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생대 제4기, 빙하기가 끝나고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홀로세에 살고 있다. 새로운 지질시대의 시작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환경 변화가 자연에 남긴 뚜렷한 지질학적 흔적인데 최근 기후 위기, 환경오염 등에 직면해 ‘인류세’라는 용어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인류(Anthropos)와 시대(cene)의 합성어로 인간이 지질의 상태와 변화 과정 등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친 시점을 기준으로 지질시대를 구분하고자 만든 개념이다. 식량 생산을 위해 사용되는 질소, 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입자들, 인간이 사용하는 화석연료로 인해 바뀌고 있는 탄소동위원소의 비율, 식량으로 소비되는 가축(특히 닭)의 뼈, 핵실험, 산업, 건축 등의 흔적들이 쌓여 인류세를 형성한다. 인류세를 새로운 지질시대에 도입하는 것은 논쟁 중에 있지만 그것은 지구환경과 그 보전을 위한 행동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완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사랑의 고고학>은 8년의 사랑이 남긴 흔적을 통해 ‘사랑세(Lovecene)’를 들여다보며 관계, 혹은 자신의 본질을 파헤쳐 변화로 나아가는 여성 고고학자 ‘영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뜨겁고 이런 거 다 지나가도 남아있기로” 한 연인과의 약속을 끝까지 곧이곧대로 지키려 노력 한 사람, 8년의 연애와 4년의 이별 과정 중에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연락을 이어가며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하고 애매한 관계와 상태 속에서 그 영향 아래 영실에게 쌓인 지층들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영화이다.
사랑은 존재에 흔적을 남긴다. 그 사랑이 강렬하거나 오랫동안 이어졌다면 아마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만큼이나 한 사람의 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고고학에서 유적의 쌓인 층을 알아내기 위해 구덩이를 파서 땅을 긁어가며 지표 조사를 하고, 발굴된 유물을 세척하고 꼼꼼히 기록하는 것처럼 깨지고 부서진 사랑의 흙먼지를 살살 걷어내어 말끔한 모습의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상실 후 애도의 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느리고 견고한 애도의 과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후에는 슬픔, 분노, 체념 등 다양한 감정 변화가 일어난다. 애도의 과정은 상실을 회피하지 않고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충분히 경험하고, 상실의 대상이 없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관계를 재배치하고 자신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영실을 자유로운 영혼이라 말하는 연인 인식에게 그녀가 “내가 그렇게 불안한데 왜 만나?”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인식은 “너의 단단함, 생의 에너지”라 답한다. 조용하고 차분하며, 강아지와 고양이도 감정이입이 너무 심해 기르지 못할 만큼, 답답하게 보일 정도로 타인을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느라 해야 할 말도 한참을 고민한 끝에 하는 그녀이지만, 햇살이 쏟아지는 버스 창가에 앉아 가방에서 꺼낸 과자를 먹는 영실의 장면에서 <사랑의 고고학> 영화 타이틀은 떠오른다. 그녀는 음식 앞에서 맛있게 먹고, 재래시장에서 직접 고른 횟감이나 새로운 후식을 가족, 친구와 나눠 먹으며, 주위에는 늘 식물과 자연이 있고, 불안함보다는 호기심으로 나아가는, 자신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인물이다.
관계의 변화 후 약속을 지켜야 할지 이제 안 지켜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 고지식할 정도로 언어의 무게 안에서 꿋꿋이 버텨가던 영실은 8년의 연애 동안 인식과 나눈 문자와 대화들을 복기하고 의미들을 다시 헤아리면서 조심스레 땅을 긁어 유구선을 발견하듯 관계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 흔적을 따라 나누었던 이야기와 보여줬던 행동들이 뒤늦게 이해되기도 하고 전과는 다른 의미와 해석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기억을 들추는 과정에서 단단한 생의 에너지가 가득하던 그녀가 푹 파인 구덩이 속 유물처럼 돌돌 말린 양말을 옆에 벗어 두고 힘없이 누워 있는 모습도 있다. 관계의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하나의 부풀어 팽창했던 세계가 바람이 빠져 쪼그라들 듯 그녀의 일부마저 함께 사라지게 해 애도의 대상은 그녀 자신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느리고 견고한 애도의 과정을 통해 ‘너에게 주었던 그 무엇을 다시 가져올 수 있을까’라는 물음처럼 달려도 보고, 요가를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이동했던 자신을 되찾아 온다. 느리지만 견고한 시간을 통해 새로운 지층을 쌓아간다.
환상 없이
“쿤데라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며, 그 욕망의 대상이 되는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인간을 분류해 볼 때, 몽상가란 ‘부재하는 사람들의 환상적인 시선 안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부재하는 사람의 시선에 대한 구애. 그것이 그들의 사랑하는 방식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사랑 자체보다도 사랑하는 방식이 더욱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분명한 자신의 언어라는 무거움 속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1)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2)에서 토마스의 아들 시몽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못 할 짓을 한 것은 먼저 못 할 짓을 당했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그렇게 믿고 싶어 했으며, 아버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기억했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그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그가 서로를 그다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아버지가 죽은 뒤 한때 아버지의 정부였던 사비나의 주소를 알아내 이따금 그녀에게 긴 안부 편지를 쓰곤 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삶을 관찰하는 상상의 눈을 처절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예술가인 자신의 유약함을 알아본 영실에게 영원하기를 약속하자 한 인식은 그녀의 옷차림, 행동, 과거의 일 하나하나 꼬투리잡고 비난하다가 영실과의 애매한 관계에서 “규정하지 않고 지내면 안 돼”라며 자기 말과 원칙을 손쉽게 뒤집어 버리고 이미 영실이 알기 전부터 먼저 약속을 깨버린 사람이다. 어쩌면 영실에게 ‘달 뜬 시간이 지나도 계속 곁에 있겠다’고 한 인식과의 약속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자기 말에 책임지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대상이 남지 않은 책임을 오랫동안 이어갔을 때 그녀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그것은 어떤 가치 판단의 질문이 아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못 이루게 된다 하더라도 그 추구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닐 테니까.
삶을 무겁게 짓누르며 옭아매던 사랑과 연애, 그 믿음의 실체가 실상은 ‘부재’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이제 나의 환상을 허무는 것은 너일까 나일 수 있을까’라며 영실은 노래한다. 그 환상은 타인으로 인해서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허물고 싶다는 의지를 담았다. 굳은살이 배듯 익숙한 태도와 가치관 속에서 변화하려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살아있는 죽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영실은 이제 변하고자 한다. 사랑세를 봉하면서 애도를 끝내고, 가장 가까이 닿았다 믿었던 부재하는 시선이 아닌 두 발로 딛고 선 땅 위에서 오롯이 현존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옮겨 심은 자리에 뿌리내려 자라나는 나무와 식물처럼, 다시 숲이 되길 기다리는 언덕에 선 영실의 모습은 여전히 단단하다.
[사랑의 고고학] 주제곡 ‘환상 없이’ 뮤직 비디오
미주
1) 배수아 『당나귀들』, 이룸, 2005, p.244.
2)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부 ‘대장정’ 중 24, 이재룡 옮김, 민음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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