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광장, 세속의 성소 / 김동규
- 한국연구원
- 6월 9일
- 3분 분량
드디어 2025년 6월 3일,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느닷없는 계엄령 선포와 피 말리던 대통령 탄핵이 이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동안 내내 국민 대다수가 전전긍긍 마음을 졸였다. 지난해 10월 한강의 노벨 문학상 선정 발표로 한껏 들떴던 사람들이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광장에 운집해 연대의 함성으로 그 공포를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그때 여의도 광장에서의 경험을 나희덕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광장에서 공원으로, 다시 광장으로/여의도는 재발견되었다//계엄과 탄핵의 나날 속에서/새벽에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간 시민들에 의해서/추위를 뚫고 걸어서 대교를 건넌 발길들에 의해서/여의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게 되었다/잃어버린 광장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TV 앞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다음날 아침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났다/다행히 계엄령은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모두들 충혈된 눈으로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수업을 마치고 여의도로 달려갔다/인파를 헤치고 서둘러 깃발을 찾아가다가/도로 경계석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내 몸을 경찰들이 일으켜주었다/부축을 받으며 뒷골목에서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통증과 오한이 심해진 나에게/경찰은 제복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었다/아들보다도 어린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여의도에서의 또다른 발견이었다
「광장의 재발견」(나희덕, 『시와 물질』, 문학동네, 2025. 79-80쪽) 중

현재의 여의도는 권력의 부당한 폭압에 맞선 저항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80년 광주와 같았다. 크게 달라진 점은 계엄군과 경찰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온기가 남아 있는 핫팩’이 오간 것이 달랐다. 불의에 맞서고자 밤새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총총히 국회로 향하는 시인과 다친 시민에게 ‘물질화된 사랑’을 전하는 경찰의 모습, 나는 이 장면을 성스럽다고 느꼈다. 폭력적인 불의가 지배적이었던 80년 광주와 다르게, (불의가 여전한 현재에도) 진영의 경계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건너간 장면이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이란 종교를 참칭한 목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설교와 아멘 혹은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기가 (실은 혐오와 적대가) 난무하는 광화문 광장이 아니라, 그날 여의도 광장에서 성스러움이 발현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성스러움이란 신학적으로는 천상의 일이 지상에 기적적으로 구현되는 성육신 사건이지만, 미학적으로는 감동과 시작(始作)과 의미를 낳는 시(詩)의 물질화 사건이다. ‘삶의 시인’(니체가 말했던 ‘예술 안에서 배운 것-포이에시스-을 예술 바깥에서도 실천하는 자’)이 ‘이게 뭐지? 너무도 시적인데!’라며 감탄을 터트리는 사건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성스러움은 세속화된 시대에도 무탈하다. 다만 기존의 세속화와 성스러움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을 뿐이다. 오래 전에 최신한 교수는 세속화(Säkularisierung)와 세속주의(Säkularismus) 개념을 구분한 적이 있는데, 세속화가 “신앙적 내용의 인간적 자기화와 더불어 신앙을 통한 인간적 세계의 자기변화”를 뜻한다면, 세속주의는 “신과 신앙의 영역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모든 것을 세상적인 것으로 끌어내리려는” 입장이다.( 최신한, 「세속화의 변증법」, 『동서철학연구』, 제31호, 2004.) 이런 논리대로라면, 신과 신앙을 참칭하는 위선적 세속주의자보다는 세속화된 무신론자가 성스러움에 더 가까울 수 있다.
나는 앞선 시의 한 장면을 성스럽다고 말했는데, 이 점을 잘 설명해준 철학자가 레비나스이다. 그는 윤리를 제1철학이라고 선언해 다른 철학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데리다와의 사적인 대화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한다.
… 궁극적으로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윤리가 아닙니다. 단지 윤리가 아니지요. 성스러운 것, 성스러운 것의 성스러움입니다.
자크 데리다, 『아듀 레비나스』, 문성원 옮김, 문학과지성, 2016. 17-18쪽.

윤리에서 성스러움으로? 철학이 다시 신학의 시녀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그건 과도한 해석이다. 레비나스가 힘주어 말했던 것과 관련지어 해석해야한다. 데리다는 주저 없이 레비나스의 성스러움을 “타자의 성스러움”이라고 해석한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거역할 수도 없고 절대 거역해서는 안 되는 성스러운 목소리를 듣는다. 타인의 얼굴이야말로 성소(聖所) 중의 성소다. 그곳에서 낯설고도 경이로우며, 환대하고 감사해야할 존재를 만난다. 경찰은 집회에 참석한 시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계엄이 선포된 당일에도 국회에 집결한 계엄군은 성스러운 얼굴을 마주했던 것이다. 한없이 무력하면서도 비폭력을 강제하는 성스러운 얼굴을.
기왕 투표도 한 김에, 마지막으로 민주정과 공화정에 대한 생각 한 조각을 남기고 싶다. 인류의 역사에서 처음 민주정을 시작했던 곳, 아테네는 제비뽑기로 공무를 수행하는 수장을 뽑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첫째, 평범한 시민의 ‘얼굴’을 믿었기 때문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속담도 있듯이, 기회가 원인이 되어 폭발할 잠재력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건전한 상식과 윤리에 따라 일처리를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부족분은 거기에 특화된 능력을 가진 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둘째, 어느 때든 독재자로 변모할 야심가의 등장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제비뽑기에서 당첨을 장담할 수 없다. 전적으로 우연에 맡김으로써 공적 자리를 사적 욕망 실현의 장으로 만들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셈이다. 이것도 분명 일리(一理) 있는 민주정의 방법이다. 제비뽑기를 하면, 일단 선정 과정이 피 튀기는 전쟁이 아니라 즐거운 축제 같을 것이고, 무작위로 결정되기에 기득권 카르텔이 형성되지 못할 것이며, 국회의원 태반이 법조계 출신인 지금보다 각계각층의 뜻을 더 잘 대표할 것이다. 적어도 제비뽑기는 현행 선거제도의 한계를 성찰하는 거울로 삼을 만하다.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은 평등한 시민들의 합력(合力)에 대한 신뢰와 존중에 있다. 민주주의자는 신의 선택을 받은 단 한 사람이나 고귀한 인격과 교양을 갖춘 엘리트들보다 성숙한(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자기선택이 더 소중한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때로는 어리석게 판단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장기적으로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성숙을 지향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 정체만 가지고는 안심되지 않아서 공화정을 더하게 된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한 표라도 더 얻은 다수가 자기들만의 이익을 챙기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수결로 결정하더라도, 공동체 전체의 목소리와 이로움을 대변해야 한다. 공적 사안에 대한 사심(집단 이기심 포함) 없는 접근, 이것이야말로 공화정의 이념이다. 우리 헌법 1장 1조에 등장하는 ‘민주 공화국’이란 평등한 시민들에 의한(민주) 그들을 위한(공화) 정치체제를 뜻한다. 이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얼굴들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성스러운 광장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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