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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시대의 군도(群盜) / 강명관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14일

1.

1426년 방화로 서울의 가옥 2천여 호가 연소된다. 함길도 북청, 길주, 영흥 출신인 장원만과 그의 노비 진내, 근내, 석이, 백성 이영생, 김천용, 역자(驛子) 김영기 등 십수 명의 군도(群盜)가 범인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체포된 이들은 모두 교형에 처해졌고 가족들은 노비가 되었다. 세종 치세는 가장 안정적인 시기로 알려져 있다. 그런 시대에 군도의 방화로 2천 호가 소실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예외적인 것인가?

2.

절도 3범과 강도는 각각 교형과 참형에 처하는데, 사형의 경우 왕에게 반드시 보고하여 재가를 받아야 한다. 조선전기 실록 중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은 이 원칙을 제법 충실히 지켰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세종 연간의 절도, 강도범의 참형, 교형에 관한 자료를 연도별로 정리한 것이다. ‘절-교’는 절도 삼범(三犯)으로 교형이, ‘강-참 ’은 강도로 참형이 확정된 경우다.

세종 33년간 절도로 교형에 처해지는 경우는 96명이다. 한 해 평균 약 3명이다. 그런데 교형과 참형의 수는 1447년부터 급증하므로, 1419년부터 1446년까지 28년 동안 25명에 지나지 않는다. 1년에 채 1명이 채 되지 않는 것이다. 교형에 처해지려면 체포되어야 하고, 체포된 경우 중 삼범이라야 한다. 실제 절도 발생 수에 비해 체포된 자는 적었을 것이고, 그 중에서 또 삼범은 더욱 희소했을 것이다. 여기에 잦은 사령(赦令)으로 과거 범죄가 말소되는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실제 삼범으로 교형에 처해지는 경우는 드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강도로 참형에 처해지는 경우는 절도-교형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세종 33년간 총 772건으로, 1년간 평균 약 22명이다. 그런데 강도-참형의 경우도 1447년부터 그 숫자가 급증한다. 곧 1447․1448․1449년 3년 동안 강도-참형의 경우가 439명으로 전체의 57%를 차지한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년 평균 146명이다. 나머지 28년 동안은 333명이다. 1년에 평균 약 12명이다. 이 역시 적은 숫자는 아니다. 강도-참형의 경우, 절도-교형이 같은 기간 연간 1명이 채 되지 않았던 것에 비해 12배 이상 많았던 것이다.


절도, 강도가 무리를 이룬 경우를 군도라고 한다. 대개 3명 이상은 군도로 본다. 다음은 󰡔실록󰡕에서 세종대의 군도 발생 건수를 뽑아 정리한 것이다. 강도의 출현 수와 참형에 처해진 수를 ( ) 안에 표시한다. (5)이면 출현한 강도가 5명이거나 참형 당한 강도가 5명이란 뜻이다. ( )가 10개이면, 강도 출현 혹은 참형 당한 경우가 10번이라는 의미다. 만약 군도 출현에 대한 서술이 있다면 (χ)로 표시한다. 여러 차례일 경우, (χ1) (χ2) (χ3)의 숫자로 표시하고 아래에 출현 지역을 간단히 밝힌다.


위 표는 실제 발생했던 군도 전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1444년 10월 19일 김종서(金宗瑞)는 40여 명의 군도가 토산(兔山)에 있는 경성부사(鏡城府使) 김후(金厚)의 첩의 집을 포위하고 여자와 노비들을 협박해 재산을 깡그리 빼앗고 비녀(婢女)까지 죽인 사건을 언급하며 이런 사건이 자못 많다고 말한다. 이 사건은 김종서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실록󰡕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실록󰡕의 공식 기록은 실재했던 사건의 일부를 반영할 뿐이다.


군도의 활동 중 규모가 큰 경우를 몇 들어보자. 1444년에는 경기, 충청, 황해도와 개성부(開城府)에서 ‘무리를 지어 강탈하는 도적’ 약 3백 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이 모두 체포된 것도 아닐 것이고 또 일부 지방의 군도에 불과하니, 전국적으로는 훨씬 더 많은 군도가 활동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 1444년의 대대적인 체포에도 불구하고 1446년에는 평양 대성산에는 군도 40여 명이 1447년에는 개성 청석동(靑石洞)에 근거를 두고 군도 수십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성산의 군도는 40여 명이 체포됨으로 인해 그 주력은 붕괴되었지만, 나머지 일부는 개성부(開城府) 청석동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3.

15세기에 만들어진 각종 제도는 기본적으로 비사족(非士族) 양인과 천민의 노동력 및 노동생산물에 대한 사족의 수탈을 목적으로 한다. 그 수탈은 언제나 ‘과잉’으로 현실화되었다. 그렇다면 이 제도의 주체가 아닌 대상, 곧 다시 말해 노동력과 노동생산물을 수탈당한 사람들은, 제도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던 것인가? 민(民)은 늘 유동(流動)하거나 유동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유동하는 민(民)을 모태로 절도․강도가 출현하고, 이들은 다시 군도로 응결(凝結)하였다. 군도 역시 분배의 한 방식이다. 사족의 수탈은 국가의 법과 제도에 입각한, 권력적 강제에 의한 분배다. 절도와 강도는 사적 폭력의 강제에 의한 분배다. 소규모의 절도와 강도와 달리 군도의 약탈 대상은 부호이고, 그 부호란 대부분 사족이다. 조선사회에서 사족의 재산은 본질적으로 수탈물이다. 군도들은 수탈로 인해 사회에서 유리(流離)된 자들이므로, 사족에 대한 수탈은 원래의 자신의 노동결과물을 되찾는 것이다. 곧 폭력적 강제에 의해 수탈당한 것을 다시 분배하는 행위다. 이런 수탈 사회에서 군도는 조선조 전체를 통해 항시 존재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세종 시기의 군도만 다루었지만, 문종에서 선조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군도는 폭증하고 있었다. 홍길동과 임꺽정은 그 중 특출한 존재일 뿐이었다. 군도는 임진왜란 중에도 있었고, 조선후기 내내 존재했다.


한국사를 덮고 있는 강력한 내셔널리즘과 지배계급 중심의 서술을 걷어내고 사태 자체에 집중하면 전혀 다른 인간과 사회가 보일 것이다. 민족을 주어로 삼는 역사, 지배계급의 정치사와 제도로서의 경제사를 벗겨내면, 현실을 살아야 했던, 정치와 제도의 대상이 되었던 수많은 인간들의 삶이 보일 것이다. 군도는 그 중 한 가지 경우일 뿐이다. 모든 민(民)이 유동하거나 군도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수탈을 당하면서도 적응하고 저항하면서 생존을 도모했던 리얼한 상황은 어떤 것이었던가. 지배계급의 수탈에 대응하는 민의 구체적인 삶의 실태를 찾아 구성하는 것은 흥미로운 과제가 아닐까?


강명관(독립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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