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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실재론의 나침반 - 「개념의 나침반」을 읽고 - / 박성관

1. 최근 「개념의 나침반 : 현대 실재론의 인식적 방향과 존재론적 방향」이라는 글을 읽고 인상에 남아, 대부분을 번역하여 한 세미나에서 발표했다. 모르는 내용이 태반이었고 순수 철학적인 논의였는데도 많은 참석자들이 공감을 표하며 수군거렸다. 특히, 예술 작업을 하는 분들이 그랬다.

트리스탄 가르시아

2. 「개념의 나침반」은 심포지움 기록집인 󰡔[물 자체 : 실재론의 형이상학]󰡕(2018)에 실려 있는 트리스탄 가르시아의 글인데, 다른 저자들 중에는 조슬랭 브누아, 장 뤽 마리옹, 그레엄 하먼, 레이 브라시에, 캉텡 메이야수, 마우리치오 페라리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알렝 바디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케 다양한 철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도 굉장한데 제목이 ‘물 자체’라니, 실재론에 ‘형이상학’이라는 단어를 엮다니! 다소 난폭하게 말해보자면, 최근 철학이 실재론으로 수렴되어 간다는 것, 그런데 실재론에 더 이상 형이상학적 탐구가 배제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 같다. 2016년 심포지움의 제목도 그래선지 <물 자체 – 오늘의 형이상학과 실재론>이었다.

3. 이 글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두 가지 들어보자.

3.1 가령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 혹은 ‘인류학의 조용한 혁명’을 평할 때 서구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근대로부터의 벗어남을 들곤 한다.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포스트 구조주의자라 불리던 푸코나 들뢰즈, 데리다 같은 사상가들 그렇게 형용되었고 또 높이 평가받았던 거 아닌가? 이들이 열심히 했지만 불완전했거나 그들 역시 과거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내지 못했다는 뜻일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블록 하나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3.2 또 하나는 최근 󰡔[신유물론](2010)1)이라는 앤솔로지의 「서론」을 읽었을 때였다. 「서론」의 필자는 유물론의 폐기가 아니라 쇄신이 필요하며, 새로움의 핵심 중 하나는 사회적 구축의 역할을 크게 중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당연한 듯하면서 동시에 의아스럽다. 사회를 중시하는 것이야말로 유물론이 다른 강단 철학과 크게 다른 점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전까지는 왜 이 측면을 경시 혹은 무시했던 거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푸코로 대표되는 지적 전략을 유물론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구축주의라고도 비판받는 이 전략에서는 물 자체든 물질이나 대상이든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은 없다. 권력에 의해 구축된 형태로만 현실적으로 경험된다. 이러니 유물론으로서는 거부하거나 머뭇거릴 수밖에. 그런데 이제 신유물론 혹은 비판적 유물론은 사회적 구축의 역할을 크게 중시하겠다는 거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거 같지 않다. “비판적 유물론자에게 사회는 물질적으로 실재적임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구축되어 있다. 우리의 물질적 삶은 언제나 문화적으로 매개되어 있지만, 단지 문화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신유물론의 존재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과제는, 물질성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한편, 물질성의 복수적인 차원들과 그 복잡하고 우발적인 현상 방식을 잘 식별해내는 것이다.”2)이런 진술에 크게 공감하면서도 역시나 뭔가가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회적 구축성을 중시할수록 유물론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닐까, 유물론을 강조하면 사회, 문화, 주체(성) 등을 물질, 즉 경제 구조의 차원으로 환원하게 되지 않을까? 뭔가 징검다리 하나가 빠진 거 같다.

4. 「개념의 나침반」

그러던 차에 읽게 된 것이 「개념의 나침반」이었다. 읽다 보니, 우리가 잘 풀지 못하면서도 그렇다는 사실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껴졌다. 가르시아에 따르면 요즘은 대부분 실재론이다. 상대방을 비판할 때도 실재론적이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상대방은 난 안 그렇다든가, 네가 더 그렇다든가 반박한다. 실재론에 반대하는 진영도 논쟁을 하다 보면 실재론적인 근거를 대는 형국이다. 그래서 가르시아는, 실질적인 문제는 실재론들 간에 긴장과 모순이 있다는 점이라고 정리한다. 대부분 실재론을 자처하지만 취하는 방향(orientation)이 서로 다르다는 거다. 크게 보아 두 가지 동쪽(orient)이 있다. 이제부터 세미나 발제하듯이 편하게 글의 내용을 발췌해가며 정리해보겠다.

4. 1 인식적 실재론 : ‘실재’(real)3)를 어떻게 인식하고 식별할 것인가?

이 실재론을 세 가지(혹은 네 가지)로 나눠보자.


1) 명사적 실재론 : 근래의 프랑스 현상학이 여기에 해당된다. 예컨대 장 뤽 마리옹은 우리의 지향적 기대를 늘 초월하고 그로부터 흘러넘치는 모종의 것을 ‘실재’라 부른다.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이 실재는 환원 불가능한 ‘잉여’처럼 지향적 의식에 대해 나타나는 것이다. 의식에 의해 온전히 포괄되지 않고 사고에 이해 자유로이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그런 게 있다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는 이름이고 명사다. 작년에 번역된 [마리옹의 󰡔과잉에 대하여] 󰡕(그린비), 특히 목차를 보시기 바란다. 느낌이 확! 온다.


2) 형용사적 실재론 : 명사적 실재론의 실재는 외재적이고 딱히 이것이라고 짚을 수 없다. 즉, 다분히 형이상학적이다. 이래서야 실재론이라 하기 곤란하다. 이런 실재론을 경계하면서 콰인의 몇몇 제자들, 가령 초기 퍼트남이 제시한 것은 일종의 개량된 실재론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논리실증주의의 반실재론 사이에서, ‘내재적 실재론’을 옹호했다. 우리의 이론과 실재 사이의 관계의 성질을 밝히겠다고 마구 주장하는 게 아니라, 실재에 관한 우리의 과학적이고 훌륭한 설명에 제합성(齊合性, cohérence)이 있음을, 여기에 근사적 진리가 있음을 증명하겠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인식 대상으로서의 실재는 더 이상 우리 정신으로부터 독립된 일련의 고정된 대상이 아니다. 다른 이론에 비해 세계에 대해 근사적으로 ‘참’된 하나의 이론을 만들었을 때, 거기에 실현되어 있는 우리의 표상 상호 간의 이상적인 제합성이고, 우리 표상과 우리 경험과의 이상적인 제합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표상이나 경험에 있어서의 (많든 적든) 실재적인 특징이 증명된다. 그래서 여기서 실재는 ‘질’이다.


3) 부사적 실재론 : 실재를 의식에 주어진 것이나, 혹은 우리 인식의 질로 보지 말고, 인식자의 태도로 보자는 쪽이다. 이렇게 되면 내용의 실재론에서 양태의 실재론으로 천천히 진로가 바뀐다. 이는 결국 일상경험에 대한 새로운 실재론에 이른다.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이 현실 언어의 ‘거친 대지’라 불렀던 것을 환기하는 셈인데, 코라 다이아몬드(이 사람은 누구지?)가 사고를 다시 인도해가고자 한 곳도 이 실재론이다. 여기서는 ‘현실=실재’는 내려닫지 않으면 안 될 대지가 되고, 이 대지에 의해 관념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요구는 어떠한 것이든 일소된다. 이것은 실재에 대한 실재론이라기보다 ‘실재적으로(really)’ 라는 것에 대한 실재론이다.


4) 역설적 실재론(데이비드 루이스(이 사람은 또 누구지?)와 캉텡 메이야수) : 이들은 실재를 논하거나 주장하는 게 아니라, 실재에 대립하는 형상, 즉 가능한 것(the impossible)에 대해 실재론을 적용하고자 하기 때문에 역설적이다. 루이스의 기획은 가능한 것을 실재로 인식하려는 시도인 반면, 메이야수 등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기획은 실재를 가능한 것으로서 인식하는 데 귀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읽어본 적이 없어서 뭔 소린지 모르겠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을 바탕으로 실현되지 않은 확률치들은 어디로 갔는가 물으며 다른 우주가 실재함을 주장하는 다중우주론을 연상시킨다. 이들에게 여기 아닌 곳의 가능성은, 그곳에서는 현실성이 되고, 그곳 입장에서는 역으로 우리의 여기가 가능성이다. 한편, 메이야수는 이 세계가 실재다. 그런데 이 실재는 실재여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 실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는데 실재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실재라는 것의 (전통 철학의 용어를 쓰자면) 본질은 가능성[우연성]이다.

5) 이들 인식적 실재론에는 기묘한 특징이 있다. 인식 주체는 자신과 무관한 대상에 큰 관심을 갖는다. 대상은 주체가 그러거나 말거나 완전히 무관심하고4), 주체는 대상이 그럴수록 더 환장을 하며 대상을 열망한다. 자신은 그것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고 그저 구속될 뿐인 것에 대한 사랑. 소위 고전적인 사랑, 즉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 혹은 서양 중세의 기사들이 귀부인에게 바쳤다는 사랑과 판박이다. 오늘날의 철학과 예술이 공히 앓고 있는 기이한 질병이다. 20세기말까지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텍스트, 권력,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차이 등의 중매 없이 대상이나 존재나 현실이 직접 우리의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겠다고 하면서 시종 애정했던 것들은 다종다양한 인간 과학 텍스트들이었다. 시도는 야심 찼고 성과도 많았지만 계속 갈 수는 없는 길이다. 여러 종류의 실재론들이 앞다투어 등장했고 유물론이 신유물론으로 갱신되어야 했던 이유다. 칸트의 ‘숭고’가 다시 주목을 받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인식적 실재론 얘기는 대략 이 정도다. 문제는 이게 충분치 못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실재 개념은 실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확연히 절단시켜주지만, 몇몇 현대의 실재론에서 발생하고 있는 혼효(混淆, contamination)라는 결과를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혼효에는, 우리에 대립하는 무관심한 것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 늘 모종의 실재성을 갖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실재로서 나타나온다. ‘실재적 존재’는 많은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버추얼, 허구, 상상적인 것을 불문하고 다양한 표상이나 대상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직관적으로 ‘실재’라 불러온 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의 관심은 더 이상 인식적 실재론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재론으로 향해 간다.

미리 말해둘 게 있다. 이제부터는 나도 거의 모르는 내용이다. 그래도 발표 중에 (내 글도 아닌데) 여기서부터 서서히 흥분되었고, 뭔 소리 하는거냐 싶어하던 사람들도 몰입하기 시작했다. 자, 뇌 요가 한번 해보자.

4. 2 존재론적 방향 : 존재론적 실재론

이것은 실재인 것(being real), 즉 실재로 있음을 사고하기보다도 실재 것(being real) 즉 실재로 있음을(실재을) 사고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에 의해 우리의 관심은, 19세기말 이래 특히 알렉시우스 마이농(1853-1920)의 저작에서 발원하는 근현대 비정통파의 사고로 향한다. 이들에 의해, 우리가 실재적으로(really) 비실재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하지만 실재적 존재가 실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이지 않은 존재가 실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걸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예컨대 그것은 상상상의 존재, 허구적 존재, 심지어는 모순된 존재다. 여기서는 주체의 인식양태가 아니라 대상 자체의 존재양태로서 실재론이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실재’가 가리키는 것은 사물에 대해 우리가 환기하거나 명명하거나 술어로 기술한다고 할 때의 그런 무엇이 아니다.

문제는 더 이상 주체의 태도가 아니라 말하자면 대상의 태도(attitude)인 것이다. 따라서 마이농과 신마이농주의자들은 독창적인 ‘어떤 것의 학(tinologies)’, 즉 존재보다 대상에 관한 근본적인 언설, 특히 현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관한 언설을 산출한다. ‘대상’이라는 범주는 ‘현실 존재’라는 범주보다 취약하고 규정이 불충분하지만, 더 폭넓은 것임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현실 존재 내지 대상을 사고하고 형용하는 방법이나, 현실 존재하지 않는 것(불가능하고 모순을 포함하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까를 규정하는 방법이 발견되어야 했다. 이러한 마이농의 리버럴함5)과 유사한 기도를, 대륙철학에서 다(多)의 존재론(들뢰즈의 이질적인 다, 바디우의 등질적인 다)을 통해 볼 수 있다. 그후 들뢰즈를 계승하는 마누엘 데란다의 ‘플랫한 존재론’이 모든 존재체(entities)를 존재론적으로 평등한 것으로 설명한다고 하는 대단히 리버럴한 기획을 구현한다.


이러한 비위계적이고 집합적으로 구조화된 다(多)의 존재론 외에, 존재를 양화하는 게 아니라 질화(質化)하는 존재론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에티엔 수리오(얜 또 누구냐?)에 의해 부활되어 브뤼노 라투르나 필립 데스콜라, 이자벨 스탕제르를 매혹시키고 있는 ‘존재 양태’ 이론(les théories des ‘modes d’être’)이다.6) 존재는 다양한 의미에서 이야기될 뿐 아니라, 존재는 다양한 의미다[다양한 의미로 존재한다].7) 다양한 존재양태들(특이한 존재체나 집합적 존재체, 물질적인 존재체, 신앙의 대상, 표상 같은 것들)은 결코 서로 환원 가능하지 않으며, 또 어떤 일체의 동일적 존재의 다른 질도 아니다. 그들은 다양한 것들의 다양한 자격(qualification)인 것이다.

인식론적 실재론자는, 존재론적인 실재론자들에게 기준이나 구속, 인식의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고 늘 비난한다. 역으로 후자는 전자들이 실재를 주체에 부과되는 기호나 기준으로 만들어버린다고 비난한다. 존재론적 실재론은, 모든 존재체들 간에 구별을 두지 않음8)으로써, 사고는 일체의 것을 모두 존재, 존재자, 존재체, 대상, 사물로서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른 주체들의 가능성을 잘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주체와 대상을 실재라는 동일한 평면에 배치하려 해야만 하는 것이다.

4. 3 결론 : 나침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두 실재론은 서로를 비판한다. 이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말해보자. 인식적 실재론에서는 실재가 주체에게 부과되는 방향이 발견되고, 존재론적 실재론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평등하게 늘어서, 그것들을 재배치하는 실재가 발견된다. 이 두 실재는 두 동쪽을 표시하며 마치 대립하는 극이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장을 구조화하고 있다. 전자는 단절의 실재론이고 후자는 포함하는 실재론이다. 우리 사유의 나침반이 흔들리고 돌아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실재론의 장에서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줄 도구를 잘 작동하게 할 수 있을까? 해결책은 아주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사유한다 함은 실재화함이다”9)라고 생각해보자. 이것은 동사적 실재론이다. 문제는 동작이며, 사고라는 행위다.

실재화한다 함은 실재의 기척을 느끼고, 실재를 설명하며, 실재화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 모든 짓이다. 다른 표현을 하자면, 실재화한다 함은 실재 속의 실재적인 특징을 복원하고, 실재적이지 않은 것(가능한 것)의 실재적인 특징을 구성하는 일이다. 인식적 실재론도, 존재론적 실재론도 결국은 실재화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나침반의 북쪽을 때로는 인식적인 것으로, 때로는 존재론적인 것으로 맞추며 계속 나아갈 수 있다.

5. 실재론과 형이상학

오래도록 실재론은 형이상학적인 가정을 포함한다고 비난받아왔고 형이상학은 종교의 잔재라고 비난받아왔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A. 카네브는 󰡔[신실재론 – 문제와 시각]󰡕(2019)이라는 앤솔로지의 서론(카네브, 「왜 신 실재론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흄에서 니체를 거쳐 포스트모더니스트에 이르는 몇 세기 동안, 모든 세대의 철학자들은 이전 세대가 여전히 독단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고 비난하였다. 칸트에겐 데카르트가 독단적인 철학자였고, 니체는 칸트 자신이 그렇다고 여겼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로 간주했고,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가 현전의 형이상학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시사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겐 󰡔논리철학 논고󰡕가 여전히 형이상학적인 그림에 속박되어 있었다, 등등.”10)

이렇게 보면 실재론을 비판하는 철학 전통은 자신들의 비판 대상 못지않게 형이상학적이고 독단적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새로운 철학들 다수가 실재론(신유물론을 포함하여)으로 수렴되는 상황이 되었다. 아울러 형이상학은 배제하고 싶다고 해서 배제되는 게 아니었다. 바로 이런 장 위에서 읽을 때, 󰡔물 자체 : 실재론과 형이상학󰡕이라는 기록집도, 가르시아의 「개념의 나침반」도 더 실재화할 수 있을 거 같아 덧붙여보았다.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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