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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바깥은 어디일까? / 이영준

인공지능, 특히 생성형 인공지능이 널리 퍼져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끼칠 안 좋은 영향은 그것을 삶의 어느 시점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디지털기술과 문화라는 것이 전혀 없던 1960년대에 태어난 필자에게 생성형 인공지능은 또 다른 디지털 기술일 뿐이다. 쓰면 좋고, 안 써도 그만인 것이다. 2007년 스마트폰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필자는 46세였다. 어른이 되고 나서 한참 후에 스마트폰을 받아들었기 때문에 스마트폰은 살면서 만난 온갖 기계들 중 하나일 뿐이다. 결코 신주단지가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사람들이 보이는 스마트폰에 대한 지나친 집착증은 없는 편이다. 길을 걸으면서 스마트폰을 본다든가,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딱히 볼 것이 없으면서도 스마트폰부터 꺼낸다든가 밥을 먹으면서 스마트폰을 본다든가 하는 식의 행동 말이다.


반면, 지금 태어나는 세대에게 생성형 인공지능은 디폴트(dafault)로서, 당연히 주어진 환경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것 없이는 과제고 놀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식당에서 조용히 하라고 틀어준 핸드폰 영상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어린 아이들을 보면 기이하게 보이는데, 저런 애들이 커서 어떤 인간이 될까 생각해 보면 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리 비관적이지 않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며, 역사상 과학이건 상식이건 기존의 패러다임이 무너진 일이 한두번이 아닌데 다 적응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에 중독된 세대는 어찌어찌 그들의 세상을 만들 것이다. 30년 후면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에 중독된 채 성장한 사람이 대통령이고 국무총리고 장관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기이하겠지만 그 분들은 그 분들의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꾸미고 운영할 것이다. 다만 민주주의의 체제가 제대로 운영되어 올바른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 앉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한때는 자동차를 ‘달리는 흉기‘라고 부르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는 그런 표현이 사라졌다. 2000년에 29만건이던 교통사고 건수는 2024년에 19만여건으로 줄었고 사망자수는 2000년에 11,000명이었던 것이 2024년에 2,500여명으로 줄은 것이 그 원인일 것이다. 사고를 방지하는 각종 기술도 많아졌고 안전벨트 착용이 의무화되는 등 각종 조치들 덕분에 사고건수와 사망자수가 줄었는데 이를 요약하면 자동차라는 기술이 2024년도에 와서야 제대로 삶 속에 들어앉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기술을 바꿔나가고 기술에 적응한다. 인공지능도 자동차처럼 초기에는 희생자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 경우는 사람 자체가 희생자라기 보다는 진실이 희생자가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미국 드라마 <엑스 파일(X Files)>에서 유명해진 ’진실은 저 바깥에 있다(Truth is out there)’라는 말을 상기하고 싶다. 진실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만 언어는 완벽한 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물코 사이로 많은 것을 놓친다. 진짜로 맛 있는 음식의 느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면 특별했던 추억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진실은 저 바깥에 있다‘는 말은 진실을 찾으러 먼 들판으로 나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진실은 언어 바깥에 있다는 뜻일게다. 인공지능도 사람이 만들어낸 그물일 진대 그 바깥에 있는 것들을 놓칠 수 있다. 다만 그 그물이 날로 촘촘해지고 정교해지니까 모든 것을 덮어 씌울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는 특히 교육의 현장에서 화급하고 중요하게 다가온 문제다. 2025년 2학기부터 학생들은 부쩍 생성형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은 과제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교수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는데, 과연 학생들이 낸 과제의 진실성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설사 교수 몰래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은 과제를 낸다고 해도 교수가 학생을 의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몇몇 교수들이 생각해낸 것은 인공지능은 어차피 모두가 쓰는 세상이 됐으니 그런 사실을 부인하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쓰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은 그 전에 다 쓰고 있었다. 그럴 때일수록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의 바깥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의 안과 밖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그 균형이 무너져서 세상이 급격히 인공지능 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바깥에 무엇이 있을까? 세계 전체가 있다. 그간 인터넷 웹에 쌓인 채 살아가느라 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구글에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If it's not on Google, it doesn't exist)"라는 말은 얼마나 건방진가. 구글에 안 나오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사례 몇 가지만 들어보자. 채내키, 샤쓰개, 융질거리다, 판나다, 생을력하다라는 말들이 그것이다. 이 말들은 구글에는 안 나오지만 필자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실제로 쓰던 말들이다. 두 분은 지금 세상에 안 계시지만 필자와 동생은 지금도 이 말을 쓰고 있다. 이 말들은 함경도 말들이고, 필자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함경도 출신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항상 쓰셨다. 지금 남한에는 3만명의 탈북민들이 살고 있고 그 중 61%가 함경도 출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남한에서 함경도 말을 들을 수 없을까? 필자의 아버지가 한국전쟁 전에 월남해서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함경도 사투리 쓰는 것이 창피했다고 했다. 지금의 탈북민들은 그때보다 많이 달라진 남한에서 함경도 말 쓰는 것이 더 거북스럽지 않을까? 그런 거북스런 감정을 만들어낸 분단의 속사정은 인공지능의 바깥에 있는 영역이다. 결국 인공지능을 잘 쓰려면 그 안과 밖을 부지런히 넘나들어야 할 것이다.


소설가 김애란은 최근 jtbc에 나와 손석희의 침묵방송(노회찬 의원 추모로 인한 방송사고)을 인공지능이 구사하지 못하는 침묵의 언어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을 표현한 언어라고 설명했다.
소설가 김애란은 최근 jtbc에 나와 손석희의 침묵방송(노회찬 의원 추모로 인한 방송사고)을 인공지능이 구사하지 못하는 침묵의 언어 그러나 가장 많은 것을 표현한 언어라고 설명했다.



이영준 (기계비평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이영준 (기계비평가,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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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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