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된다는 것 / 김동규

무엇을 기준으로 어린이와 성인을 가를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손쉬운 대답은 나이다. 지금은 스무 살 정도면 성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은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코흘리개 어린이가 더 어른스러운 경우도 있고, 오십 줄이 넘었는데도 치기가 줄줄 흐르는 어른도 많다. 나이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 외에 어떤 계기, 경험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성인식’이라는 게 있었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존재했는데, 이 성인식을 잘 통과했느냐에 따라 아이로 남게 될지 성인으로 도약할지가 결정되었다. 언젠가 TV 다큐멘타리에서 본 열대지방 어느 부족의 성인식이 내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아들이 성인식을 치를 나이가 되자 풍성한 잔치가 벌어진다. 영아사망률이 높은 상황에서 성인 나이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축복받을 일이다. 그런데 이 성인식의 하이라이트는 한밤중에 거행된다. 다 자란 아들의 손을 잡고 아빠가 밀림으로 들어간다. 아이는 하룻밤을 홀로 그곳에서 지새워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 시련을 통과해야만, 어엿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맹수가 빈번히 출몰하는 위험지역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줄곧 보호받으며 지냈던 아이가 감당하기엔 결코 쉽지 않은 시련이었을 것이다.


성인식에는 통상 이런 종류의 시련을 통과하는 입문 의례가 존재한다. 낯설고 고통스러운 입문(入門) 과정을 통해서만 성인이라는 신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런데 신화 속의 영웅들은 거의 모두 이런 입문 과정을 거쳐 영웅으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신화 속 최고의 영웅인 헤라클레스는 12가지 시련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 것을 보면, 한 사회가 숭상하는 이상적인 인물인 영웅, 성인(聖人) 등은 성인(成人)의 최종 목적지라고 볼 수 있다. 막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최소치를 겨우 겸비한 셈이자 최대치로 나아가는 출발선에 선다는 뜻이다.


장-조제프 구에 따르면, 영웅이 겪는 시련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이며, 오이디푸스에게 수수께끼를 냈던 스핑크스의 외모가 시련 내용을 상징한다고 한다. 스핑크스는 머리는 여성이고, 몸뚱아리는 사자인데, 독수리 날개까지 달고 있는 괴물이다. 여기에서 여성은 성적 유혹을, 사자는 육체적 폭력이 수반된 시련을 뜻하며, 독수리의 날개는 지적으로 해결해야 할 곤혹스런 난관을 빗대고 있다. 시련을 통과하면, 피시험자는 각각 절제, 용기, 지혜라는 덕을 겸비하게 된다. 이런 시련을 거쳐야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모든 이가 일상사를 팽개쳐두고 시련을 찾아 나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칸트는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그가 보기에, 미성숙한 아이는 타인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이가 성인이 된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칸트는 ‘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는 라틴어 경구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이성과 판단을 믿으라고 권한다. 처음부터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며, 손수 범한 실수와 오판을 통해 점차 지혜로울 수 있다. 언제까지 부모나 선생 같은 기성 세대에 의존할 수는 없으며, 그들로부터 독립할 때에야 비로소 성인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이성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용기를 가지고 이성을 계발하고 독립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지만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같은 나이 대비 과거 사람들이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현상도 흥미롭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자연스레 유년기와 청소년기가 늘어나서일까? 예컨대 70년대 대학생과 2020년 대학생의 모습은 너무 다르다. 아마 일제 강점기 대학생은 더 달랐을 것이다. 윤동주의 조숙한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토록 강렬한 추억과 향수를 가질 수 있었는지가 매번 궁금했다. 예컨대 「사랑스런 추억」이란 작품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29세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시인 동주에게 ‘잃어버린 젊음’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까? 심지어 「길」이란 작품에서는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입문 의례나 칸트적 성인관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다. 동주의 어른스러움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키에르케고어는 『사랑의 역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린아이나 젊은이의 특성은 ‘나는…나는…나는…’이라고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의 표지는 … ‘나’가 ‘그대’나 ‘당신’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의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하는 욕구다. … 오오, 나의 독자여. 내가 하는 말은 그대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영원한 분은 나를 향해, ‘그대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런 말이다.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라는 것이 젊은이의 태도라면,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당신이 말한다’라는 것이 성인의 태도다. 타자(타인/양심/신)의 목소리를 경청하여 자기 삶을 갈무리하려는 것이 어른스러운 태도다.


한편으로 동주의 시에서 주어가 ‘나’로 설정된 문장들이 무척 많다. 기성세대로부터 막 독립한 젊은이다운 모습이다. 그렇다면 그의 어른스러움, 성숙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아마 「무서운 시간」을 거쳤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 한번도 손 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 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 //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나를 부르지 마오.”

죽음의 소리를 듣는 무서운 시간을 통과하면서 동주는 어른스러워졌다. 동주의 무서운 시간은 한밤중 밀림에서 성인식을 치르던 아이의 시간과 유사하다. 그러나 동년배에 비해 어른스럽다는 것이지, 동주의 시는 여전히 젊다. ‘나’의 배후에서 나를 있게 해준 존재까지는 미처 시선이 미치지 못하거나 그런 존재와의 만남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전. 열대의 성인식 마지막 장면에서 아빠는 아들을 홀로 남겨 두고 떠난 것 같았지만, 실은 먼발치에 숨어 무기를 들고 밤새 아들을 지켰다. 숨어서 누군가의 성인 됨을 지켜주는 사람, 그가 바로 진짜 성인이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학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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