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 우월 -우울 매개자들에 대한 단상 / 김신식

대중음악웹진 weiv에 <우울의 리더십과 명성 문화>란 글을 발표한 적 있다. 오랜만에 원고를 다시 읽었다. 새삼 궁금했다. 나는 왜 6년 전 “우울의 리더십”이란 조어를 제시하고 싶었을까. 두 단어가 떠올랐다. 우울과 우월.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경우가 있다. 그 중 나는 우울에 사로잡힌 누군가가 타인의 일상에 ‘흥미로운 혼란’을 안겨다주는 상황을 주시했다. 어느 개인의 우울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주요인으로 나타나는 장면을. 누군가의 우울이 자의든 타의든 타인을 향한 우월·우위의 행사로 전유될 때, 우울에 부착된 서사와 지식(문화적 소양)은 힘을 발휘한다.



주지하다시피 문인과 예술가들은 일찍이 우울·서사·지식이 배합된 기록으로 ‘매력적인 우울’의 가치를 설파해왔다. 역사적으로 매혹적인 우울은 작가 자신의 생애 자체를 신화화하는 자원이었다. 아울러 작가가 독자 및 관객에게 제공하는 정서 상품이었다.


이런 맥락을 잠시 챙긴 채, 몇 년 전 기억을 더듬어본다. 연구자 A의 지적을. “신식 씨가 주장하는 우울의 리더십은 셀럽 위치에 있는 예술가·대중문화 스타와 그 추종자 사이에만 적용되는 게 아닐까요?” 당시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문화예술 영역에서 통용되는 감정 경험을 일상의 차원으로 쉬이 확장시켰다는 혐의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서점과 유튜브엔 우울증 수기, 정신과 치료 경험을 이야기하는 기록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각종 기록물을 탐색·탐독하면서 우울을 재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골몰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울은 ‘감정을 돌아보는 감정’이다. 지금 당신의 손에 쥐어진 평범한 사람들의 우울증 수기엔 밀어닥친 ‘나’의 우울을 통해 자기감정을 들여다보는 분량이 적잖다. 우울은 ‘나는 왜 줄곧 감정에 패배해왔는가’ ‘나는 왜 자기감정을 이야기할 때 섬세하지 못한가’라는 자문을 끄집어내는 터널이 된다. 그런 가운데 우울은 ‘감정을 해석하는 일의 침울’로 다가온다. 가령 인간의 감정엔 기쁨이 포함되어 있지만, 기쁨을 들여다보는 시도가 마냥 기쁠 순 없다. 우울증을 연구해온 심리학계에선 ‘반추反芻’를 주목해왔다. 우울증 환자들은 본인에게 초점을 맞춘 삶을 서사화하는 데 익숙하고, 이 서사화 과정에서 그때의 감정, 그날의 감정, 그해의 감정, 그 순간의 감정을 재차 복기한다. 괴롭게. 이 같은 반추는 우울증이 제공하는 서사화의 동력이면서 우울증에 침식되어 있다는 신호다. 정리하자면 우울이란 감정 해석에 드는 수고로움을 비추는 감정, 감정 자체가 인간에게 곤욕임을 보여주는 감정인 셈이다.


우울 매개자들


눈치 챘겠지만 나는 우울을 감정의 한 영역으로 떼어 고찰하는 덴 관심이 없다. 내게 우울이란 ‘감정의 감정’이다. 뜻을 풀자면 우울은 감정에 관계된 감정인 것이다. 이 같은 정의는 내가 ‘우울 매개자’라 명명한 사람들의 실천에서 촉발됐다. 사회가 규정하는 심리·의료 전문가는 아니지만, 우울 매개자는 진료실에서의 체험을 진료실 바깥으로 서사화·시각화하는 심리·의료계의 ‘슈퍼 아마추어’다. 『당신이라는 안정제』『아무것도 할 수 있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1·2』『정신과는 후기를 남기지 않는다』 등등 오늘날 우울증을 겪어온 ‘일반인-기록자들’은 진료/치료라는 이름의 의학적 서사와 그 권위에 짓눌리지 않은 채,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가 주창한 ‘탐구의 서사’를 써내려간다. 자신을 괴롭히는 우울을 마주한 가운데 우울 이야기하기의 힘과 매혹을 전파하는 오늘날 우울 매개자들. 이들은 우울과 유관한 기본 의학 정보 및 지식, 우울을 문화적으로 접근 가능케 하는 문학적 감수성과 스토리텔링을 겸비했다.




진료실의 초-투명화


나는 우울 매개자가 갈수록 늘어나리라 본다. 그 까닭으로 ‘진료실의 초-투명화’를 언급하고 싶다. 맛깔 난 필력, 엄정해 보이는 직업군 이미지와 상반된 문화 취향을 지닌 전문가 서사는 직무실의 초-투명화를 초래했다. 일례로 의사들은 치료뿐 아니라 진료 과정에서 나타난 애환과 여타 감정, 환자와의 만남에서 발현된 깨우침을 이전보다 과감하게 공유 중이다. 진료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와 그 서사는 더 이상 내밀하지 않으며 여기엔 우울증 치료 서사도 들어간다.

그렇다면 의사와 심리 전문가들에게 진료와 상담의 서사를 제공받은 우울 매개자들은 어떨까. 지면·영상을 통해 우울증 진료 공간, 치료자와 피치료자의 대화, 우울을 대하는 의료인의 태도와 마음씀씀이를 디테일하게 시각화하며 진료실의 초-투명화에 한몫한다. 진료실의 초-투명화를 진작시키는 데 의사와 우울증 환자 모두 각자의 스토리텔링을 발휘하면서 우울에 대한 논의를 확장 중이다. 나는 우울 매개자의 위상을 주목해본다. 피터 브룩스가 『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에서 밝힌 “환자가 환자인 이유는 실제로 그[환자]가 제시한 내러티브 담화가 취약하기 때문”이란 지적은 이제 재고되어야 할지 모른다. 우울 매개자는 지난날 우울증을 전문적으로 언급해온 전문가의 목소리에 힘을 싣는 보조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슈퍼 아마추어는 주도적으로 우울증·우울감을 이야기하고자, 의사와 심리 전문가의 전문성을 자기 서사의 재료로 동원해 적극적으로 재구성한다.


당신은 우울을 새로이 정의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울에 관한 모든 서사가 주목받을 순 없다. 한 우울 매개자는 우울을 빼어나게 이야기해 특정한 지지층을 얻는다. 다른 우울 매개자는 시중에 나온 우울의 서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반응을 접하기도 한다. 우울 매개자 사이에서 서사적 경합이 벌어지는 것이다. 경합은 출판 시장을 위시해 오늘날 감정 소비 체험을 독려하는 플랫폼의 활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통해 작금의 우울 매개자는 어떻게 우울을 진부하지 않게 서사화할 것인가라는 작가의 고충을 떠안았다.


당신이 우려하는 바를 알고 있다. 우울에 대한 지적 개입으로 말미암아 정작 우울증으로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의 처지를 간과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 이 글에서 사용한 우울 매개자란 렌즈는 우울증을 겪는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망각했다는 우울증 환자들의 불만을 야기할 수 있다. 난 그 응답에 서린 윤리를 저버리진 않을 것이다. 좀 다른 걱정거리를 추가해보려 한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우울에 관한 인상적인 기록과 서사적 경합을 곱씹으면서, 자기감정을 능숙하게 표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 사이에 나타난 격차를 우려하고 있다. 그 같은 격차로 인해, 감정 해석을 둔감하고 둔탁하게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지나쳐선 안 된다.


무엇보다 우울매개자와 의료 전문가들의 우울 이야기하기가 늘어나면서, 우울의 서사에서 파생된 다양한 감정 스토리텔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형국. 이로 인해 우리네 사회는 감정이 아니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란 걱정도 든다. 이제 우리는 어디까지를 일상 혹은 임상 차원에서의 우울로 봐야 하는가란 측정 넘어, 감정으로 한 사회의 현황을 쉽사리 총칭하는 분위기에서 감지되는 우울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 당신은 우울을 새로이 정의할 필요가 있다.


김신식(감정사회학 연구자· 보스토크프레스 단행본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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