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따뜻해지자 집에 바퀴벌레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주기적으로 개체수의 증감을 보이는데, 그래도 혹독하게 추운 겨울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인간 아닌 생명체를 만나는 일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물기에, 바퀴벌레의 출현이 반가울 만한데도 그렇지 않았다. 그 지겨운 반복 사이클에 무덤덤했다. 옆에 있던 어린 딸은 질겁을 하며 “꺅!” 비명을 지른다. 그럴 정도의 과민반응은 아니다 싶어서, 딸에게 찬찬히 이런 이야기를 해 본다.
“바퀴벌레가 우리 인간을 보면 어떨까? 아마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시무시한 괴물로 보일 거야. 손가락 하나로도 간단히 동족을 살해하고 지능적으로 독약을 써서 집단 살상의 만행을 저지르는 악마로 여기겠지. 그렇다면 비명을 질러야 하는 쪽은 오히려 바퀴벌레가 아닐까?”
이런 이야기를 몇 번 했는데도 소용이 없다. 바퀴벌레에 대한 히스테리적 반응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싱크대 위를 활보하는 바퀴벌레를 지켜보며 저것의 존재이유를 생각해 본다. 저 바퀴는 왜 있는 걸까? 없어도 되는 건 아닐까?
유년기 시골에 살 때 바퀴벌레와 같은 역할을 했던 생명체는 쥐였다. 당시는 쌀농사를 짓던 농부들조차 쌀밥을 먹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쥐는 쌀을 비롯한 인간 식량을 약탈하는 최대 원흉이었다. 인간 역사에 페스트를 옮긴 주범으로 쥐가 기록되기도 해서인지 쥐에 대한 이미지도 바퀴벌레만큼이나 몹시 안 좋다. 그 무렵엔 국가적 차원의 쥐잡기 운동 비슷한 것도 벌였는데, 어렸던 나까지 쥐약과 쥐덫을 써서 자주 쥐잡기에 나서곤 했다. 동네에서 쥐 잘 잡는 베테랑 사냥꾼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어느 겨울날 (쥐가 좋아하는) 참기름 바른 북어 미끼를 놓아둔 덫에 엄청나게 커다란 쥐가 잡혔다. 덫에 걸려든 지 얼마 안 되는 듯 쥐는 아등바등 살려고 몸부림쳤다. 찍찍 소리를 내며 강하게 저항했다. 나에게 처음 ‘이 쥐 역시 존재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고통스러워하면서 간절하게 살고자 하는 쥐의 모습에서 내가 모르는 존재이유를 막연히 예감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쥐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쥐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생물로만 보였다. 쥐를 먹고 산다는 뱀도 끔찍하긴 마찬가지고, 고양이는 쥐 아닌 다른 것을 먹으면 되고... 꼬맹이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분명 살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에서 연민을 느끼며 쥐의 존재이유를 찾아보려 했지만, 당시 작은 머리로는 그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쥐 사냥을 할 수는 없었다.
선악을 말하면서 종종 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있다. 좋고 나쁘고를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시 ‘누구에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에게 좋은 것이 너에게 나쁜 것일 수 있고 인간에게 좋은 것이 다른 생명체에게는 나쁠 수 있다. 인간의 혐오 대상인 바퀴벌레는 그것의 장내에 거주지를 마련한 미생물들에게는 ‘좋은’ 숙주일 수 있다. 허나 모두에게 좋을 수는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에 좋은 것이 미래에도 좋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자주 망각한다. 세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가 알려주는 것처럼, 동일한 사건이 어떨 때는 기쁨을 다른 때에는 슬픔을 자아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래 저래로 선악의 기준은 정하기가 어렵다.
‘필요악(必要惡)’이란 말이 있다. 분명 나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없다면 더 나쁜 상황이 초래될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있어야만 하는 것을 뜻한다. 대개 개인에게는 나쁜 일이지만 공동체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 필요악에 속한다. 예컨대 일당백의 전투력을 소유한 살인병기 전사는 이웃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나 악한으로 대접받기 십상이다. 하지만 전시 상황에서 공동체를 수호할 수 있는 까닭에 필요한 존재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쥐는 인간에게 해로운 짓을 많이 한다. 그러나 생태계 전체를 고려한다면, 쥐는 먹이 사슬의 어엿한 일부로서, 즉 천적으로서의 쥐는 먹잇감들의 과도한 개체수 증가를 막고, 상위 포식자에게는 훌륭한 먹잇감 역할을 하고 있다. 생태계의 일원인 인간에게 쥐는 필요악인 것이다.
개체의 존재이유 혹은 존재의미는 대개 전체 존재로부터 부여된다. 전통적으로 정의(definition)란 유와 종차를 통해 내려지는 것처럼(예컨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의미란 부분을 넘어선 전체와 그 가운데 부분이 서 있는 고유한 자리를 지정함으로써 결정된다. 아마 부분이 미미한 것일 수밖에 없기에, 그것이 속한 큰 집단에 의지해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리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태극기 깃발 아래 모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전체’를 잘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기지의 전체가 실상 조금 덩치 큰 부분일 뿐이라는 점에 있다. 전체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를 통한 의미 찾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바퀴벌레나 쥐의 존재이유는 그것들의 외부, 즉 인간이나 생태계에 이롭다는 데에서 충분히 밝혀질 수 없다. 그들의 존재이유는 개체의 생존 의지라는 알 수 없는(맹목적인) 영역에서 나온다. 생의 의지의 간절함에서 희미하게나마 미지의 존재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고통을 감수하며 존재하려는 모습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없어도 좋은 존재자는 결코 아니다. 존재하는 한, 게다가 존재하려고 발버둥치는 한, 미지의 존재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 하늘을 이고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라는 뜻의 불공대천(不共戴天). 예나 지금이나 이런 말들이 널리 회자된다. 특히 혐오를 조장하는 정치판에서 요즘 자주 듣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어느 한 편이 멸절되어야 한다. 상대방을 없어도 좋은 존재로, 아니 상대가 없는 게 더 좋다고 인식하기에,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를 박멸하려 한다. 오만하게 (자신이 만들지 않은) 존재를 부정하고 거부한다. 진부함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존재는 선이다. 아니 그렇게 믿기로 결단해야 한다. 소위 ‘존재의 긍정’이란 소극적으로는 악한 것들을 필요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악한 존재마저 선한 것으로 바라보려는 관점을 뜻한다.
자기 존재를 지키는데 불가피한 최소의 정당방위가 아닌 한, 우리는 다른 존재를 부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권리가 없기에 함부로 자행하는 존재 부정은 옳은 게 아니다. 하지만 존재 긍정은 부정보다 훨씬 더 힘겨운 길이다. 사랑을 배우는 고난의 가시밭길이다.
세상에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 아무리 비천하고 나쁜 존재로 보이더라도 우리는 좋다고 여겨질 때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소포클레스의 말처럼, 우리는 사랑 ‘하기’ 위해(유행가의 한 구절처럼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려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이 존엄할 수 있는 진짜 이유다. (우리의 지능을 추월하는 인공지능까지 나온 판국에) 이것 말고 우리가 존엄한 근거를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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