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던 이방인, ‘섬’에 뿌리 내리기까지(2) / 김보슬

나: 모국어인 영어와 이탈리아어 중 어떤 언어로 쓰는가?


메리: 대체로 영어로 쓴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탈리아를 소개할 수 있기도 하고, 머리를 써야 하는 일에 모국어가 편안해서 그렇다. 마리아 그라마티코(Maria Grammatico)와 함께 쓴 『Bitter Almonds』는 손수 이탈리아어로 번역까지 한 경우였다. 에세이를 포함한 몇 편의 소품은 처음부터 이탈리아어로 썼다.

나: 첫 책의 제목에 페르세포네(Phersephone)를 넣은 이유는? 그 밖의 저서들과 칼럼도 소개를 부탁한다.


메리: 알다시피 페르세포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명계(冥界)의 여왕이다. 또한 농사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인데, 하데스는 데메테르로부터 그 딸과의 결혼을 승낙받지 못하자 몰래 페르세포네를 저승으로 훔쳐갔다. 딸을 잃은 상심에 데메테르는 일손을 놓아버려 지상의 모든 작물들이 말라죽게 되었다. 보다 못한 제우스가 하데스를 설득하여, 페르세포네는 1년 중 넉 달은 남편 곁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어머니 곁에서 지낼 수 있게 되는데, 데메테르는 그가 담당하는 일의 특성상 그리스 올림푸스에 살지 않고 시칠리아에 살았으니, 그의 딸 또한 그랬을 것이다. 페르세포네가 저승에 가 있는 동안 데메테르는 그리움에 젖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는 말하자면 겨울이 오는 것이다. 딸이 돌아오면 지상에는 다시 꽃들이 피고 나무가 열매를 맺기 때문에, 페르세포네는 사실상 '씨앗'을 의미한다. 대지의 풍부한 생명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시칠리아를, 그래서 페르세포네의 섬으로 비유했다. 그리고 시칠리아를 고향으로 여기는 것이 페르세포네와 나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On Persephone's Island』에는 시칠리아에 당도하기까지의 여정이 포함돼 있고, 외지인으로서의 낯선 시선이 현지인으로서의 애착으로 변모하는 내 삶을 기록했다. 『Pomp and Sustenance: Twenty-five Centuries of Sicilian Food』는 영국에서는 『Sicilian Food』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는데,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시칠리아 음식에 얽힌 사연들과 조리법을 소개했다. 『Bitter Almonds』는 함께 책을 쓴 마리아의 어린 시절 회상을 통해, 시칠리아 수녀원 방식으로 만드는 디저트류 레시피와 그 주변의 일상을 함께 엮은 이야기다.

그리고 『Travels with a Medieval Queen』은 콘스탄체 공주가 1194년부터 1195년까지 약 1년에 걸쳐 남편(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과 함께 시칠리아를 여행했던 내용을 복원하여, 시칠리아 요리의 역사를 돌아본 내용이다. 어쩌면 그리스, 로마, 비잔틴, 아랍, 게르만 등 이민족(異民族)의 무수한 침략과 지배를 받아오면서 다양한 레이어가 축적되었을 여기 음식 문화의 연대기쯤 되겠다. 90년대 중반부터 한 20여 년간 뉴욕타임즈 여행 섹션 같은 데에 칼럼을 쓰기도 했는데, 그들은 나와 남편 몫까지 경비를 대 주며 각국을 다니게 했다. 그런데 우리는 농장일이 우선이라, 칼럼은 여력이 될 때마다 썼기 때문에 실제로 기고한 편수는 많지 않다. 수필 또한 음식을 다룬 것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가끔 발표했다.


[사진 1-4. 메리 테일러 시메티가 쓴 책들]


나: 당신의 책을 읽으며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와 같은 작품을 떠올렸다. 장소에 관한 서술인 점, 그리고 글쓴이의 개성있는 포착을 통해 한 문화를 생생하게 채색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채트윈은 아르헨티나에 머무는 동안 만난 약 백여 명의 독특하고 고유한 인물들을 프리즘으로 삼았다. 당신은 '사람들이 무엇을 요리하고 먹느냐, 왜 그걸 먹게 됐느냐' 하는 물음을 통해 시칠리아를 들여다보지 않았겠는가. 그 선택으로 인해 당신만이 더 선명하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있는가.

메리: 기대한 대답이 아니겠지만… 과연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그저 이곳이 시칠리아이기 때문에 식문화에 호기심을 쏟는 일은 당연했다. 먹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곳이니까. 여기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래서 그것이 자연스레 내 관점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장소였더라면, 음식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음식을 소재로 글을 쓰는 일이 권태롭다.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80년대는 지금과 사정이 많이 달랐다. 이제는 뉴욕의 동네 마트에서도 간장과 참기름을 구할 수 있지 않지만 그때는 가정이나 음식점에서 외국 식재료는 찾기 드물었다. 맛문화권들이 서로 단절돼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줄리아 차일드(Julia Child) 같은 요리연구가들이 방송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 사람들이 이국적인 맛과 조리법에 관심을 보내게 됐다.

난 사실 그런 수요에 대한 인지 없이,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썼을 뿐이다. 시칠리아 음식은 국제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마침 때를 잘 만나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었던 것인데, 여기만의 일상을 상상해야 했을 터이다. 음식은 대체로 한 문화를 읽는 돋보기이지만, 시칠리아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미국 독자들에게서 여러 번 연락을 받았다. 내 글에 언급된 채소나 향신료를 내가 어디에서 구했는지를 물었지만, 당연히 그건 우리 집 텃밭이거나 우리 동네 상점이었다. 지금은 수입 재료를 구하는 것이 쉬워진 대신, 점점 빠른 유행에 민감해지고 있다. 패션처럼 말이다. 나는 이제 그런 변화가 별로 재미가 없다.

나: 여행의 의미와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 한때는 여행이라 하면 명승지나 기념비적인 곳을 관광하는 것을 떠올렸지만, 요즘엔 최대한 현지인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도 포함한다. 당신은 시칠리아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는데, 채트윈과 같은 여행 문학가로 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행자의 시선이 아직 남아 있는가?


메리: 채트윈에 비교되다니, 영광이다. 하지만 내가 여행기록을 남기던 시절을 떠올려 보아도, 그것을 여행 문학이라도 여겨 본 적은 없다. 일단, 내가 과연 '문학가'인가? 그렇다고 할 자신이 없다. 그리고 어떤 꼬리표가 붙는 것은 부담스럽다. 특정하게 분류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 이해한다. 여행 문학과 연결 짓는 일은 삼가겠다. 그렇지만 장소를 경험하고 서술하는 일이 가지는 특성을 떠올려 볼 때, 레슬리 블란치(Lesley Blanch)와 같은 여성 여행 문학가들이 연상되기는 한다.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공간을 여행하는 여성 작가들에게 제일 극복 대상이 되는 것은, 여성의 육체가 머물러야 할 곳은 집안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여성이 얼만큼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라고 하더라. 당신에게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었나.


메리: 여성의 주체성 확보에 더 안간힘을 써야 했다거나 하는 기억보다는, 이방인에 대한 시칠리아적인 두 가지의 극명한 잣대 사이에서 혼란스럽던 기억이 더 생생하다. 60년대에 여기 처음 왔을 때, 여자는 낯선 곳에 함부로 가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나는 이곳 사람들에게 미국에 적응을 못해서 도망친 여자 쯤으로 보였던 것 같다.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남다른 시선이 따라다녔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들이 나에게 더 관대했던 적도 많다. 시칠리아인들은 인정이 넘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외부인에게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점에서는 매정하기도 하다. 내부인끼리만 출입하는 마음의 울타리 같은 것이 있다. 그렇지만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약자이기 때문에 그 울타리를 열어준 듯하다. 시집을 온 여성은 돌아갈 곳이 있는 여성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 『On Persephone's Island』에서 팔레르모 저잣거리를 묘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팔레르모에서 한 달 가량 지냈었는데, 유럽보다는 남미에 있는 기분이었다. 집집마다 발코니에 빼곡하게 널어놓은 울긋불긋한 빨래들이 만드는 경관에 홍콩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보았던 도시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면서 읽었는데, 어수선한 골목들은 정말 긴 골목을 걷는 듯한 만연체로 묘사되어 있더라. 처음 시칠리아로 오는 기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세부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특별히 의도하는 문체가 있는가?


[사진 5. 팔레르모의 주택가]

메리: 의도된 문체는 아니었다. 애써 작풍을 고안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리듬에 맡겼다. 음악을 들으면 머릿속에 자연히 생각이 떠오르거나, 저절로 춤이 춰지는 것처럼. 글을 쓸 대상을 생각하다 보면, 화답처럼 밀려오는 리듬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것이 마침내 찾아오면 거기에 나를 맡겼다. 과거의 장면을 복원할 때에도, 불완전한 기억을 윤색하기 위해 애쓴 적은 없다. 쓰려고 하면 되살아나는 시력이 있다. 그 이상으로 정밀하게 균열을 메우려고는 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기억력이 좋기는 하다. (웃음) 말하자면, 직관에 의존하곤 한다. 나는 문학적인 표현을 중시하지만, 나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믿지 않는다. 사실적인 글에 좀 더 자신있기 때문에, 거기에 의지할 따름이다. 일부러 감각적이고 세련된 문학작품을 쓸 재주도 없거니와, 구태여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 하루 중 언제 글을 쓰는가? 컴퓨터로 쓰는가?


메리: 주로 아침이다. 컴퓨터로 작업한다. 쓸 시간을 따로 내는 게 참 어렵다… 아이들 어릴 적 학교 때문에 팔레르모 시내에 살던 때가 그나마 나았다. 애들 졸업시키고 농장에 와서 살면 더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농장일이라는 게 하염없더라. 시간에 더 쫓기게 됐다. 미술가인 아들 내외랑 두 손자가 지금은 뉴욕에 살지만, 3년 동안 농장에서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적이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 문학과 음식에 관한 에세이 다섯 편을 이탈리아어로 쓴 시기가 바로 그때이기도 했지만. 물론, 마무리를 지으려고 일부러 로마에 다녀오기는 했다. 그리고 여전히 짬을 내야 쓸 수 있다.

첫 번째 책을 내던 시기에는 컴퓨터가 흔치 않았다. 출판사에서 사본 다섯 부를 가져오라길래, 종이 뒤에 대는 ‘먹지’만 가지고서 그 일을 했다. 너무 힘들었고, 다시는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On Persephone's Island』가 출판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컴퓨터를 장만한 것이다. 『Pomp and Sustenance』도 초안까지만 손으로 썼고, 그 후로는 아예 초안부터 컴퓨터에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손에 쥐가 나더라도 다시 손으로 써 볼 셈이다. 일단 손으로 적은 것을 컴퓨터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연히 편집과 탈고를 할 수 있게 된다.

나: 조만간 출판 계획이 있나.


메리: 뭔가 꾸준히 쓰고는 있는데, 그것을 책으로 내게 될지,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건강이 하루 하루 달라지기 때문에 뭔가를 기약한다는 게 두려워졌다.

나: 음식을 소재로 한 집필은 이제 지양하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 그리고 앞으로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메리: 과거에 쓰다가 미완으로 남겨둔 수필이 여럿 있는데, 일단 그것들을 마저 써야겠다. 새로 시작할 글들은, 내가 속해 있었던 풍경들을 돌아보는 것이면 좋겠다. 시칠리아에 뿌리를 내린 미국 출신 이민자로서의 나를 어떤 문화적, 경제적, 역사적, 생태적 지평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말이다. 이건 좀 메타(meta)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건축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대지를 공사하고, 그 주변 환경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런 종류의 글을 쓰고 싶다.


[사진 6. 메리와의 대화]

어느 봄, 총성 없는 전쟁과도 같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다. 그 길의 끝은 어쩌면 아르헨티나가 될 것 같은 예감으로 인해, 여행가방에 책 한 권을 보탰다.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빛바랜 자켓은, 나의 여행도 마치 그 너덜너덜한 모습처럼 모험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러나 그 모험을 하기 위한 나의 길은 파타고니아 대신, 돌연 시칠리아를 향해 굽었다. 비로소 우연함이 드러나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언제나 그렇듯, 모험과 도전은 내가 왜 그것을 포기하면 안 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낯선 이곳에 내가 왜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오직, 내 앞에 다가온 사람들에게서 답을 발견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렇게 메리를 만났다. 여운이 길게 남는 만남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삶을 응시해 보려고 한다. 고국에서 도망친 여자라는 오해와, 나고 자란 곳으로부터 고립된 외로움 속에서, 섬처럼 청춘의 한 부분을 보냈을 여인. 그러나 삶에 대한 용기와 온기로 다리를 지어, 그 섬에서 걸어나온 그는 페르세포네의 고향을 공유하게 되었다. 떠나온 곳에 건네는 메아리와도 같은 책을 썼다. 글은, 그의 삶 한 귀퉁이를 떠받쳤을 것이다. 자라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틈나는대로 쓰다 멈추다, 또 쓰다 고치다 하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을, 아직은 쓰라린 담금질을 통해 작가가 되는 중이었을 젊은 메리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본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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