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노그래피를 하자 / 박성관

<現代思想(현대사상)> 10월호 특집은 「진화론의 현재」다. 전체적으로 별 신통한 게 없는 느낌. 지난 8월호 특집 「자유의지」때도 그랬는데... 소위 요즘 영미 학계(혹은 세계 학계도 얼추?)의 대세로 보이는 자연주의 혹은 유물론의 그림자가 너무 짙은 게 문제다. ‘자연주의’와 ‘유물론’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과학에 의해 검증 가능한 것을 중시하는 세계관과 학문관을 가리킨다.

<현대철학 최전선>이라는 일본책을 번역하면서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고, 전체 5장으로 된 책에서 3장 전체가 자연주의를 다룬다(장 제목도 ‘자연주의’다). 달리 표현하자면 ‘형이상학의 배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10여년 전 처음 접했던 의학계의 ‘증거 기반 의학’과도 상통하는 분위기.

자연주의와 유물론의 기세 탓인지 읽게 되는 글들도 비슷비슷한 글을 읽는 경우가 많아진다. 마음이나 정서, 심리 등을 설명할 때도 뇌과학이나 진화심리학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그런 글들(과연 ‘진화심리학’이 과학인지, 아니 학문이기는 한지 의심스럽지만). 어느덧 독자들의 성향도 대략 그쪽으로 맞춰져가고 있지 않나 가끔 걱정도 된다.

그런 와중에 앞서 말한 <現代思想> 10월호에서 「신경 생태 사회성을 향하여 – 역경 속의 맨탈 헬스」라는 글을 발견했다. 감이 왔다. 중요한 글이구나! 그리고 읽어보았다. 뭔가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은 계속 주는데, 딱히 무엇을 얘기하는지는 거의 잡히지 않았다. 졸리는 걸 참아가며 끝까지 읽고 번역도 거의 했지만 손에 쥔 것이 너무 없었다. 무려 네 번을 읽게 되었고 드뎌 아~ 이리도 중요한 얘기를 필자들이 하고 있었구나, 에 도달했다. 처음 읽었을 때 맨탈 헬스가 너무 안 좋은 상태였나봐.

이제부터 이 글에 대해 얘기할 건데, 다만 글의 해상도가 매우 높아 요약은 못하겠고 중간 중간 중요한 문장들을 발췌하고 멘트를 달겠다. 글 잘 읽는 분들은 (거의 90% 이상을 번역한) 번역문을 첨부하니 그걸 곧장 보시라.

1. 첫 세 문장이 좀 깼다. “사회 이론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맨탈 헬스’ 문제로 돌아가야 할 때다. 반세기 전, 사회적인 세계이해의 중심에 있던 것은 맨탈 헬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었다. 어빙 고프먼, 미셸 푸코, 로널드 레잉, 프란츠 파농 등 누구의 연구를 보더라도 공통적으로 그러했다.” 좀 웃겼다. 아무리 그래도 맨탈 헬스가 이렇게까지나 중요했다고 할 수 있나? 한데 생각을 좀 해보면서 다음 문장까지 보다보니 거의 수긍이 되었다. “권력과 사회적 배제, 사회통제와 저항, 정체성, 젠더, 인종화와 스티그마화, 자기, 주관성과 주체화, 규범, 정상성과 정상화, 지식과 그 권위 등등.” 그러네, 정말 그래. 자본주의, 제국주의 혹은 근대 사회에 대해 푸코와 파농이 어느 지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는지를 상기해보니 정말 그래. 이 글의 세 필자에 따르면 이 중요한 맨탈 헬스 문제가 지금은 다양한 학문 분야의 말단에 속해 있다. 거기서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례로만 다뤄질 뿐이다. 달리 말해서 심리학, 신경과학, 사회과학 이론들이 제각각 놀고 있다는 말이다. 필자들은 현대 신경과학과 비판적 대화를 나누면서 맨탈 헬스 물음을 다루는 사회 이론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동시에 생물이자 동물의 한 종류인 인간이 살아가는 장소들을 ‘니치’라는 개념으로 포착하자고 한다).

2. 현재 긴급히 필요한 것은 “‘생태 사회의 역학(疫學) 이론’, ‘(......) 건강, 질환, 웰빙에 관한 사회적, 생물학적 이론을 진정으로 통합하는’ 이론이다.” 이 통합 이론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인 고뇌의 사회적 기원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회학 자체의 ‘재활성화’에도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 그래서 ‘신경 생태 사회성(neuroecosociality)’을 향한 이론이라 그랬구나.

3. “우리는 뻔뻔스레 생기론자를 자처하는데, 이는 ‘엘랑 비탈’(베르그송)이나 ‘존재 과정(becoming, 화이트헤드)’에 대한 어떤 일반화된 철학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생기론이란, 생명에는 항상적인 활동이 동반된다는 점을 늘 상기시키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문장을 봤었는데, 이 중요한 인식이 퍼져나가고 있는 건가 싶어 반갑다. 정말이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세계상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혹은 해석해가는 도구(무기)이자 방법이다. 그걸 가지고 세계를 바꿔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중요한 것은 생명[살아감]에는 항상적인 활동이 동반된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다.

4. “우리는 니치(適所)를 ‘생물학적 로컬성’으로 파악한다.”

이들은 니치(적소), 어포던스, 움벨트(Umwelt)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그 총결산을 니치 개념에 담는다. 가장 오래된 것인 니치 개념에, 인간의 사회적 차원은 물론이고 생태적인 차원, 신경과학적인 차원까지 모두 담았다는 말이다. 가령 어포던스 관련해서는, 인간에게 어포던스라는 게 생활형식에 의해 상당히 분단된 것임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 고령자와 젊은이, 부자와 빈자, 살색의 명암, 피고용자와 실업자, 여행자, 볼리비아이민자, 노상에서 사는 남자애와 여자애, 파벨라(favela) 거주자 등등 간에 불평등이 실존한다. 한편, 이들은 움벨트 개념을 맨탈 헬스 관련해서 더 밀고 나간다. 우선 정신 상태를 뇌의 산물이나 뇌 안에 들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인간이 사고하고 느끼는 여러 역량들은 ‘피부 자루(skinbag)’ 밖에 있는 모든 형태의 자원과 결부되어서야 비로소 발휘될 수 있다. 지금 이 이야기는 길게 설명할 수 없으니 금시초문인 분들은 <수퍼사이징 더 마인드>를 보시기 바란다. 아마 큰 충격을 받으실텐데, 사실 나도 이 책은 안 읽었고 <존재의 지도>(레비 브라이언트, 갈무리)에 나온 달랑 몇 쪽짜리 요약을 읽었을 뿐임을 단호하게 밝혀둔다.

5. “그런데 과연 인간의 다양한 신경, 생태, 사회적인 니치를 경험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게다가 한편으로는 생태 사회에 대한 레토리컬한 제스처를 취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생물적, 사회적 에스노그래피의 접근법(즉,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태도)을 취하는, 그런 줄타기를 가능케 할 방법을?”

신경과학과 생태학과 사회 이론을 통합시키는 것도 좋다고 치고, 그러기 위한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도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 통합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그러기 위한 이론이라는 건 과연 무엇인가? 이런 의문들이 떠오르는데, 그 전에 우선 이러한 이론적 접근법의 의의부터 짚어두자.

6. “이론적 접근법이야말로 이 복잡성을 실용적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를 인도해줄 이론과 개념이 없으면, 에스노그래피 데이터와 생물학적 데이터를 조합하고, 그럼으로써 (물질적인 폭로, 로컬한 경험, 건강 불평등을 형성하는 정치적 힘으로 구성된) 다중적 복잡성을 파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사태가 복잡해진다.”

앞서 말했듯, 이 글은 신경생태사회적인 이론이 화급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크게 환영받았던) ‘후성유전학’과 ‘신경의 가소성(plasticity)’ 등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한다. 우선 이와 관련된 결과들이 주로 실험실 실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때로는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면서 역효과가 초래되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다양한 신경생태사회적 니치를 경험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일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게 아닐까?

7. “<세계보건기구>에서 2014에 발표한 「맨탈 헬스의 사회 결정 요인」. 우리는 이에 관한 에비던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연구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특정 집단들이 다른 집단보다 맨탈 헬스가 나빠지기 십상이고, 가령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특히 북유럽), 이민자들 혹은 더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불리함과 불평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진단명은 조현병, 양극성 장애를 비롯한 여타 정신질환자들(심각한 정신적 질병들)에서부터 두려움과 우울증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거의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어느 시기엔가는 겪게 되는 평범한 정신 장애들 말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연구하고 기술할까? 필자들은 방금 전에 언급된 에스노그래피에 주목한다. 에스노그래피는 요즘 일대 붐을 맞이하면서 인류학과 사회학(의 특히 질적 조사 방법) 분야에서도 관건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이게 신경생태사회적 이론과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글의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부제부터 시작해 본제로 이어 읽으면 「역경 속에 처한 맨탈 헬스에 대한 신경생태사회적인 이해를 향하여」가 된다. 이 글의 (서론에 이어지는) 본론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글은 대부분 사람들의 맨탈 헬스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바람직한 사회학의 출발이기도 하다. 다음 단계는 이 상황이 어떤 인과관계와 매커니즘 속에서 경험되는지를, 역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실제 경험에 기반해 살펴보는 것이다. 이게 곧 신경생태사회적인 이해인데, 이 말을 이해하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역경 상황은 지금까지 빈곤, 열악한 주거 환경, 오염, 금전상의 스트레스, 가정 내 폭력, 인종 차별, 스티그마, 트라우마 같은 사회적 요인으로서 특정되어왔는데, 이들은 개인이 맨몸으로 겪는 경험이 아니다. 경험이라는 것은 늘 정동, 의미, 기억으로 가득 찬 (집단이 공유하는) 하나의 사회적, 물질적 세계 속에서의 마주침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이 문장을 오독해선 안 된다. 이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구축된 사회 구조를 경험하고 그 결과 여러 정동이나 기억, 의미들이 발생한다는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물질이 먼저 있고, 그것을 경험한 결과로 정동, 기억, 의미들이 발생한다고 믿는, 한낱 데카르트주의일 뿐이다(이런 데카르트주의를 바람직한 유물론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는 다양한 물질들과 다양한 정동, 의미, 기억들이 이미 가득 차 있다. 물질과 비물질들은 하나로 엮여 맥동치고 있으며, 우리는 이런 세계 속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리의 아이들은 도시의 니치에 그저 거주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고 니치를 구축하고 있다.” 인간은 이 세계 속에서 거주할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변형하고 구축해나간다(다른 동식물들이 다 그러하듯이). 이 점에서 일역자는 이 글을 이렇게 평가한다. “브라질의 스트리트 칠드런이나 상하이의 이민자의 예에서도 제시되었듯이, 사람들은 역경의 희생물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상태에서 생존해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익히는 측면도 갖고 있는데, 이는 사회 역학(疫學)이나 불공정 논의의 ‘대상’으로 위치짓고 고찰하는 연구 자세와는 차이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정리의 말 : 지금까지 내 이야기는, 「신경 생태 사회성을 향하여 – 역경 속의 맨탈 헬스」(번역 박성관)라는 글을 읽어보도록 권하기 위한, 처음 접한 사람이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그래서 자기 분야에서 응용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글을 직접 읽어보시라. 그리고 저마다 에스노그래피 작업을 해보시라.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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