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라데크
유속에 밀려온 듯한 나무둥치들, 떠 있거나 바닥으로부터 솟아난 풀들, 흙빛의 고인 물이 담긴 수조 형상의 밀폐된 습지에 반라의 퍼포머가 누워있다. 존 에버릿 밀레의 그림 <오필리아>처럼 천정을 향해 똑바로 누운 퍼포머는 죽은 자의 형상인 줄 알았는데 천천히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고 일어나 앉고 다시 누웠다가 몸을 뒤척여 편안한 자세를 찾아간다. 관객인 나는 아직 쌀쌀한 봄날, 지하 전시장 아래 물속에 누운 그녀가 걱정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혹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 물 밖으로 끌어내는 상상을 했다.
지난 3월 11일부터 4월 7일까지 ‘아마도예술공간’에서 진행된 전시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의 설치, 퍼포먼스 <Paludarium>에서 오선영 작가는 수면(水面)상태의 몸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목도되는 죽음을 보여준다. 오드라데크는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단편 「가장의 근심」에 등장하는 납작한 별 모양의 실타래와 그 가운데 조그맣게 나온 수평막대기로 묘사되는 미지의 것이다. 가장인 화자는 이것을 보고 “이전에는 어떤 쓸모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깨어진 것”이라고 믿고자 한다. 아무데나 살면서 정체 없이, 허파가 없는 것 같은 웃음을 웃으며 가장이 죽은 뒤에도 살아남을까 고통을 주는 존재, 불사성(不死性)의 오드라데크가 사멸하는 인간의 운명을 고통스럽게 하듯, 늪의 수조 속에 누운 퍼포머의 몸을 통해 오선영은 ‘가장(家長)의 근심을 공유하는 관람자’의 해석과 예측을 비틀어 버리고 불편과 불안은 관람자의 몫으로 남는다.
‘쓸모’, 즉 사용 가치로 인해 쓸모없는 것은 쓰레기가 되거나 쓰레기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버려지고 소각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진다.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마주한 자는 불쾌해하거나 불편해하고 불안해하기도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해 버린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순간 비로소 쾌적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활발히 작동하는 도심의 거대한 쓰레기더미는 인천, 김포 등의 수도권 외곽에 매립되고, 철거민들은 변두리로 쫓겨나며, 무직자, 홈리스, 빈민들은 정체 없이 “번갈아가며 다락이나 계단, 복도 마루에 잠깐씩 머무는” 오드라데크처럼 거리와 지하, 옥탑 등을 떠돈다.
한편 봄로야는 1960년대 한센인 정착촌이었다가 1980년대 헌인가구마을이 들어선 서울 서초구 내곡동과 30여 년간 비닐하우스촌이었다가 2010년대부터 그린벨트가 해제되어 아파트촌으로 바뀐 서울 강남구 세곡동을 떠돌며 개발의 경계에 놓여 방치된 풍경을 보여준다. 그녀의 영상 <유연한 손>은 뜨거운 한 낮, 하얗게 노출된 백색 공터, 철근이 아무렇게나 솟아오른 그곳에서 중첩의 이미지로 다시 또 다시 등장하는 인물로 시작한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움켜쥐고, 긁고, 파고, 벌리는 손짓”으로 버티며 살아간 자들을 소환하고, 방치된 집들, 버려진 물건들, 쓰레기들, 비어버린 풍경 안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는 경계 밖으로 밀려난 자의 삶을 보여준다.
매끈하고 청결한 서울을 만들기 위해 강제이주 당하고 흔적이 지워진 사람들은 폭력을 경험한 존재로서 자본의 질서에 용해되지 않은 채 훗날에도 오드라데크처럼 “내 아이들과 내 아이들의 아이들의 발 앞에서도 여전히 노끈을 끌며 계단을 굴러 내려갈 것”같은 근심스러운 고통의 원인이 된다. 성장 자본주의에서 혐오와 차별은 보편이고 어쩔 수 없는 것, 노골적이 된다. 마찬가지로 생산성과 쓸모의 가치 판단으로 오드라데크를 바라보는 가장의 근심은 혐오와 폭력을 내포하고 있다. 허나 팬데믹 이후 일자리가 없어지고 급식 및 복지 서비스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된 노숙인의 삶처럼, 위기의 순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먼저 공격하는 자본의 생리에 의해 경계 너머로 밀려나는 존재는 어느 때고 존재할 것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 출현할 것이다.
추(醜)의 점유
낙엽들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처럼 웃으며 ‘머뭇거리며 버티는 모양새’로 존재하는 버려지고 치워지고 가려진 존재는 어떻게 공간과 장소를 점유할 수 있을까?
우희서의 설치 <Bad breath>는 ‘추의 점유’ 전략 중 하나로 충남 부여군 규암리의 이름도 장소도 표시되지 않은 땅을 사유화 혹은 공유지화하기 위해 (공유지를 만들기 위한 사유화) 작가가 그 땅에 심겨있던 호박을 가져와 마을 사람들과 호박죽을 끓여 나눠먹은 경험을 모티브로 삼았다. 작가는 약속과 기능이 결부된 전시장을 벗어나야만 발견할 수 있는 호박을 “자본과 기능으로 점유하는 공간을 패러디하며 공간의 음영화를 만드는 오드라데크의 전략”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예술이 자본의 욕망을 이용해 자신이 존재할 공간을 확보할 때 우리는 예술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오드라데크가 가장에게 자신의 불가해성을 노출함으로써 죽음이라는 심원한 인간성을 뒤흔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자본의 쓸모를 거스르는 생산품을 상품 세계의 진열장에 끼워 넣음으로써 자본의 질서를 조금씩 파괴한다.”
히스테리안(강정아, 김민주, 강병우, 봄로야, 최희진, 유지완) 『오드라데크O(b)dradek』, 2022, p.188.
4월 1일 전시 연계 렉처 퍼포먼스에서 이예현(용산구 후암동 ‘수건과 화환’ 큐레이터)은 주류(mainstream)를 만들려는 사회적 원심력의 한가운데로 쓸모없는 가치를 끌고 오려는 예술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원심력이란 실은 실체 없는 공백 또는 공허(보이드)로서 다른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추방되어 쓸모없어진 것들이 다시 모여 어떻게 자본의 가치체계와는 다른 것을 욕망하고 상상할 수 있을까? 과연 예술이 버려지고 밀려난 사람들을 삶의 중심으로 끌고 올 수 있을까? 그것은 낭만적 생각일까? 또 다른 근심일까? 아니면 연대일까?
노드트리(이화영, 정강현)은 충남 부여에 터를 잡는 과정에서 관계 맺은 농부와 장인의 생산물 등을 키네틱 설치 작품 <땡볕, 초승달과 대추>에 개입시켰다. 2020년 도시를 떠나 충남 부여로 이주한 노드트리는 지역 특산물 농장에서 일꾼으로 경험을 쌓고, 노동과 수행으로 발생하는 관계성을 작품의 재료로 삼아 2021년 개인전 <<카르마(karma)>>를 열었다. 카르마는 부여군 장암면 석동리 마을 뒷동산의 이름 ‘갈마’로도 읽는데 그곳은 노드 트리가 부여에 거주하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지도에도 없는 장소이다. 이방인인 이들의 출현이 소유공간의 보이드를 개시한 것처럼 농부와 장인의 개입으로 <땡볕, 초승달과 대추>는 유연하고 우발성을 발생시키며 그 자체로 생동감을 얻는다.
전시기획자 강정아는 “무쓸모와 추를 통한 오드라데크의 출몰을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자본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했다. 쓸모와 기능으로 구별되고 분리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어디일까 되묻게 된다. 1인 가구, 예술가, 비정규직, 무주택자, 흙수저, 고령화, 기후위기, 팬데믹, 재난…. 누구인들 이 모든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경계에서 밀려난 사람을 바라보는 경계에 선 사람으로서 “자본의 질서에 균열을 내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본 글의 제목은 강정아 기획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2022.3.11.-4.7), 아마도예술공간, 히스테리안 리서치 영상 <정해져 있지 않은 거주지: 오드라데크> 텍스트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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