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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아직 미정(未定) / 김보슬

이 연재를 시작하며, 소위 ‘문화·예술계’라 일컫는 현장에서 내가 접하는 이러저런 목격담과 견문을 엮어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이번 호에서는 약간의 변칙을 써서, 어떤 기억을 나누어 볼까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반 미정이는 불행한 아이였다. 적어도 겉보기에 그랬다. 표정이 어두웠고, 무엇에도 열심인 것 같지 않았고, 비행을 일삼았다. 부모가 없었고, 형편이 어려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학급 임원을 맡았던 터라 담임선생님을 따라 미정이네 집으로 가정방문을 간 적 있었는데, 그 할머니도 친할머니는 아님을 알게 되었다. 미정이는 생판 남에게 위탁된 아이였다. 미정이의 모습을 회상해 보면, 예뻤다 할 수 있다. 피부가 희었고, 이목구비도 시원했고, 팔다리도 길었다. 그렇지만 무성의하게 잘려나간 숏컷의 머리 모양, 몸에 잘 맞지 않는 교복은 미정이의 모습에서 조화와 생기를 찾기 어렵게 했다.

그 해는 어떤 이유에서, 학교에서 점심 급식이 운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했는데, 학부모들이 미정이의 형편을 헤아리고 해결에 나섰다. 마흔다섯 명쯤 되는 반 아이들이 하루씩 돌아가며 미정이의 몫까지 도시락을 두 개 챙기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이나 그 엄마나, 자기 차례가 돌아온 것을 깜빡 잊는 실수가 왕왕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며 더 빈번해졌다. 이런 실수의 틈바구니로 우리들의 진짜 모습이 삐져나온 것은 아닐까.

자기 차례를 지키지 못해 당황하는 우리가 벌이는 수습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용돈을 들고 교내 매점으로 달려가 컵라면, 빵 따위를 사다가 겸연쩍게 미정이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드물게는 자기 도시락을 내어주고 스스로 라면을 먹거나, 매점 먹거리에 하나 뿐인 도시락을 보태어 미정이와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런데 도시락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지키고 미정이에게 매점 음식을 주는 방법이 제일 흔하게 채택되곤 했다. 미안해하면서도 다들 대수롭지 않게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라면이나 빵을 받아드는 미정이의 얼굴은 ‘약속불이행’을 책망하는 듯해 보였다.

나는 당시에 우리가 더 나은 방법을 취할 수는 없었을까, 그리고 비슷한 공동체적 고민이 예술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듬어가려던 차였다. 다시 말해, 급우들이 번갈아가며 미정이의 끼니를 제공한다는 표면적 차원에 머물 게 아니라, 보다 진지한 고민을 해 볼 여지는 없었겠냐는 것이다. 함께하는 식사의 구성원이 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편으로 상황이 흘렀더라면? 식사의 문화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구태의연하리라. 지금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과거에 해 보려던 일이 아주 피상적인 시도에 그쳤다는 데에 아쉬움을 표하는 것이다. 사실, 그때 부모들의 마음이란 미정이가 우리와 친구가 되길 바라는 것이었다기보다 미정이의 학교생활이 더 위태로워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기야, 그것만 해도 어디냐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심마저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고 말이다. 그랬던 당시로서는 도시락을 하나씩 더 싸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있었으랴 싶기도 하다.

그래서 당시의 기억으로 돌아가 우리들 면면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로 한다. 여중 1학년, 우리는 한 교실 안에서 삼삼오오 친한 그룹으로 나누어 앉아 점심을 먹었는데, 우리들 각자는 ‘절친’들과 도시락 나누어 먹는 재미를 희생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컵라면보다는 도시락을 들고 그 자리에 임해야 진정한 구성원이 된 기분을 누릴 수 있었을 거다. 그래서 미정이 몫을 잊고 하나만 챙겨온 도시락을 양보하는 것은 일종의 결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별 생각이 없으면 결심도 따르지 않았다. 매점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는 게 그리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는 인식마저 있었다. 시험 공부를 한다며 시립도서관에 쳐박혀 주말을 보낼 때, 도서관 매점에서 사먹던 간식 맛에 어떤 특별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별 생각 없이 그런 ‘도서관 별미’ 감성으로 라면을 떠올려내곤 미정이에게 가져갔다. 이건 내 얘기다. 내가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 아닌 다른 무엇, 급조된 대안을 받아들이는 미정이의 태도는 시큰둥했다. 어쨌거나 호의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불쾌와 실망을 역력히 드러냈다. 대가 없는 나눔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가 아니라, 왜 너희는 도시락이고 나는 아니냐는 식이었다. 그렇게 대놓고 당당히 자기 것을 주장한다는 게 내겐 자못 놀랍기도 했다.

그런데, 미정이의 마음을 충분히 가늠해 보는 노력이나 분별이 부족했던 것을 ‘아이들다움’으로, 천진함으로 미화할 수 있을까? 교사와 부모들이 더 긴밀하게 관여하여 미정이가 자연스러운 일원이 되게 할 수는 없었을까? 우리는 위선 뒤에 숨어 안도하고 있지 않았을까? 무언가를 당연시하게 된 미정이의 태도를 뻔뻔하다거나 의존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공적기금에 상당 부분 기대어 있는 공연·전시 프로덕션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귀결로 이 글을 마쳐볼까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문득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껏 나를 따라다닌 이 씁쓸함!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이것으로부터 내내 무언가를 배우는 중은 아니었을까? 의식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예술 현장에서 그러한 배움을 제공하는 작품을 만난 적 있었던가.

내가 미정이의 후일을 상상할 수 없다는 데에 더욱 큰 당혹감을 느낀다. ‘나 같은 사람’은, ‘미정이 같은 아이’가 그 할머니와 얼마나 더 함께 지냈을지, 성인이 되어 무엇을 하고 싶었을지 쉽게 상상할 수가 없다. 아니다. 쉽게 그려보려 해선 안 된다. 그것이 나의 한계인데, 이런 한계를 가리키는 작품, 다시 말해, 한 사람이나 사태의 뒷모습을 상상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작품은 어디에 있는가.

학년이 끝나며 반이 바뀌고, 서서히 기억에서도 사라져 간 미정이가 이후 어떻게 살았을지를 가정하거나 상상하는 데에는 윤리적 부담이 따른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동정이나 연민의 그림자를 드리우진 않을지 두렵다. 이러한 강도로 뒷모습을 굳게 감추고 내 상상의 현실과 한계를 꾸짖는 그런 작품을 그간 보았는가. 하나를 소개한다. Sooja Kim의 “A Needle Woman”.

그리고?

더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계속 해서 꼽을 수 있도록, 끈질기게 예술계를 두리번거리며 ‘목격담’을, ‘견문’을 실어나라야 하리라.

“A Needle Woman”(1999년) 중 한 컷. 작가_Sooka Kim(김수자). 사진 제공_soojakim.com

작품 영상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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