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 2학년에서 3학년 사이 몇 학기에 걸쳐 한국고대사, 한국중세사, 한국근세사, 한국근대사 등 전공수업을 연달아 듣던 어느 날이었다. 수업을 듣고 나오면서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무슨 놈의 공동체는 2천 년 동안 해체 중이래?”
사연은 이러했다. 시대사 수업은 대체로 왕조의 시작부터 끝까지, 혹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한 왕조를 통시적으로 다룬다. 이 통시적 서사는 발단-전개-절정(일종의 왕조 완성기)를 거쳐 마무리(해체와 변화)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는다. 발단이 전 시대 모순의 폭발에서 시작한다면, 마무리는 사회구조의 변동과 새로운 과제로 맺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사회구조의 변동이 문제였다. 듣는 시대사 수업마다 사회구조가 변동되었다는 사례로 설명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가 해체되었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시대사 하나만 들었을 때에는 상당히 개연성 있어 보이던 설명들이 여러 시대사를 연속으로 듣고 나니 도리어 이상해 보이게 됐다. 고대사 수업 때에도 해체되고 있던 공동체는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근대에도, 현대에도 계속 해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교수님들의 수업을 이렇게 거칠게 단순화시킬 것만은 아니다. 짧은 수업 시간에 공동체의 해체 양상이 정교하게 설명되기 힘들긴 했겠다 싶긴 하지만, ‘집단에서 개인의 탄생으로’라는 구도로 역사의 발전이나 진전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여하간 역사학의 서사가 결국은 시대의 흐름에 대한 개연성 있는 설명이라고 한다면, 학문 안에서 어떠한 시기 구분을 하더라도 통사로 서술할 때 문제가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문제의식은 나를 자꾸 앞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신유학의 조선, 빈 칸의 고려
처음 학부 때 관심이 있었던 시기는 조선 후기 18세기였다. 지금 돌아보면 한창 18세기에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며 학과의 조선시대사 전공 교수님들이 모두 그 시대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신 1990년대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어떤 시대를 설명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전 시대와의 비교를 수반한다. 그런데 18세기를 설명하기 위해 전제되는 이전 시대에 대한 설명이 그다지 내 성에 차지 않았다. 특히 도성계획 분야는 이때까지만 해도 기초적인 연혁과 사실 고증 이상의 연구 성과가 그다지 축적되어 있지 못하던 상황에 기인했다. 이 때문에 계속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연구를 하면서, 학부 졸업 논문은 광해군대로, 석사논문은 고려 말 조선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권력과 공간이라는 주제를 잡은 상황에서 핵심 과제는 고려의 어떠한 권력에서 조선의 어떠한 권력으로 변화했으며 그것이 공간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박사논문의 과제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조선의 건국자들이 신유학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부분은 명확하였으나 구체성이 부족하였다. 즉 14세기 말 15세기라 초라는 특정 시간대와 고려・조선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무엇이 문제시되어 무엇을 추구하려 한 것인지 등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 조선의 건국자들이 극복하고자 한 고려 권력의 성격이 무엇인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사실 첫 번째 문제는 이 두 번째 문제에서 기인한다. 이전의 문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으니 이후의 방향이 정확히 보이지 않으며, 이 시기 신유학 수용의 역사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권력의 성격 자체를 새로운 이념에 의지하여 바꾸려 하였는데, 바꾸기 전의 권력이 무엇에 의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였다. 고려의 정치권력은 불교에만, 혹은 풍수에만, 혹은 유교에만 의지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 모두에 의지하고 있었으나 무엇이 이러한 다원성을 유지시키고 있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연구는 점점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 신라 말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실 역사학계는 시대별로 연구의 벽이 높은 편이라 주변에서 그다지 환영하는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개연성 있는 설명, 적어도 나 자신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찾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르게 된 길이었다.
이러한 탐구를 통해 고려의 정치이념은 ‘태조유훈’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불교, 풍수, 유교가 모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려 정치이념은 태조 왕건이라는 정치적 권위를 통해 그 다원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구체적으로는 훈요십조라는 매개를 통해 상징화된 태조유훈이 권력의 미란다(Miranda)와 크레덴다(Credenda)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찬미와 숭배를 일으키는 것이 미란다라면 이성에 호소하여 권력이 정당하다는 권위를 이끌어내는 것이 크레덴다이다.
태조유훈에서는 풍수, 그중에서도 수도를 건설하고 운용하는 것과 관련이 된 국도풍수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고려의 국도풍수는 도선의 풍수를 내용으로 하고 태조 왕건을 정치적 권위로 삼아 왕권을 현창하고 국가체제를 구축한 중요한 이념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려・조선의 전환에서 권력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간을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것도 중요한 성과였다.

조선의 의례 공간에서 권력을 읽을 수 있을까
국도풍수에 대한 통시적 연구가 고려시대 권력과 공간의 관계맺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이를 극복하며 건설된 조선의 한성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의례 공간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다. 천하를 윤리와 규범적인 공간으로 파악하고자 한 신유학의 세계관에서 조선의 수도 한성은 그 규범을 확산시키는 핵심이었다. 그러한 규범을 확산시키기 위해 조선을 건국한 이들은 의례의 개혁에 부심했다. 의례는 권력을 선언하고 현창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조직하고 규범을 만듦으로써, 이를 수용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수도 한성은 의례의 공간으로 창출되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수도 연구를 위해서는 의례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목한 대상은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등 한성 주변에 건설된 길례(吉禮)의 단(壇) 공간이었다. 『세종실록』 오례부터 『국조오례의』를 거쳐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편찬된 전례서들은 조선을 만들어간 이들이 생각한 권력의 지향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전례서에서 규정한 단이라는 공간은 조선의 권력을 읽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단서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전례서 속의 완성된 모습만이 아니라 그렇게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몹시 당연해보이는 전례서 속의 단은 사실 매우 울퉁불퉁한 경로를 거쳐 도달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경로에 대한 주목은 한 시대의 이념을 역사화하는 데 필수적인 일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은 전례서의 규정과 현장의 현실은 달랐다는 점이다. 건국 초부터 강하게 내세운 의례 개혁에 대한 포부에도 불구하고 단 공간은 책에 있는 대로 건설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유지되고 관리되지도 않았다. 무심하게 방치했다가 시기에 따라 갑자기 주목을 받기도 했고, 국왕에 따라 중요도가 다르게 부여되기도 했다. 전례서의 현실과 현장의 현실을 함께 시야에 넣는 것은 권력의 지향뿐만 아니라 현실의 제약이나 실천을 함께 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조선의 권력이 지향한 바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해내는 힘의 세기, 수용자의 다양한 해석까지를 볼 수 있는 부분이 될 것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이의 의도만이 아니라 그 구현의 한계와 수용 정도까지를 함께 보아야 의례나 권력에 대한 연구가 권력자의 의도에 대한 해설에 그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정돈하여 조선의 단에 대한 새로운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수도가 갖는 의미, 공간과 권력의 관계, 의례의 역할 등에 대한 나름의 질문과 답변을 제시하고자 한다.
언어/문자는 왜 중요한가
풍수나 도참, 예언 같은 이른바 ‘잡스러운’ 분야의 사료는 표현하는 언어 역시 ‘잡스럽다’. 이를 살펴보다가 얻게 된 아이디어가 있었다. 바로 언어에 대한 주목이었다. 신라 말 풍수가 처음 도입될 당시, 어떤 입지를 설명하는 신비로운 표현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것이 지형과 입지를 정하는 공간이론일 수도 있지만, 기존의 공간개념을 설명하는 새로운 언어였을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였다. 특히 토속신앙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산천신앙의 성소들이 이 시기 풍수적인 언어로 표현이 되었는데, 이것을 일종의 ‘번안’이라고 보았다. 산천신앙이 각처의 지역세력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 국가에서는 풍수적인 언어로 번안한 국도풍수 체계를 통해 중앙에서 관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풍수를 언어로 보는 시야를 얻으면서, 사료에 수록된 풍수 관련 기록들도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료에 수록된 수많은 예언들은 대부분 문장이 수려하지 못하고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이렇게 안 좋은 문장들에 주목을 하며 사료를 보다 보니, 당대인들도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문장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감상을 남기거나 주석을 달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인 고려시대에 이런 예언들이 차자(借字)를 활용했기 때문이라는 점에 착안하게 되자, 고려의 문자문화와 사상의 지형이 새롭게 보였다. 여러 종류의 문자가 경합하는 상황, 번역 과정에서의 오해 등의 과정들이 보인 것이다. 또한 존재 여부만 간신히 알 수 있고 내용은 사라져버린 수많은 예언의 흔적들을 보면서 언어화되지 못한/기록이 되지 못한 세계의 크기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역사 연구는 언어로 된 기록물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데, 기록으로 남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이 훨씬 크다는 점을 좀 더 엄중히 인식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는 단지 고려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근대에는 새로운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수용이 된 번역어들이 있었다. 이는 사고의 지평을 넓히기도 했지만, 사용한 글자의 원래 뜻 때문에 개념을 오해하게 만들곤 했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되 의미를 뒤틀어 사용함으로써 기존의 단어가 지시하고 있던 현상이나 개념 자체를 왜곡하여 인식시키는 일도 발생했다. 새롭게 들어온 언어/문자가 기존의 언어/문자와 경합하며 다양한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파고 들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해보려고 한 것이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장지연 2023, 푸른역사)이다. 고대사부터 근대까지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개연성 있는 연결을 중시한 통사적 서사에 대한 오랜 문제의식을 나름 풀어보려고 노력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나가며
연구자로서의 최전선이라 하면 아무래도 나의 연구 현장의 최전선이 떠오른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연구자의 최전선이 과연 어디인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한다. 지난 20여 년 사이에 한국사 연구자와 연구논문은 상당한 양적 팽창을 이루었으나, 양적 팽창이라는 성과에 비할 때 연구의 방향성은 모호하고 새로운 서사를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역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나 상식이 현저히 저하되고 있다. 낯선 한자 단어들이 넘실대고 중고등학교 교육에서의 비중도 현저히 축소돼버린 전근대사에 대한 관심의 저하는 더더욱 심하다. 대중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같은 한국사 연구자 사이에서도 시대사 사이의 간극과 벽은 더욱 높아지고 있으며, 특히 근현대 연구와 전근대 연구의 단절은 상당히 우려스럽다.
역사학 연구자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시대의 언어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추상화된 질문을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각 시대를 연구하는 훌륭한 연구자들이 내는 지극히 구체적인 연구들을 바탕으로 다른 시대와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도 전달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추상화시킨 답을 만드는 연습도 필요하다. 그러한 질문과 답을 만드는 과정을 통할 때 창의적인 문제의식과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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