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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던 이방인, ‘섬’에 뿌리 내리기까지(1) / 김보슬

메리는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농장 작업용 차를 끌고, 어느 주택가로 나를 데리러 왔다. 현관을 열고 트렁크 하나를 영차, 하고 내놓는 순간, 그도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인자한 웃음을 띤 그는 짧은 은발이 고왔고, 지적이고 용감한 여성의 인상을 주었다. 유학 시절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말에, 홀연히 나타나 나를 차에 싣고 교외를 향해 달리던 어느 할머니 은사가 떠올랐다. 그래서 첫인사에 담은 나의 막연한 호감은 꽤 순도 높은 반가움이었다. 그는 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빠르게 차를 몰았다. 나의 스승처럼, 터프한 운전자 스타일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유입되는, 차의 속도가 가르는 거친 바람에 그의 은발이 사정없이 휘날렸다.


[사진 1. 메리 테일러 시메티, 사진 출처_www.bbc.co.uk/food/programmes/b067wb3c]

그해 나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에서 메리의 일가가 운영하는 농장 Bosco Falconeria에서 3주간 지내며, 함께 먹고 자며 일했다. 유럽의 시골 생활과 친환경적인 삶을 체험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을 뿐, 특별한 인연에 대한 기대 때문은 아니었다. 팔레르모(Palermo)에 체류하던 중 60km가량 떨어진 Bosco Falconeria로 연락을 보냈고, 마침내 방문을 허락받았을 때, 메리의 딸은 말했다. “어머니가 시내에 볼일 보러 나가는 날, 그 차를 타고 함께 오세요.”

나는 내 숙소의 주소를 알려 주고, 노부인과 만날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작가’ 메리와의 만남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메리 테일러 시메티(Mary Taylor Simeti)는 시칠리아 음식 칼럼니스트이자, 농장 경영인, 작가로 활동하며, 집필과 강연을 해 왔다. 194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가 남학교였던 당시 여학교로 협력하였던 레드클리프 대학(Radcliffe College)에서 고전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자신의 전공 분야보다 공익활동과 국제개발 등에 뜻이 있음을 깨닫고, 1962년 졸업과 동시에 유럽의 극빈지역이었던 시칠리아로 떠났다. 사회운동가 다닐로 돌치(Danilo Dolci) 밑에서 1년 정도 자원봉사를 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나서 발걸음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시칠리아의 물과 흙으로 반백 년 이상의 나이테를 빚어온 그를 이제 ‘Siciliana(시칠리아의 여인)’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간, 이방인으로서의 여행과 삶을 그린 자전적 에세이 <On Persephone’s Island: A Sicilian Journal>, 중세부터 현대까지의 시칠리아 음식 문화를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낸 <Travels with a Medieval Queen>, 현지 제과명인의 유년기를 구술채록 하면서 시칠리아 레시피를 함께 엮은 <Bitter Almonds: Recollection and Recipes of Sicilian Girlhood> 등의 책을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지에서 펴냈고, 뉴욕타임즈나 파이낸셜타임즈 등의 매체에 수 년간 음식과 여행에 관한 칼럼을 기고했다.

나는 낮에는 밭일을 거들며 애호박보다도 작은 수박들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수박덩굴을 일일이 손으로 정리하여 트랙터가 지나갈 길을 내고, 올리브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치고, 아보카도 나무를 북주고, 밤에는 침실로 돌아와 메리가 쓴 책들을 읽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의 글에서, 직장을 버리고 외국으로 떠나온 나의 여정이 갈구하던 용기와 온기를 발견했다. 다른 사회와 문화에 접속할 때 발생하는 낯섦을 환영하고, 그것 때문에 주눅 들지 않으면서 오히려 삶을 경이로 깃든 공간으로 재창조하려는 노력 말이다. 그가 나에게 이븐 바투타(Ibn Battuta),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 그리고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와 같은 여행 저술가로, 그들만큼의 크기로 다가왔다.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이방인인 나에게 몇 십 년 선배 이방인의 기록이 얼마나 소중하고 진솔하게 읽혔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작가로서의 메리와 만나기를 원했고, 인터뷰를 청했다. 우리의 오랜 대화 속 몇 대목을 아래에 옮긴다.

[사진 2-5 Bosco Falconeria 전경]

나: 왜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나.

메리: 대학 마칠 무렵, 국제개발 분야에서 활동하기를 희망했고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다. 고교 졸업반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내 대학 진학과 동시에 피렌체로 가서 사셨다. ‘빌라 메르체데(Villa Mercede)’라는 학교 이사장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운영을 어머니가 맡게 된 것이다. 1968년도에 문을 닫을 때까지 10여 년 동안 운영하셨다. 나는 대학 때 어머니를 만나러 피렌체를 몇 번 다니면서, 사회운동가 다닐로 돌치와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을 먹게 됐다. 졸업을 하자마자 피렌체에 들러 어머니를 잠시 뵙고, 시칠리아섬의 팔레르모 시(市)로 향하는 여정을 기록한 대목은 『On Persephone’s Island』의 도입부이기도 하고, 외국인 여성작가와 이주여성들의 이탈리아에 관한 회고록을 묶어 낸 『Desiring Italy』(1997년 출판)에도 수록돼 있다. 여기에 올 당시, 미국 사람들이나, 시칠리아 사람들이 하나 같이, 젊은 여성이 혈혈단신 고국을 떠났다며 정신 나간 짓이라 했다.

[사진 6. 메리의 책 『On Persephone’s Island』]

그러면서도 시칠리아 사람들은 나를 가엾게 여기고 더없이 환대해 주었다. 대학에서의 전공은 내가 국제사회에서 하고 싶었던 일에 별로 도움이 안 됐다.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현장 경험을 쌓아서라도 경력을 만드는 수 밖에 없었다. 돌치 센터는 사실, 내가 막연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전문적인 인력으로 운영되는 곳이었기에 나 같은 비전문 자원봉사자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는데, 마침 영어 인력의 충원이 긴급했던 바람에 내가 거기 들어간 것이다. 운이 좋았다. 일을 하다 보니, 차일피일 귀국이 지연됐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돌아갈 집도 없었다. 미국에 어머니도 안 계셨으니. 그러다가 센터를 자주 오가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결혼을 했다. 우리 부부는 결혼 후 다른 나라에 가서 사회사업을 하기로 계획했었는데, 남편의 형이 갑작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가업으로 이어오던 농장의 운영이 차남인 남편 몫이 됐다. 그래서 여태 정착하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내 삶은, 대체로 계획을 망치고 즉흥적으로 돌아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흘러간 부분이 많다.

나: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했나.

메리: 어려서부터 글쓰기는 재밌었다. 대학에 가서는 논술을 대단히 비중 있게 가르치는 레드클리프의 학풍 때문에 내내 상당한 양의 글쓰기 훈련을 했다. 하지만 책을 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나에게 그렇게까지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특별한 이야기가 쌓이지 않고서 섣불리 덤비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버릴 수 없었다. 1980년, 그러니까 서른아홉 살 때, 출신 대학의 동문회가 주최한 시칠리아 답사에 현지 가이드로 섭외되어 이곳의 지리, 역사, 문화를 소개한 것을 계기로, ‘내가 이곳을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에 비로소 이르렀을 때까지 말이다. 책을 쓰기 시작한 동기는 작가로 데뷔하고 싶은 욕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떠나온 뒤 영영 돌아가지 않은 고국의 친지들과 친구들에 대한 아쉬움, 미안함에서 출발했다. 이메일이 없었고, 국제전화는 아주 비쌌기 때문에, 나는 고향으로부터 거의 차단돼 있었다. 오랫동안 이별하고 지낸 그들에게 내 근황을 전하는 심정으로 쓴 첫 번째 책 『On Persephone’s Island』는 1982년에 쓰기 시작하였고, 1986년도에 출판되었다. 처음 원고를 미국에 보냈을 때 ‘이것이 도대체 무슨 장르냐, 이런 게 어떻게 책이 될 수 있느냐’ 했던 출판사의 회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니가 한 출판 에이전트를 주선했다. 이 에이전트는 내 글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던 모양인지, 상당히 열성적으로 비전을 제시했다. 급기야 나를 만나러 직접 이탈리아로 날아왔다. 나는 그와의 만남에 응했지만, 출판이 결국 성사가 안 돼도 그만이라고 생각했고, 정작 그 역시도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계약서에 내 싸인을 받은 그는 반쯤 농담으로, “출판까지 1년 넘게 걸릴 터이니 다음 책을 쓰고 있을 것”을 요청하며 돌아갔다. 거의 2년이 지나 그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책이 출판되던 시점에는, 오히려 뉴욕 타임즈 1면에 실릴만큼 주목을 받았다. 남편과의 만남도 그렇고, 이 에이전트와의 만남 또한, 나는 내 자리에서 가만히 있다가 우연히 ‘발견당한’ 것 같았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의외의 방향으로 삶이 진전됐다.

(계속)

[사진 7. 밭일을 마치고 돌아와 책을 읽던 농장의 방, 달빛]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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