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식과 나 *
가벼운 몸을 지독하게 선망한 결과, 내가 일종의 운동강박적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중이다. ‘일종의’ ‘-적 경향’이라는 데에 못을 박는 것으로 심각성과는 선을 긋고도, 칼로리 섭취와 소모를 둘러싼 문제에서 적잖이 유난을 떨어왔으니 친구들에게 핀잔을 들을 만도 하다.
영국 텔레비전에 출연한 어느 거식증 환자가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자기는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요리하는 것을 즐기고, 먹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런데 불안이나 번아웃과 같은 특정조건 하에서 음식혐오에 사로잡히는 그를 건강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나 역시 음식과의 복잡한 관계에 놓여있음을 인정한다.
우리는 음식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일단 이렇게 시작된 물음은 외모 추구 욕망의 문제에만 국한해 둘 수 없게 되었다. 유통 고리를 단축시켜 주는 지역 농산물 소비, 친환경 먹거리 재배, 건강 식습관, 다문화 먹거리와 도축의 윤리성과 같이 연결 지을 수 있는 사안들만 해도 그득하다. 자못 어수선하게 생각들 사이를 파고들어 오던 이 문제는, 지난 2월 16일 “순환감각”(사이언스월든×기계비평 집담회)이라는 제목을 걸고 진행된 어느 온라인 심포지움을 계기로 예기치 않은 전개를 맞이했다. 한 발표자는 필리핀 서민 음식인 ‘빡빡(pagpag)’을 소개하며 “나의 음식쓰레기가 다른 이의 음식이 될 때”를 주제로 이야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내가 버린 음식이 누군가에게 칼로리와 영양소를 공급한다니!
이제, 먹고 난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 하는 쪽을 더듬어 볼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해, 쓰레기. 그것은 음식물 쓰레기일 수도 있고, 음식이 담겨 왔던 플라스틱 용기일 수도 있다.
* 음식과 쓰레기 *
10년도 훨씬 더 전에 여행했던 아르헨티나를 떠올렸다. 휴양이나 관광보다 취재에 가까운 방문 목적으로, 현지의 일상에 밀착해 있던 중이었다. 초고도 인플레이션으로 온 나라가 신음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불안해지는 경기에, 그곳의 가장 저렴한 식재료였던 소고기의 값마저 폭등하는 초유의 사태가 연일 벌어졌다. 흥미로웠던 것은 현지인들의 식사 광경이었는데, 천정부지로 솟는 물가에도 그네들 밥상은 음식으로 풍족했고 매번 먹다 남긴 것들을 폐기하는 일로 식사가 마무리됐다. 버려지는 먹거리에 관대한 자세를 엿볼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음식 남기는 일을 탐탁찮게 여기던 우리들 몸에 밴 습성하고는 판이했다.
대신 운동화, 치약, 학용품 같은 공산품을 해지고 닳도록 아껴서 쓰는 것이 우리하고 또 한 번 달랐다. 상대적으로 싸고 풍족한 자원이 서로 달라서 만들어지는 차이였다.
영화에서 보았던 남미의 여러 나라가 그랬듯, 아르헨티나 또한 산업과 금융이 집중된 도시일수록 도시 전체의 절반은 극빈촌으로 채워져 있었다. 얼기설기한 판잣집들 사이로 총기사고며 각종 범죄의 온상이라고 알려진 이곳을 현지인들은 '비샤(villa)'라고 부른다. 직역하면 그냥 빌리지(village), 즉 마을이라는 뜻인데, 아르헨티나식 스페인어에서 빈민가를 일컫는 말로 정착한 용어였다. 내가 머물던 로사리오(Rosario)도 그 나라의 두세 번째에 꼽히는 대도시였는데, 역시 그 절반이 비샤의 얼굴을 한 채 극심한 빈부의 명암을 드리우고 있었다.
어떤 거리엔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즐비하게 폐품들이 나뒹굴었다. 왜 이렇게 쓰레기가 아무 데에나 널브러져 있고, 수거도, 분리도 되지 않는가. 나를 안내했던 현지인 친구 크리스티안이 했던 말은 아무래도 잊을 수 없다.
“비샤 근방이라든지 원주민들이 사는 동네가 특히 이렇지. 내가 보기엔 거기에 사는 주민들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사태를 너무 축소하고 말아. 최근까지도 그들의 고향은 나뭇잎이나 지푸라기 같은 것을 생필품으로 이용하는 곳이었지. 물건의 쓰임이 다한 뒤에 아무 데에나 내버리는 게 자연스러웠을 거야. 그런데 소득의 기반이 도시로 전환되면서 경황없이 그들도 이곳으로 밀려나와야 했는데, 쓰는 물건이 싸고 흔한 플라스틱 용품으로 급격히 대체되었어도 오랜 생활양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 거야. 길가에 쓰레기가 넘쳐나게 된 것은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시간이 흘러, 현재는 고인이 된 홍콩의 큐레이터 하워드 챈(Howard Chan)과 서울 정동에서 만났던 날이었다. 그날의 대화에서 그는 흥미로운 가설을 세웠는데 홍콩에서는 거주인의 소득 수준이나 출신 지역, 종사 직종에 따라 아파트 창살(窓살) 디자인이 구별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아르헨티나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우리는 쓰레기 또한 홍콩의 창살처럼 한 사회의 인문적‧사회적 지표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음식은 먹으면 먹는대로, 남기면 남기는대로, 각기 인체의 소화기를 관통하거나 쓰레기통을 거쳐 어디론가 버려진다는 점에서 엇비슷한 운명에 놓인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잉여 지방이 될 수도 있고, 그 밖의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생활 및 산업 폐기물을 다루는 공식 집계뿐 아니라, 우리 곁에 버려지는 것들의 순환 여정을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다 다양한 차원에서 검토해 보는 것은 학문의 연구과제가 될 수 있을 뿐더러, 일상의 면면을 되짚어보게 할 것이다. 크리스티안의 분석은 쓰레기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 나와 쓰레기 *
광화문에서 부암동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아씨고전의상실’ 자리에 프랑스에 본점을 둔 ‘부트카페’가 입점했다고 하여 들렀다. 불꺼진 옛 간판을 그대로 둔 채 커피를 팔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교차시키는 공간을 활용한 마케팅 기법은 이미 새삼스러운 것은 아닌데, ‘순환’에 대한 대화를 나눠보기에는 그럴듯한 배경이었다. 동행한 경은언니에게 문득 얼마 전 집에서 만들어 본 후무스(중동식 병아리콩 무스)가 떠올라 이야기를 꺼냈다.
“후무스 만든다고 불린 병아리콩을 사다놓고 냉장고에서 몇 주를 방치했지 뭐야. 버리기 아까워서 포장을 뜯었더니 영락없는 낫또 냄새가…!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더니 일부러 발효된 콩을 쓰는 레시피도 있더라, 독특한 풍미를 내려고. 그래서 그걸 버리지 않고 그대로 후무스를 만들기로 했어. 냄새가 쿰쿰한데, 탈이 나지는 않았어. 좋은 유산균이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낫또로, 홍어로, 음식쓰레기로, 창의력으로, 시레기로, 우거지로, 부대찌개로, 재활용되는 ‘아씨의상실’로, 심포지엄에서 들었던 ‘빡빡’으로 정처 없이 돌고 돌며 누군가에게 중요치 않은 음식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자원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는 내용으로 분주해지고 있었다. 잘 버려지거나 탈각되어야만 비로소 순환이 가능하리라는 언급도 오갔다. 한국의 ‘라스트오더’, 그리고 유럽에서 시작하여 최근 미국에서도 출시된 ‘Too Good To Go’ 같은 앱은 영업장의 마감시간까지 당일 소진되지 않은 식재료나 식품이 할인가에 거래되도록 하여, 폐기물을 줄이는 동시에 업주와 고객 모두에게 합리적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렇게 먹거나 쓰고 난 자리에 간혹 쉽게 처치되지 않는 것들이 남겨진다. 도시로 이주한 원주민의 생활 반경을 원혼처럼 배회하는 플라스틱 용기 같은 것들 말이다. 저 먹거리들이 일회용기와 비닐 봉투에 담겨져서 새 주인의 허기를 해결하러 달려간다. 그러니 자원의 재배치 과정에서 ‘순환의 미’를 세심하게 실천하고 있는지는 별도로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한 쪽은 분명 ‘제로웨이스트’인데 다른 쪽에 쓰레기 플러스를 기입하는 대차대조표를 그린다면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폐기량을 줄이거나 유휴자원을 쓸모 있게 재활용하자는 선의가 창의적인 사업 모델, 경제 효과로 이어졌음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이후의 문제들과는 아직 충분한 조율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음식 자원 활용과 거기서 만들어지는 후속 폐품의 처리는 어느 정도 분리되어 상이한 접근을 요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순차적‧연쇄적인 반응 속에서 찬찬히 진단되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화로운 해결안을 당장 도입할 수는 없더라도 미래를 전혀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처럼 거리마다 커피전문점이 있는 나라에서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일회용품 줄이기를 고민하거나 아직 시행하지 않는 것은 의아하다. 예컨대, 테이크아웃 고객이 보증금을 내고 이동식 다회용 잔에 음료를 제공받은 뒤―다회용 잔이 반드시 친환경적이지는 않다는 논란이 있기는 하다―동일 업체의 어느 지점에서라도 용기를 반납하면 보증금을 반환받을 수 있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동일 프랜차이즈 업장들이 비교적 조밀하게 입점해 있는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보다 유리하다.
* 자연에서 되돌아오는 것 *
지난 겨울, 서울 연희동 ‘보틀라운지’에서는 장한나 작가의 전시가 열렸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작가는 해변에서 채집한 것들을 전시했다. 언뜻 자연물처럼 보이는 이 사물들은 곰곰이 뜯어보면 버려진 플락스틱과 같은 인공물들이다. 작가는 이것들을 ‘뉴락(New Rock)’이라 이름 붙였다. 자연에서 돌아온 새로운 암석이라는 뜻이다.

작가는 플라스틱이 자연에 버려진 후 오랜 시간이 지나 햇빛에 노출되고 풍화작용을 거치면서 점차 부식되고 변형되어 돌의 형상을 하게 되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값싸고 가공이 쉽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도입된 플라스틱 사용이 빚어낸 결과를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와, 우리가 소비한 물건들의 폐기 이후를 고민하도록 촉구한다.
작가는 주로 관광지화되지 않은 바닷가에서 뉴락을 채집한다고 한다. 관광지화된 바닷가는 떠밀려오는 쓰레기를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데에 반해,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바닷가는 밀려온 쓰레기가 그대로 방치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채집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는 이번 여름, 새로운 그룹 전시와 섬마을 어린이 미술 워크숍 등에 참여하는데, 쓰레기와 우리에게 예고된 미래를 호소할 것으로 기대한다. 전시는 5월 말부터 약 두 달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간척지, 뉴락, 들개와 새, 전원의 소리로부터(Reclamation, New Rocks, Stray Dogs, Birds, and Acoustics of the Garden)>라는 제목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어린이 미술 워크숍은 8월 중 흑산도 ‘자산어보마을학교’에서 현지 학생들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관련 소식은 추후 작가 인스타그램 @new___rock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한나 인스타그램 링크)
나도 지난 11월 전라도 앞바다의 섬 우이도에 방문했을 때, 인적이 드문 해변에서 쓰레기 퇴적 광경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백사장까지 표류해 온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은 멀리서 보면 마치 형형색색의 조약돌인 양 아름답기까지 했다. 서두에 밝혔듯 몸과 음식물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나는 몇 가지 식사 원칙을 세워두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천천히 먹기이다. 이것이 해외에서는 ‘mindful eating’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도 하는데, 그 원리는 단순히 먹는 순간에 집중하면서 무엇을 먹는지를 음미해 보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는 ‘태식(怠食)’이라 명명하고 있다. 음식물을 천천히 씹고 으깨고 삼키는 동안 그것이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나 무엇을 품고 내게로 왔을지를 골똘히 생각해 보자. 난파한 쓰레기 더미에서 폐플라스틱 가루를 머금고 솟아난 것이기를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태식 실천은 적은 양으로 포만감을 느끼기 위한 수단으로 그치지 말고, 다른 생명체가 어디에서 왔을지를 상기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감각을 깨우는 것으로 완성돼야 할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려는 지금, 나는 밴드 ‘전기성’의 노래 <신나는 진화여행>의 한 자락을 흥얼거린다.
“(…) 그 피를 마시고 죽은 사체의 미생물로 순환되어 나는 재생하네. 눈물을 보이지 마, 끝이 아냐. 너와 나는 큰 원을 그릴 뿐이야.”
그렇다. 이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 나는 쓰레기에 관해, 순환에 관해 건넬 수 있는 무수한 이야기들 중 아주 일부만을 가지고 애써 변죽을 울린 데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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