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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에로스의 불안 / 김동규

최종 수정일: 2022년 3월 8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개체의 삶이란 단세포 수정란 하나가 주위의 영양물질을 흡수하며 몸집을 키우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미미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복잡하고 안정된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 정교하게 세포를 복제하고 세포 간의 의사소통 채널을 만들고 세포 수준 이상의 유기체적 질서를 만든다. 하지만 공든 탑이 한순간 무너지듯이, 생명을 부여 받은 것들은 어느 때든 죽을 수 있다. 어렵사리 축조한 질서가 한순간 허망하게 흩어질 수 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안정된 구조물이라 하더라도, 무너져 내려 산산이 흐트러진 상태보다 더 안정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생의 과정 전체는 편안하지 않다. 불안이 생의 상수다.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는 생명을 사랑과 연관 짓는다. 이 연관성에 대한 프로이트의 직관을 나는 매우 탁월한 통찰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는 사랑, 즉 에로스를 이렇게 말한다. “에로스는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작동하고, 무생물적 물질이 생명을 얻음과 더불어 존재하게 되는 ‘죽음 본능’과 대치해서 ‘생명 본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사랑과 생명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한다. 생명은 개체 수준의 자기 유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적 교접을 통한 종의 보전까지 확대된다.

개체든 종의 수준이든, 자기(self)를 유지하고 지탱하려는 것이 생명의 본능, 곧 에로스이다. 반면 에로스와 함께 생겨난 것이 타나토스, 곧 죽음 본능인데, 이것은 안정된 물질 수준으로 되돌리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생명의 자기성을 해체함으로써 열역학 제 2법칙을 구현하려는 게 바로 죽음 본능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힘 대결은 마치 창공에 떠 있는 연실이 그리는 곡선 같다. 바람을 타고 중력을 이기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축 늘어진 곡선. 시인 이성복은 이런 곡선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그 한심하고 가슴 미어지는 線은 그러나, 참 한심하고 가슴 미어진다는 기색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만 흘러내리고, 그때부터 울렁거리는 가슴엔 지워지지 않는 기울기 하나 남게 되지요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가졌지만 의지가지없는 이들에겐 더욱 뚜렷한 線, 언젠가 우리 세상 떠날 때 두고 가야 할 기울기, 왜냐하면 그것은 온전히 이 세상 것이니까요”(「연에 대하여」, 부분)

생명과 죽음이 만들어내는 이 기울기에서 기우뚱한 불안이 흘러나온다.

모순덩어리 인간은 불안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동시에 불안의 힘으로 삶을 살아간다. 기실 불안이란 소중한 무언가의 상실 위협에 대한 반응이다. 잃을까 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잃지 않으려고 준비하는 마음 상태다. 고통이 위험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처럼, 불안도 상실을 막아내려는 심리적 기제다. 이런 점에서 생의 기록인 글에는, 굳이 불안을 주제화하지 않더라도, 불안이 내장되어 있다. 누군가 남긴 글에서 우리는 글쓴이의 ‘사랑(동시에 죽음)의 불안’을 읽을 수 있다.


『불과 글』에서 아감벤은 하시디즘의 창시자 바알 셈 토브와 후배 랍비들의 이야기로 문학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매우 인상적인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토브는 아주 힘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면 숲 속을 찾아가 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렸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고 불안이 해소되었다. 그런데 이후 세대부터 점차 망각이 일어난다. 토브의 역할을 맡은 다음 랍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더 이상 불을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 랍비는 “우리는 더 이상 불도 피울 줄 모르고 기도도 어떻게 드리는지 모르지만 이 장소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고, 다음 랍비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자 꼼짝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불도 피울 줄 모르고 기도도 드릴 줄 모르고 기도 드리는 숲속의 장소도 어디인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을 글로 전할 수 있습니다.”

아감벤은 ‘모든 문학은 불의 상실에 대한 기억’이라 말하면서, 불을 신비적 체험이라 해석한다. 온몸에 각인된 황홀했던 신비는 점차 사라진다. 망각된다. 그러자 불안이 밀려온다. 글이란 이 불안에 대한 암묵적 기억이다. 뒷세대가 말했던 ‘모든 것을 글로 전할 수 있다’는 문장에는, 결코 씻어낼 수 없는 의구심이 남아 있다. (글이라는 뜰채로 도저히 건질 수 없는 소중한) 불의 상실을 글이 애써 감추고 있다는 의구심 말이다. 이것이 현재 글을 쓰는(불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불안을 야기한다. 글에 의존하면 할수록 불안감은 더해만 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은 계속 글을 씀으로써 이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 이건 뭔가? 이열치열인가? 글 때문에 나온 불안을, 다시 글로 기억함으로써 진정시키려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문학의 유/무용론이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것이다.


글자들의 기나긴 행렬이 가끔씩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사이에 걸려있는 연실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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