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와 감정 중독 / 진태원

근대 합리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는 자신의 대표작인 [윤리학]에서 모든 유한한 존재자 또는 스피노자의 용어법대로 하면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정의한 바 있다. 코나투스는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 내지 경향을 뜻하는 라틴어 용어로서, 스피노자는 생명체만이 아니라 무생명체들도, 그리고 국가와 같은 집합체의 본질도 코나투스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이러한 코나투스는 욕구 내지 욕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정서(affectus)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들임과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3부 정의 3)로 정의하면서, 인간의 모든 정서는 욕망, 기쁨(laettitia), 슬픔(tristitia)이라는 세 가지 기본 정서에서 파생된다고 간주한다([윤리학] 3부 정리 11의 주석).


스피노자는 기쁨이라는 정서를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커다란 완전성으로의 인간의 이행”(3부 부록 <정서들에 대한 정의> 중 2항)으로 정의하며, 반대로 슬픔은 “더 커다란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의 인간의 이행”(3부 부록 <정서들에 대한 정의> 중 3항)으로 정의한다. 곧 기쁨이라는 정서는 우리의 행위 역량의 증대를 나타내는 것이며, 반대로 슬픔은 우리의 행위 역량의 감소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리고 사랑은 “외부 원인의 관념에 수반되는 기쁨”이며, 미움은 “외부 원인의 관념에 수반되는 슬픔”(3부 정리 13의 주석)을 의미한다. 곧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랑이며, 슬픔을 주는 것을 피하거나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미움이다. 스피노자가 볼 때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정서들의 작용은 이러한 뼈대로 이루어져 있다. 욕망을 본질로 삼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추구하며, 이를 위해 우리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사랑하고 슬픔을 주는 것을 미워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각각 두 가지로 구별한다. “기쁨의 정서가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할 때 나는 이를 쾌감(titilatio)이나 희열(hilaritas)이라 부르고, 슬픔의 정서는 고통(dolor)이나 우울(melancholia)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쾌감과 고통은 인간의 부분들 중 하나가 다른 부분들에 비해 더 많이 변용되는 경우에 인간과 관련되는 반면, 희열과 우울은 신체 전체가 동등하게 변용되는 경우와 관련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윤리학] 3부 정리 11의 주석)

따라서 네 가지 정서 중에서 희열은 가장 좋은 것이다. 신체 전체를 동등하게 기쁨으로 변용시키는 희열은 우리의 존재 역량을 균형 있게 증대시켜주기 때문이다. 반면 네 가지 정서 중에서 우울은 가장 나쁜 것이다. 이것은 신체 전체를 동등하게 슬프게 하며, 따라서 신체 전체의 역량을 모두 감소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정서 가운데 문제적인 정서는 쾌감이다. 쾌감은 기쁨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본다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 정서에서 문제는 그것이 “과도할 수 있다”([윤리학] 4부 정리 43)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술은 어떤 경우에는 좋은 것일 수 있다. 긴장을 풀어주고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으며, 또한 사람들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시켜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술은 기쁨의 정서를 산출하는 외부 원인일 수 있는데, 술이 산출하는 기쁨은 일차적으로 쾌감이다. 그것은 우리 신체의 일부를 더 많이 변용시키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술은 우리에게 과도한 쾌감을 줄 수 있다. 술이 지나치면 취하게 되고, 만취한 상태에서 오는 쾌감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정념(passio) 또는 정서의 힘은 이 정서가 인간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을 정도로 인간의 다른 활동 또는 역량을 압도할 수 있다.”([윤리학] 4부 정리 6) 이것은 알콜 중독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알콜이 주는 쾌감이 인간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다른 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알콜 중독이다. 마약 중독이라든가 게임 중독 같은 현상들 역시 스피노자에 따르면 외부 원인이 주는 쾌감의 기쁨에 사로잡혀 다른 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는 현상이다.


스피노자의 정서론에서 보면 이렇게 명시적으로 병리적인 중독 이외에도 수많은 정서 현상들 역시 중독의 경향을 띠고 있다. 스피노자의 정서모방 개념은 감정 중독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토대가 된다. 정서모방은 나 또는 우리가 어떤 대상과 직접적인 정서적 관계를 맺지 않은데도, 그 대상이 나 또는 우리와 유사하다는 점으로 인해 나 또는 우리가 그 대상이 겪는 것과 비슷한 정서를 갖게 되는 현상이다.


정서모방의 대표적인 경우는 연민이다. 연민은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따라서 직접적인 정서 관계를 맺지 않는) 어떤 대상이 고통이나 슬픔을 겪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딱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연민을 갖는 어떤 것을 그것이 겪는 불행으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구해주려고 노력하게 된다.”([윤리학] 3부 정리 27의 따름정리 4) 맹자라든가 루소 같은 철학자들은 연민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도덕 감정으로 이해했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정서모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연민은, 코나투스에서 직접 연역되는 일차적인 정서 메커니즘에 비춰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적 현상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미움의 정의에 따르면 어떤 대상이 나에게 슬픔을 안겨주면 내가 그 대상을 미워해야 하는 게 정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연민은 나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그 대상을 미워하기는커녕,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구해주려고 노력하게 된다.”


정서모방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잘해주려는 욕망을 낳기도 한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암비치오(ambitio)라는 개념이다. “오직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이유로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노력(conatus)은 암비치오라 불린다. 특히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무릅쓰고 대중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에 입각하여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쓸 때[암비치오가 나타난다]. 다른 경우라면 이는 보통 사람 좋음(Humanitas)이라고 불린다.” ([윤리학] 3부 정리 29의 주석)


보다시피 암비치오는 “사람 좋음”이 강하게 표현되는 정서다. 우리가 ‘사람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싫은 소리 안하고 남에게 인심을 후하게 베푸는 사람이다. 인심 좋고 사람 좋은 사람은 때로는 자기의 손해를 무릅쓰면서도 남에게 도움을 주려고 한다. 물론 스피노자가 여기서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는 이들은 정치가들이나 아니면 연예인 같은 유명인들이다. 이들은 “대중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에 입각하여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이들이다. 선거 때가 되면 정치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인심 좋고 사람 좋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또한 TV 화면에 비친 연예인들은 너무 다정하고 자상하고 바르게 보인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특정한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암비치오의 또 다른 면모가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 자신이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하는 어떤 실재를 사랑하거나 욕망하거나 미워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면, 바로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실재를 더욱 굳게 사랑하거나 등등 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그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싫어하거나 그 역이라면, 우리는 마음의 동요를 겪게 된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 노력은 사실은 암비치오다(3부 정리 29의 주석을 보라). 이에 따라 우리는, 각자는 본성상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며, 모든 사람이 똑같이 이를 원할 때 모든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장애물이 되고, 모든 사람이 모두에게 칭찬받거나 사랑받으려고 함에 따라 그들은 서로 미워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윤리학] 3부 정리 31과 주석)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3부 정리 29의 주석에서 암비치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잘해주려는 욕망, 남들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으로 나타났는데, 이제 암비치오는 “각각의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암비치오가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욕망이었다면, 두 번째 암비치오는 다른 모든 사람을 자신의 기질에 따라 이끌어가려는 독단적인 욕망인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암비치오의 서로 다른 측면이다. 암비치오가 첫 번째 측면에만 한정된다면 그것은 화합을 위한 정서적 일체화의 동력으로 작용하겠지만, 그것은 필연적으로 두 번째 측면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서적 일체감의 동력이었던 것이 갑자가 배타적이고 파괴적인 정서적 동력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예컨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에 대한 팬들의 열광이 첫 번째 암비치오와 관련이 있다면, 두 번째 암비치오는 이 그룹의 팬들이 다른 아이돌 그룹의 팬들에 대해 적대적인 미움의 감정을 표시할 때 표출된다. 또한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가들을 둘러싼 지지자들 사이의 격렬한 갈등이나 젊은 여성들과 남성들 간의 젠더적인 갈등의 기저에도 이러한 암비치오의 정서적 동력이 자리 잡고 있다.



스피노자의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정서적 갈등은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을 추구하고 나쁜 것을 피하려는 코나투스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쉽게 피하기 어려운 갈등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차적인 길은 자신이 어떤 정서에 사로잡혀 있는지, 자신의 정서를 객관하려는 노력이다. 여기에 더하여 오직 어떤 대상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거나 어떤 대상만이 나의 슬픔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배타적인 사고에서 빠져나오는 길이다. “오직 그것만이”라는 생각은 그 대상에 대한 정서적 의존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그 대상과 다른 것에 대해 배타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감정의 중독은 이런저런 대상에 대한 배타적인 정서적 의존에서 생겨나며,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대상과 거리를 두는 비판적인 사고와 정서의 훈련이다.


진태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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