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종종 한 쌍의 할머니와 마주치곤 한다. 얼굴 모습과 체형만 보아도, 그 둘은 영락없는 모녀 사이다. 신체의 외양에서 유전자의 수직적 연속이 확연하게 발견된다. 간간이 들리는 두 노인의 대화에서 그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분은 휠체어에 앉아 있고, 딸로 보이는 분이 휠체어를 밀고 있다. 따님의 나이도 70이 가까워 보인다. 어떤 사연으로 모녀가 노후를 같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머니는 거의 말이 없다. 주로 딸이 말을 한다. 딸의 목소리는 피부의 나이에 비해 훨씬 젊다. 가끔씩 그 목소리에는 어린 아이의 생떼와 아양까지 묻어있다. 엄마랑 살기 때문일까? 노파가 된 딸도 가끔 어린이가 엄마에게 칭얼대는 느낌으로 말한다. 부지런히 딸은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바깥바람을 쐬게 해 준다. 두 모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고령화 사회의 한복판에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또한 인연이라는 생의 실오라기, 더 나아가 윤회라는 것도 떠올리게 된다.
처음에는 따님이 안쓰러워 보였다. 저 연배면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어머니를 모셔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안쓰러운 눈으로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 따님의 표정은 언제나 해맑다. 활기차고 행복해 보인다.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고매한 인격자 같다. 아니, 정확히는 이렇게 보였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점도 사실이지만, 딸은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정말로 즐거운 거다. 모친 봉양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오히려 딸이 엄마에게 심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거다. 그들은 서로에 기대며 삶의 허전한 구석을 함께 책임지는 듯 보였다. 소위 ‘책임’이란 생의 허전함에 공명해서 마주한 공허를 기꺼이 대신(代身)하는 행위다. 딸이 어미의 다리를 대신하고 어미가 딸의 고독을 대신한다.
작년 여름(2021년) 철학자 이규성 선생이 세상을 떠나셔서 선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그의 책을 구입해 읽은 적이 있다. 선생이 이화여대에서 정년을 마치고 교정을 떠날 무렵 출간한 책, <한국현대철학사론>과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이 그 책들이다. 두 책 모두 한국 철학사의 명저로 남을 것이라는 게, 일독 후의 첫 소감이었다.
나는 이규성 선생과 특별한 인연이 없다. 아니, 20대 초반에 우연히 선생을 딱 한번 만난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해맑은 눈으로 동서 철학의 차이와 융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젊은이였다. 그 주제로 이대 철학과의 동년배 학생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궁지에 몰린 그 친구가 선생과의 만남을 즉석에서 주선했다. 학생이 자기 힘으로 상대를 설복시키기 어려우니까 스승을 부른 것이다. 어린 학생들끼리 논쟁하다가 학생이 선생을 부르고, 그렇게 부른다고 선생이 나오다니 놀랍지 않은가! 당시에도 아연실색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역사책에나 나올법한 까마득한 옛일 같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낭만이 있었다. 지금 대학의 분위기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선생과 여러 내용의 대화가 오갔지만, 유감스럽게도 단 한마디만 기억난다.
“철학의 마지막은 교육이다.”
망각했던 그 날의 대화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서, 아니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선배 철학자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각각 천 페이지가 넘는 책 두 권을 그 여름 내내 읽었다. 그런데 개인적인 기억 복원 작업과 무관하게, 책의 내용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생전에 선생께 배움을 청하지 못한 게 못 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현대철학사론>은 동학 이후부터 20세기에 활동했던 한국의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다. 번듯한 한국철학사를 내놓지 못한 우리 학계에서 이 일은 누군가가 꼭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아마 선생은 이 책을 무거운 사명감으로 집필했을 것 같다. 반면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는 선생의 개인적 관심,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즐겁게 쓰여진 책처럼 보인다. 이 책의 제목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패러디한 것이다. 여기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쇼펜하우어 철학에 대한 해설서다. 평범한 해설서는 아니고, 자신의 철학적 관점에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재구성하고 재평가한 해설서다.
선생이 쇼펜하우어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사연이 흥미롭다. 두 가지 사연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쇼펜하우어가 서양 최초로 서양 바깥 문명의 사상에 대해 호의적인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여 자기 철학의 일부로 흡수한 철학자라는 점이다. 쇼펜하우어의 경쟁자였던 헤겔이 동양을 무시했던 태도와는 대조를 이룬다. 다른 하나는 청년 시절 선생의 친구 가운데 쇼펜하우어를 유난히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결국 그는 여러 사정상 공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를 대신해 쇼펜하우어를 연구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 전문가로 분류되는 선생이 오리엔탈리즘에서 빗겨나 있는 쇼펜하우어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친구를 대신해서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사연이다. 이 역시 검질긴 인연의 힘이다. 아무튼 선생의 쇼펜하우어 연구는 전문가 수준을 넘어선다. 국내외 이만한 쇼펜하우어 연구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선생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한 문장만을 뽑아보라면, 이 구절을 택할 것이다.
“윤회는 우주적 책임의식을 갖게 하는 현상적 질서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모녀는 어떤 인연과 윤회를 통해 만나게 되었을까? (신화가 가미된) 윤회의 내용은 중요치 않다. 다만 모녀가 서로에게 책임의식을 가진다는 게 중요하다. 이규성 선생과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거의 생면부지이지만 이 땅의 철학하는 선후배로서 책임 의식을 공유한다는 게 아름다운 일이다. 별 볼일 없고 한심한 인생살이에서 이만큼이나 멋진 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세계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라는 니체의 말이 아련히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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