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Carl Schmitt)는 바다를 싫어한다고 한다. 형태도 구별도 없고 변화무쌍한 덩어리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 대신에 그는 대지 애호가이다. 대지 위에서는 국경을 만들기도 쉽고, 적과 친구를 나누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국경뿐이겠는가. 대지 위에서라면 초법적 결단도 가능하다. 주권자(이자 독재자)의 결단에 따라 법의 보호를 받는 안전지대와 그렇지 못한 위험지대가 나뉜다. 국경은 친구들만 있는 안전지대를 확보한다. 반면에 위험지대는 무법천지로 방치된다. 주권자의 결단은 항상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결단하는 주권자에게 경계선을 넘는 행위는 금지된다. 월경은 추방이나 침투를 의미할 뿐이다. 칼 슈미트는 특별히 월경하는 낭만주의자를 싫어했다.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되는 정체불명의 이야기를 싫어했다. 그런데 문학은 온통 월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가 문학을 좋아했을지는 의문이다.
경계선을 넘는 사람들을 보통 자유인이라고 한다. 구속과 속박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유별나게. 특별히 그들은 경계선 이쪽의 안전지대를 싫어한다. 안전한 자유는 가축화된 자유일 테니까. 야생성이 사라진 자유를 그들은 구속이라고 부른다. 안전지대에서는 가도 가도 친구뿐이다. 무료함의 연속이다. 재독일 철학자 한병철은 이것을 가리켜 ‘같은 것의 지옥’이라고 했다. 타자가 추방된 안전지대는 천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칼 슈미트와는 다른 이유에서 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들뢰즈의 영토. 우리들의 신체. 들뢰즈에게는 대지가 덩어리이다. 특히 우리들의 신체는 무정형의 미세한 덩어리들의 집합체이다. 세포들도 독립된 충동 덩어리들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충동 덩어리들이 피부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들의 신체는 그것들이 잠시 가축화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각질화된 자유라고나 할까. 죽음은 그 충동 덩어리들이 각자의 야생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자유는 변신술에 있다. 충동 덩어리들마다 무한 생성 능력을 돌려주는 일이다. 들뢰즈는 신체의 잠재력에서 자유의 가능성을 본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이 아니라 신체에서! 정신은 신체의 자유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신체를 지배하고 통제하여 가축화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신체에서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형태에 따라 기능을 부여한다. 기능이 고정되면 변신은 불가능하다. 들뢰즈는 이 신체라는 대지 밑에서 바다의 흐름을 본 것이다. 무정형의 바다가 지하를 흐른다. 지상전에만 관심이 있는 칼 슈미트에게 지하의 바다는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자유는 바로 그 공포와 대면하는 경험이다. 그것을 주이상스라고 하던가. 주이상스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도 변신술 이야기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한 지식인 파우스트에게 지식은 더이상 새로울 게 없다. 같은 것의 반복일 뿐이다. “슬프도다! 나 아직 이 감옥에 갇혀 있단 말인가?” 그의 연구실은 이미 감옥이다. 그에게 탈옥의 경험이 필요했다. 책에서는 시간을 되돌려 청년으로 변신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시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자유. 그 자유를 위해 파우스트는 악마와 거래하게 된다. 왜 하필 청년인가? 그것은 단순한 수명 연장의 방편이 아니다. 그 이유를 책의 서문에서 극작가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내게도 그 시절을 다시 돌려주시오.
내 자신이 아직 생성되고 있었으며,
용솟음치던 노래의 우물이
끊임없이 새로이 솟아오르던 그 시절을.
안개가 아직 나의 세계를 감싸주고 있었으며,
꽃봉오리들이 아직 수많은 기적을 약속해주고,
나 아직 모든 산골짜기에 충만해 있던
수천 가지 꽃들을 꺾던 그 시절을.
그땐 내게 아무것도 없었으나 충분히 갖고 있었으니,
진리에 대한 충동과 환상에 대한 쾌략이 있었다오.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던 저 충동을 돌려주시오!
청춘을 돌려다오. 왜냐하면 그때는 아직 지금의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는 무정형의 나, 생성 중에 있었던 ‘나’의 시간, 나의 미래가 안개 속에 파묻혀 있었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으나, 그래서 오히려 “충분히 갖고” 있는 때가 청춘이다. 사방 천지에 “아직 수많은 기적”을 약속하는 꽃봉오리들이 즐비하던 때인 것이다. 정신의 지배는커녕,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던 저 충동”에 맡겨진 때가 그때이다. 아직 국경의 공포를 모르던 때. 경계를 넘어서는 고통을 알지 못하던 때이기도 하다. 가축화되지 않은 신체, 각질화되지 않은 피부로 세계를 생생하게 경험하던 때이기도 하다.
파우스트, 중년의 그는 그러나 그와 같은 자유를 상실했다. 그의 삶은 점점 감옥처럼 견고해진다. 사유의 근육이 굳어가고, 습관이 신체를 옥죈다. 피부는 갑옷처럼 단단해져서 감각은 무뎌진다. 그래서 그는 악마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우선 이것들과 헤어질 수 있다면,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리라.” 이곳이 아니면 어디라도 좋다. 이 순간 고전주의자 괴테는 낭만주의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다. 정신이 지배하는 지옥에서 해방되어, 충동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 파우스트의 시간여행은 자유여행인 것이다. 그것은 무한 변신이 가능한 시절로, 그 자유인의 시간으로의 변신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단 없는 무한변신이 가능한가?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는 영원한 유목생활이 가능한가? 무료함에 지친 파우스트는 무한변신의 자유를 과신했고, 그렇게 악마와의 거래가 성사된다. “내가 순간을 향하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말을 한다면, 너는 나를 꽁꽁 묶어도 좋다!”라고 말이다. 악마는 알고 있다. 그 청년도 결국에는 칼 슈미트가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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