민하고 토론하던 시간을 저는 언제나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 시간이 마지막이었던 것을 그때는 몰랐다. 정말로. 그 미소를 다시 볼 그날까지 너무 이르게 물려받은 이 수많은 책들이 내 곁에 동행해 줄 것이다. 이제 나의 서재는 그리움과 책임감 사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1)“성찰”의 서언과 학자들과의 반론과 답변에서(ex, AT VII 10, 157-159) 그리고 “윤리학” 곳곳의 주석들(ex, E2P11S)에서 확인할 수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