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 김동규

겨울 초입 무렵, 다섯 살 꼬마와 엄마가 외출을 하려고 현관문을 나선다. 쌀쌀한 날씨 탓에 그해 처음으로 하얀 입김이 뭉개 뭉개 피어난다. 아이는 그게 신기해서 호호 입김을 불며 장난치며 놀다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겨울 향기가 피어나!” 엄마는 그 낯선 표현을 듣고 깜짝 놀라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식이 시인 재능이 있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과연 이게 재능일까? 언어 사용이 미숙해서 혹은 알고 있는 단어의 제한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단어의 조합 아닐까? 과연 시란 무엇일까? 어떻게 답하든 시심(詩心)이 동심(童心)이라는 이야기가 동서고금의 인구에 회자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에서 ‘집’은 더 구체적으로 ‘사원’을 뜻한다. 간단히 그의 언어관을 요약하면, 언어란 근본적으로 ‘존재의’ 언어다. 이것에 호응하여 터트린 인간의 첫 발화가 시적 언어다. 시어가 본래 언어라면, 반복 사용으로 무뎌진 일상어나 학술어 같은 인공어는 그로부터 파생된 언어다. 시원적이고 창조적인 본래의 언어, 곧 시는 존재의 시원과 창조의 비밀을 담고 있다. 그리스어로 시는 포이에시스(poiesis)인데, 본시 ‘없던 것을 있게 하는 창작’을 뜻하는 말이다. 원래 시는 ‘짧고 난해하고 엉뚱한 글’(현대인의 편견)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시의 본뜻 그대로를 살린다면, ‘시 창작’이라는 조어는 동어반복이다. 그리고 모든 창의성 교육은 시 교육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시가 창작의 비밀을 담고 있는 언어여서, 그 철학자는 시를 신비한 사원으로, 시인을 그 사원의 사제로 여긴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철학자의 공허한 객설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론(詩論)은 시인들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한자로 시(詩)는 언어(言)와 사원(寺)이란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시’와 유사한 발음 때문에 사(寺)가 들어간 것이라도, 그 많은 단어 중에 왜 굳이 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을까? 시인 정희성은 「詩를 찾아서」라는 작품에서 詩라는 한자와 시의 본질을 연결지어 이렇게 노래한다.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시로써 무엇을 이룰지/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헤매어 여기까지 왔다/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한 줄기에 나서도/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정희성 시인 ⓒ이강산. 출처http://www.hani.co.kr

시는 언어의 사원이다. 일단 이 비유를 계속 밀고 나가보자. 그렇다면 무엇을 모시는 사원일까? 하이데거라면 삼라만상의 존재를, 그것이 밝혀주는 언어를 모시는 사원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시인은 그렇게 보지는 않는 것 같다. 30년 넘도록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비롯한 주옥같은 시를 썼던 노시인이 어느 날 갑자기 시가 무엇인지 의문스러워진다. 그래서 시를 찾아 떠난다. 인용된 시는 그 구도의 길을 시로 응축한 작품이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이미 시작했고 그 방면에서 무수한 성과를 냈는데도 자신이 해 왔던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 시와 철학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런 무지는 둘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시인에게는 시가 철학자에게는 철학이 가장 무거운 주제다. 느직이 완수해야 할 과제다. 만약 젊은 철학자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낸다면, 볼 만한 구석이 그다지 없을 거라는 게 거의 확실하다. 반면 원로 거장이 그런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면, 일생의 철학을 축약시켜는 바람에 난해해져서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은 한자 詩에 착상을 얻어 절에 가 보지만, 거기에서 그가 본 것은 그리움의 꽃인 상사화였다. 그리고서 시인이 내린 잠정적 결론은 시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다. 시라는 언어의 사원에서 모시는 것은 사랑의 말이다. 그것은 에로스 신전이었던 것이다. 사랑을 언어로써 보호하고 지키는 집, 그것이 바로 시다. 이것이 소위 민중해방을 위한 참여시를 써온 정희성이 평생의 공력을 쏟아 내린 신중한 결론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입장이 전혀 달랐던 순수시의 거장 서정주는 어떨까? 그에게 시는 무엇일까? 그의「시론(詩論)」이란 작품을 읽어보자.


“바다속에서 전복따파는 제주해녀도/제일좋은건 님오시는날 따다주려고/물속바위에 붙은그대로 남겨둔단다./시의전복도 제일좋은건 거기두어라./다캐어내고 허전하여서 헤매이리요?/바다에두고 바다바래여 시인인것을....”

사랑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남겨두고서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시다. 미당에게도 시는 역시 사랑의 집이었던 게다. 이런 집에서 산 적이 있던가? 경기 동향에 따른 자산 가치 현황에 촉각을 예민하게 세우는 어른들에게는 어림없는 집이다. 하지만 어른들도 어렸을 때는 그런 집에 살았다. 불운한 유년기를 보냈던 사람조차 엄마의 자궁을 집으로 삼을 때가 있었다. 처음 사랑을 만나 옹알이 사랑 언어를 익히던 곳, 그 집이 시적 언어가 거주하는 장소다.


아이들은 처음 부모에게 말을 배운다. 아니, 존재에 반응하는 웃음, 울음, 몸짓조차도 일종의 ‘침묵의 언어’라면, 아이는 먼저 존재로부터 언어를 배우는 게 맞다. 아이가 처음 만난 존재는 엄마다. 눈도 못 뜬 상태까지 고려한다면, 처음 만난 ‘존재’는 엄마의 ‘사랑’이었다. 아이는 사랑으로부터 말을 배운다. 더듬거리며 태초의 언어를 습득한다. 반면 시인은 이미 인간의 언어를 배운 상태다.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에서 탈피하여 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려 한다. 그때 그가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동심이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언어 습득 이전의 상태로 퇴행해서 어린아이처럼 옹알대며 태초의 말을 따라 말한다. 사랑의 사원에서 닿을 수 없는 사랑이 새겨진 (불가능한) 언어를 점지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것도 몰래.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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