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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괴물은 우리일 수 있는가? / 오영진

최종 수정일: 2023년 3월 13일

리처드 커니에 의하면, 우리는 타자들을 기괴하거나 신성한 것으로 파악한다. 타자들은 이해불가능한 것들로, 항상 우리의 인식범위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예문에서 드러나듯이 낯선 것을 우리의 경험으로 이해하고 그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반대로 낯선 것들을 배제해버리는 일은 쉽다. 때때로 타자는 공포스럽고, 또한 신성시된다. 이 두 가지 관점은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릴케는 그의 시 『두이노의 비가』에서 “모든 천사는 공포스럽다”라고 말했다. 또한 허만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고래는 공포스럽지만 또한 신성한 의미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이방인, 신, 괴물은 인간심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균열의 증거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 친숙한 것과 낯선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에서 어떻게 분열되는지 말해준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선택권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1) 낯선 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고 그에 적응하든가 (2) 그것들을 배타적으로 배제하여 아웃사이더로 치부하면서 거부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인간들은 후자를 선택해왔다.”

리처드 커니, 이지영 역, 『이방인, 신, 괴물』, 개마고원, 2004, p.15.


이를 위해서 ‘숭고(崇高)’의 의미를 이해해야 할 듯하다. 철학적 용어로서 ‘숭고’는 대상․사물이 우리의 인식체계를 벗어나 인간의 이해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3미터도 넘는 거대한 파도가 눈앞에 몰려온다고 상상해보자. 인간은 시각적 인식체계의 한계 때문에 그 파도의 총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 형언할 수 없는 압도감이 관찰자에게 밀어닥칠 것이다. 이렇게 대상 인식에 있어, 크기와 양이 파악 불가능한 체험들이 ‘숭고’ 체험의 대표적인 예시들이다.

‘숭고’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왜소함과 한계를 깨닫게 하고, 그 외부대상에 대해 경외감을 갖게 만든다. 이 경외감은 더 발전하여 대상을 신비화하고 신성시하게 한다. 동시에 공포스러운 감정도 들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괴물들이 급격히 신의 모습으로 변하거나, 신이 급격히 괴물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철학자나 인류학자들은 이 모순의 신비를 탐구해 왔다.


모든 천사는 두렵다. 미드저니 봇, 프롬프트 오영진.

그런데 이방인들의 표상은 ‘숭고’의 체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단단히 결속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타자를 괴물이나 신으로 규정함으로써 ‘괴물이나 신이 아닌 우리’를 더욱 명확히 의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평소의 ‘우리’는 정체가 불분명한 개념이다. 정신적인 외부의 경계가 형성되었을 때, 내부는 동일화된다. 대부분의 희생제의는 바로 공동체를 순수하게 만들기 위해, 내부의 이물질들을 제거하는 의식들이다. 사악한 죄악의 전염이라는 위험을 제거하면서 사회 내부적 죄악들을 뒤집어쓰고, 황무지로 내쫓기는 것이 희생양이었다. 서구 종교문화에서 악마적인 인물들은 거의 변함없이 뿔, 두꺼운 모발, 수염, 보기 흉한 코, 튀어나온 배 등의 염소와 비슷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악마 즉 괴물적인 것들이 실은 그 자신을 타자화함으로써 우리를 정화해주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괴물’은 ‘이해할 수 없음’에서 불거진 공포심의 결과며 그 ‘이해할 수 없음’ 때문에 신비화 혹은 신성화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바로 그러한 ‘괴물’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공동체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공포영화 장르는 단순히 오락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저 말초적 재미를 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들의 무의식을 건드려 공포를 유발하는 영화들은 우리 내부 심연의 타자들을 불러들인다. 전복적인 공포영화는 우리의 안온한 상상력을 깨부수고 날것 그대로 드러내 버린다. 반대로 보수적인 공포영화는 ‘타자’를 불러들이지만, 이를 우리의 동일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끌어들일 뿐이다.

우리는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캐리』(1976)를 통해 ‘괴물’이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해 관찰할 수 있다. 캐리 화이트는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하는 입장에 서 있다. 소설의 묘사에 의하면, “언제나 땀 냄새를 잔뜩 풍기”는 ‘얼간이’, ‘못난이’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 수 없는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광신도다. 그녀가 괴물 취급 받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소설/영화의 중후반까지도 캐리가 괴물인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아이들은 캐리를 바보 취급하면서 자신의 커뮤니티를 강화하고 있다. 캐리 화이트는 일종의 희생양인 셈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녀가 염력을 가진 잠재적인 괴물이라는 것은 모른다. 사회라는 ‘괴물’(캐리를 희생양화하는 사회)이 캐리라는 숨겨진 괴물(염력을 지닌 별종의 인간)을 왕따 취급한 결과 정말 ‘괴물’(희생양화에 반대하는 분노의 힘)로 만들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다.


『캐리』에서 괴물은 누구인가? 라고 질문해 본다. 통상적인 수준에서 파괴와 공포를 주는 인물은 우선 ‘캐리’라는 초능력 소녀일 테지만, 이 소녀를 만들어낸 것은 별종을 받아주지 못하고 희생양으로 만든 ‘사회’일 것이다. 이 ‘사회’야말로 소녀를 괴물로 만든다는 점에서 ‘괴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캐리』의 주제는 염력을 가진 소녀가 벌이는 살육행위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희생양-악마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진짜 괴물같은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캐리에 대한 인공지능의 오마주. 미드저니 봇, 프롬프트 오영진.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캐리』를 읽어보도록 하자.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 말고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프레임은 ‘피’의 상징성에 대해 묻는 방법이다. 이야기에서 캐리는 생애 처음 생리를 경험하게 된다. 성에 무지했던 캐리는 자신의 몸에서 피가 나온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성적 쾌락을 “사악한 것”으로 부르며 캐리의 성에 대한 접근을 철저히 막았다. 그럼에도 캐리가 자신의 몸을 쓰다듬으며 육체적 쾌락을 깨달아가는 것이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핵심적인 주제다. 이는 매우 상징적으로 숨겨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미국 청소년들에게 있어 졸업파티와 성교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자명하게 드러나는 주제다. 그녀가 졸업식 파티의 연단에서 피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처녀성 상실에 대한 은유다. 그녀의 어머니 마가릿 화이트가 말했던 사악한 육체의 쾌락이 강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귀환하게 된다. 그런데 이 육체적 쾌락은 파괴적인 모습을 보인다. 너무도 오랫동안 옳지 않은 방식으로 억압해왔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캐리의 조력자였던 수지도 성교에 있어서는 이제 막 숫처녀를 벗어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캐리』에는 억압된 성과 해방의 문제가 다뤄진다. 마가릿 화이트가 캐리의 첫 월경을 축복해주지 않는 것은 그녀의 피가 성교의 가능성을 같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 성교=원죄 라는 도식을 포함하는 문제로 인식된다.


캐리가 저항하고 분노했던 것은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린치일 수도 있고, 성적 억압일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자신에게 부당하게 내려진 죄의식이다. 이 죄의식이 자신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희생양으로 만들고 괴물로 만들었다. 기독교 교리는 선험적으로 부여된 죄의식을 통해 윤리적 기제를 만들어낸다. 이는 신도들에게 참회의 윤리를 형성하는 선에서는 매우 정상적으로 작동하지만 『캐리』의 경우, ‘죄의식’이라는 윤리적 장치가 오작동하고 폭발해버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76년은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물러난 해다. 아시다시피, 1960년 말부터 미국 사회 내에서는 반공이념에 복무하는 보수적인 기성세대와 이에 대항하는 청년세대가 극렬하게 대립해왔다. 당대의 히피문화는 기성세대의 문화와 대립하며 영혼의 자유와 성해방을 외쳤다. 『캐리』에는 이렇게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의 괴물성이 녹아있다. 광신적으로 묘사된 마가릿 화이트는 당대 청년들이 기성세대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캐리』라는 한 편의 공포물을 통해서도 사회현실을 반추해볼 수 있다. 당대의 무의식 속 가장 두려워하는 타자들이 괴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공포물 장르는 이 과정을 극단적으로 끌어내어 곪아터진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발적인 성격을 가진다.

우리가 타자를 그저 이방인으로, 괴물로, 혹은 신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새로운 괴물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괴물들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과연 나는 괴물인가? 당신이 괴물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가 괴물인가? 이러한 도발적인 질문을 받을 때 견고한 정상성의 환상은 무너지게 된다. 공포물 장르가 전복적인 이유다.


오영진(서울과학기술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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