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유학하던 친구가 해 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가난한 유학생이 장인 장모를 독일에 초대해서 여러 날 관광 가이드 역할을 했던 일이 있었단다. 모자란 살림이었지만, 이 남자는 결혼을 허락해 준 아내의 부모를 최대한 환대하였고, 손수 운전을 하며 유럽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자랑하기 좋아하는 장모는 한국에 돌아와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위 자랑을 요란하게 했다는데, 사위의 극진한 환대가 자랑의 주요 내용이었지만, 자랑거리엔 사위가 베를린 대학에 다니고 벤츠를 끌고 다니며 강변 아파트에 산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독일에서 베를린 대학은 특별히 좋은 대학이 아니고, 이 친구가 몰던 중고 벤츠는 지천에 널려있는 싸구려 똥차이며, 집은 실개천 주변에 있는 (과거 주둔 미군이 쓰던) 허름한 아파트(유럽에서 아파트는 가난한 사람이 거주하는 주거시설이다)여서 한국적 상황과 접목시켜 해석될 때에만 자랑이 될 수 있다. 한국식으로 바꿔 말하자면, 사위가 독일의 서울대에 재학 중이고 고급 외제차인 벤츠를 몰고 다니며 비싼 한강변 아파트에 산다고 자랑을 했던 셈이다.
독일에서 이 이야기를 해준 친구의 허름한 중고차를 얻어 탄 적이 있다. 그 차로 속도 무제한 도로인 아우토반을 시속 180~200 킬로미터로 달렸다. 한국에서 기껏 150 정도의 속도감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 쾌속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동시에 그 속도까지만 낼 수 있는 중고 벤츠의 비애감도 함께 느꼈는데, 우리가 탄 차를 추월하는 날렵한 차들이 주행 내내 이어졌기 때문이다. 시속 150km도 사실 굉장한 속도다. 야구에서 투수가 그 속도의 볼을 던지면 타자는 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그저 비가시적인 감(感/監)으로 배팅한다고 한다.
그런 야구공보다 더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도로 위의 운전자 누구도 역주행을 하지 않고 급정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생존하려는 의지를 누구나 공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안정적인 도로 주행 시스템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특히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원자에 해당하는 합리적 경제주체는 자신이 이기적 존재임을 거리낌 없이 천명한다. 전통 윤리에서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이기심을 죄악시해 왔다면, 자본주의 윤리에서는 합리적인 계산을 통해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인간을 당연시한다. 아니 인간의 지극히 정상적인 민낯이자 도덕적으로도 올바른 개인의 모습으로 이상화된다. 현대인들은 사리사욕의 추구가 공적 이익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은혜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리하여 이 시대 우리 사회에서 이기적임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은 절대로 파렴치한 짓이 아니다. 오히려 위선 떨지 않는 솔직한 발언이 되었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나는 이타적으로 살라는 말을 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다. 까딱하면 위선자로 찍힐 일을 왜 하겠는가! 교통법규를 준수하게끔 해주는 그 질긴 생존 욕구와 살기 위해 핸들을 꺾는 그 (자기 방어적) 본능적인 이기심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건 아닐까?
이기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이유는 이기(利己)를 구성하는 두 용어, 즉 ‘이익’과 ‘자기’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이 이익인지 잘 모른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가 잘 보여 주듯이, 튼튼한 야생마를 얻는 것이 이익처럼 보이지만 아들을 장애인으로 만든 치명적 불이익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문학이나 철학과 같은 돈 안 되는 학과들을 없애는 것이 (마치 기업 효율성을 높이듯) 이익처럼 보이지만, 최고 교육의 장을 황량한 폐허로 만든 주범이라는 점에서 불이익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첨언하지 않겠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이득이 귀속되는 ‘자기’가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면서 사람들은 ‘이기성’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는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것이 내게 이익인지도 잘 모른다. 때때로 이기적인 동기로 행한 일이 공공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이타적인 동기로 행한 일이 공익을 해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는 훌륭한 왕으로서 역병을 퇴치하기 위해서 발 벗고 나선다. 역병이 창궐하는 이유가 선왕인 라이오스를 죽이고 제 어미와 동침한 패륜아가 버젓이 나라를 활보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패륜아를 찾아 역병을 퇴치하는 것은 통치자의 공적 업무에 속한다.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그 일을 자기 일처럼,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한’ 일처럼 다룬다. 하지만 이 비극이 보여주듯이, 나를 위해 한 일이 나를 파멸의 길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내가 누구인지 나를 위한 이익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다.
그대들도 보게 되겠지만, 나는 당연히 이 나라와 / 신을 위해 그대들의 복수에 가담할 것이오. / 먼 친척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 나는 이 나라에서 그 오욕을 내쫓을 것이오. / 왕을 시해한 자라면 그가 누구든 내게도 / 그런 손으로 같은 짓을 하려 할 게 아닌가. / 그러니 그분을 돕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오.
인간은 절대로 이기적일 수 없다.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원리를 몰라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기에, 혹은 이익이 불이익이 되고 불이익이 이익이 되는 변화무쌍한 세상 이치를 알 수 없기에, 혹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운명이기에, 이기적일 수 없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인간이 이기적인 욕망을 가졌다 하더라도, 단기적 이익에만 눈독을 들일 것이 아니라 장기적 이익을 고려할 줄 아는 진정 합리적인 이기적 주체가 되자. 때론 불이익을 감수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것도 각오하자. 자신의 운명이 최후에 어떻게 기록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비극의 주인공이야말로 누구보다 더 멋진 영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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