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동유럽 민담에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다른 차원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다. 한 농부에게 악마가 나타나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이루어주겠소. 단, 해 준 것의 두 배를 당신의 이웃에게 해 줄 것이오.’ 그러자 농부는 씩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 눈 하나를 가져가시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뿐 아니라 한쪽 눈을 잃는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며 타인의 두 눈을 뺏으려 하는 이 같은 악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합리적인 이익 추구를 인간의 본성으로 전제한 현대 자본주의 체계에서 이처럼 과도하고 비합리적인 증오는 한낱 어리석은 짓으로, 혹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취급되어 논의의 테이블로 쉽게 오르지 않는다. 만약 합리적 이성을 압도하는 광기 어린 증오를 인정한다면 지금까지 구축해온 제도와 시스템들에 심각한 균열을 초래하리라는 공포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이웃이 통제되지 않는 악의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가정되는 순간, 의식되지 않은 채 작동하던 모든 관계는 이전과 같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그 고통에 대해 토로한 작가가 프리모 레비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 경험 이후 폭력에 대해 다시 정의한다. 일상적 차원에서부터 거대한 권력 구조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그가 경험해왔던 폭력은 모두 이유가 있는 것들이었다. 유대인 차별법에 의해 자행된 폭력조차도 유대인을 사회악으로 돌림으로서 당시 독일 사회의 위기를 돌파하고 나치즘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잔인했지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의 폭력은 전적으로 달랐다.
레비에 의하면 수용소의 시작인 기차 안에서부터 수용소 내의 일상에까지 가해진 폭력은 경제적 측면에서 오히려 낭비였고 사상적 측면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곳에의 폭력은 오직 혐오와 증오의 생산과 확대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그는 “쓸데없는 폭력”, “고통 자체가 목적인 고통의 고의적 유발”로 이를 정리한 바 있다. 레비를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이 특수한 형태의 폭력이 증언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언어화할 수 없는 것, 상징의 영역에 재현될 수 없는 것이기에 상대에게 전할 수 없는 그런 성격의 폭력이었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역, 돌베게, 2014.)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의 혐오와 분노의 분출을 설명하는 여러 시도는 인간의 감정연구에 대한 성과들을 축적해왔다.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추가되는 매체적 특성을 분석하거나 도파민 분비 등과 관련된 과학적 근거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인간의 감정을 상품화함으로써 이익 추구와 연결하는 경제적 구조를 비판하는 이 연구들은 감정을 조직하는 모종의 구조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혐오와 폭력은 사회화된 감정표현인 동시에 레비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화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이 있음이 함께 지적되어야 한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부터 팟캐스트와 유튜브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공간에서 혐오는 빠른 속도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그 양상은 담론의 형식을 띠면서 가시적으로는 논쟁의 외피를 쓰고 있다. 혐오로 점철된 성 평등 관련 논쟁에서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는 각각 자신들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각종 논리와 근거가 함께 하는 유려한 말들은 마치 그들이 ‘된장녀/김치녀’라든지 ‘한남충’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은 아니라는 점을 은연중에 강조하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혐오 표현 너머에 있는 진정한 의도란 없다. 혐오 표현이 담지하고 있는 것은 순수한 혐오 그 자체이다.
이는 억울한 피해자들에게 혐오의 표식을 붙이는 행위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을 ‘오뎅’이라고 조롱하고,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유족충’이라고 부르는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홍어’라고 지칭하는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이 같은 혐오 표현에 어떤 주장이 숨겨져 있는지를 애써 찾아내는 것이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중요한 행위라도 된다는 것인가?
최근 유튜브를 중심으로 확산하는 가짜 뉴스 역시 유사한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배가시킨다. 가짜 뉴스는 정보 제공을 통해 특정 사실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가늠하고자 하는 외피를 쓰고 있으나, 실제로는 혐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기능을 한다. 거짓된 정보의 확산만이 가짜 뉴스의 문제점이 아니다. 왜 확인되지 않는 정보를 인간의 저열한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제공하는가를 묻는 일은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혐오 발화를 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점을 이해시키려 하지만 사실은 그 행위를 단순히 ‘즐기고’ 있다.
“쓸데없는 폭력”, 혐오를 즐기기 등으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 혐오 발화는 상처받는 타인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타인을 상처 입히는 것이야말로 발화자에게 기쁨을 준다. 타인을 상처 입힘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일찍이 이 같은 기이한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 죽음충동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것이 후일 라캉에 의해 향락(주이상스)으로 세공된다. 초기 프로이트에게 있어 쾌와 불쾌는 동일한 것으로 욕망의 성취라는 동일한 목적에 복무한다. 이기적인 무의식이 불쾌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더 큰 쾌락을 얻으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꿈의 해석』에 나오는 푸줏간 주인의 아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캐비어를 스스로 금하는데 그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분석의 결과 그녀의 금욕은 우월감의 충족, 좋아하는 친구와의 동일시라는 더 큰 만족감으로 돌려받는다는 점이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쾌를 얻기 위해 현실(외부조건)과 기꺼이 타협한다는 점에서 쾌락원칙은 이후 현실원칙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게 된다. 요컨대 언뜻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행위(증상)들도 무의식적 욕망의 차원에서 살펴보면 나름의 합당한 이유와 논리를 가진다. 적절한 분석을 통한다면 욕망은 해석 가능하다는 것이 초기 프로이트가 가진 자신감의 요체였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쾌락원칙을 초과하는 기이한 충동을 만나게 되면서 곧 새로운 난관에 부딪힌다. 프로이트는 여기에 죽음충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죽음에 대한 충동인 동시에 죽지 않는 충동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 흔히 반복 강박의 증상으로 출현하는 죽음충동의 특징은 ‘고통스러운 쾌락’으로 요약된다. 여기에서 고통은 더 많은 쾌를 얻기 위해 감수하는 불쾌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충동은 목적이 없으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애초에 해석이 불가능하다. 모든 세포가 노화 즉 죽음을 향해 무조건 이행되듯이 충동 역시 인간의 정신이 무조건적인 움직임이다.
또한 이 움직임은 절대 멈추지 않고 반복된다. 임상적으로 환자들은 너무 고통스럽지만 멈출 수 없다는 말로 이 충동을 설명한다. 그러나 환자는 고통스러워하는 동시에 그것을 즐긴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환자 쥐인간은 강박적으로 떠오르는 이야기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데, 그것은 쥐가 항문으로 파고들어 가 결국에 내장까지 먹어 치우게 만드는 고문에 대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쥐인간의 얼굴에는 괴로움에 즐거움이 뒤섞이고, 수치심까지 더해져 기이하게 찡그린 표정이 떠오른다.
자신만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간은 욕망의 만족을 얻지만, 혐오를 위한 혐오를 즐기는 인간은 충동의 만족을 얻는다.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혐오 발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쾌락과는 구분되는 향락(주이상스)의 기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향락은 인간의 무의식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공격성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혐오 발화는 인간의 본능으로 인정되어야 할까? 다시 프로이트를 호출해보면, 인간은 자신의 본능을 억압하는 대가로 문명을 이룩했다.
인류는 더욱 안전하고 납득할 만하고 편안한 사회를 구축해왔다. 그것은 본원적인 즐거움, 향락을 억압하고 어느 정도 포기한 대가로 얻은 것이다. 그러나 향락을 희생하면서까지 얻은 사회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이 안전하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으며, 평화롭지도 않다면 더 이상 충동을 억압하는 일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잔인한 공격성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 본능을 억압하고 상징화시키는 일까지 포함해서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혐오의 분출을 비판하고 막을 힘은 여기에 있다.
인터넷 트롤이라는 말이 있다. 모니터 뒤에 숨어 혐오 발화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별칭이다. 트롤은 본디 북유럽 전설에 등장하는 괴물로, 어두운 곳에 숨어 살며 햇볕에 노출되면 부풀어 터지거나 돌이 된다고 한다. 흔히 파괴적인 본능을 상징하는 말이 되기에 혐오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은유 표현으로 적절해 보인다.
게다가 트롤을 물리치는 방법은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혐오를 확산하고 재생산하는 이들에 대한 대처법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즉 혐오를 햇볕에 노출해야 한다. 그들에게 자신이 얻는 향락의 정체가 항문으로 쥐가 파고드는 것을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하찮고 저열한 것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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