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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디 / 김동규

아이가 레고 조각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한참 후에 아이는 자기가 만든 것을 로봇이라며 자랑한다. 얼추 레고 집적체의 외양이 만화 속에 등장하는 로봇과 엇비슷하다. 로봇 디지털 사진을 고배율로 확대했을 때 드러나는 픽셀 뭉치 모양 같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로봇과 다른 점이 있다. 레고 조각으로 조립해서인지 거의 움직일 수 없다. 로봇보다 훨씬 더 뻣뻣하다.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유연한 몸동작을 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수많은 관절을 로봇의 몸 구석구석에 삽입하면 된다. 우리의 몸이 유연하고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 관절 덕분이다.


요즘 사람치고 진화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다윈의 진화 개념은 진보라든가 발전이랑은 전혀 무관한 것이다. 차라리 예측불허의 변전에 가깝다. 진화론의 양대 주축은 ‘공통 조상’과 생명의 ‘변화’다. 지상의 숱한 생명체들이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공통 조상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하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생명체들이 가지를 치고 나왔고, 지금도 계속 변화되는 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 내용이다. 추상적인 논리 수준에서 말한다면, 진화론은 ‘동일성과 차이’를 뼈대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같음과 다름’이라는 이 상반되고 모순적인 두 가지 것을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관절이나 마디 등이 좋은 후보다. 관절은 신체의 부분들을 이어주면서 동시에 구분해 준다. 그것은 나누기만 할 뿐, 결코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차이화의 활동이 아이러니하게도 연속적 동일성을(그것도 유연한 동일성을) 확보해 준다. 역으로 같은 것을 접고 나눔으로써 특정 마디 부분이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또한 관절의 틈새, 사이를 통해서 자유로운 방향 전환이 가능해진다.


생명은 ‘하나’에서 시작했다. 지금도 모든 생명체는 그 하나와 모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무수한 꺾임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의 종과 개체들로 분화되었다. 지금도 그 분화는 진행 중이다.


개체는 하나의 생명 전체의 마디다. 티끌처럼 아주 작은 마디다. 개체가 된다는 것은 마디를 이룬다는 뜻이다. 마디의 경계를 이루는 데에서 개체가 시작된다. 그 경계 ‘사이’에서 생명의 변화가 일어난다. 한편에서는 마디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개체가 출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른 마디를 내 마디의 부분으로 만드는 것을 통해 새로운 개체가 출현하기도 한다. 몸을 가진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의 몸을 먹는다. 다른 마디를 내 마디로 병합하는 일이다. 병합이 매번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를 삼켰는데, 배탈이 나거나 외려 삼킨 것의 먹잇감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마디를 유지한 채 삼킨 그것과 공생하는 경우도 있다.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의 세포내공생설(endosymbiosis)은 그런 공생에 바탕을 둔 이론이다.



관절은 둘을 구분해 주고 있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이어진 채 굽힐 수 있다. 이런 굴절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마디들이 모이고 나뉘는 관절은 ‘고통의 발원지’다. 까마득한 과거에 타자를 만나 꺾인 곳이다. 무엇과 만나 어떻게 꺾였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마다 뼈마디가 시리거나 쑤신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분명한 것은 꺾였지만 분리되지는 않도록 봉합되었다는 것이다. 마디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마디야말로 우리에게 사방팔방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 준다. 관절 없는 사지를 떠올려 보라. 얼마나 뻣뻣하게 굳어 있는가? 관절은 고통스러운 자유의 회합 장소다.


양립 불가능해 보이지만, 상반되고 모순되는 것들이 동거하는 경우가 있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동전의 앞뒤처럼 딱 붙어있다. 언어의 측면에서 보면, 역설이 그런 경우다. ‘어떤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인들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참말일까 거짓말일까? 이건 자기지칭의 역설이라 불리기도 한다. 두 개의 거울을 맞대놓으면 무한히 이미지들이 이어지듯이, ‘자기’는 지시된 자기의 뒷면에 하염없이 남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잉여의 자기가 바로 타자적인 ‘생’이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험난하게 살아온 인생을 시쳇말로 ‘굴곡진 인생’이라 말한다. 그건 굵직한 장애물들에 부딪혀서 수없이 꺾인 생이다. 꺾일 때마다 온몸에 참기 힘든 고통이 스몄을 것이다. 많은 경우 이 굴절 현상 때문에 인생은 망가진다. 사지가 절단되듯 생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마디의 관절이 되지 못한다. 반면 몇몇 사람들은 생의 풍파를 만나 꺾일 때마다, 꺾인 자리를 새로운 관절로 만든다. 관절로 만들고 나서는 이전보다 더 자유롭고 능수능란해진다.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사람보다 굴곡진 생을 살아온 사람이 훨씬 더 믿음직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듯이 삶이 물처럼 부드러워진다는 것은 굴절의 고통을 통해 마디의 디테일을 형성함으로써 뻣뻣해진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원튼 원치 않든, 인생길은 그리 평탄하지 않다. 철학자 박동환에 따르면, “변함없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인생은 없다. 지향하던 목표가 도중에 꺾이고 다시 꺾이어 변형된 뜻밖의 결과가 나의 현재다.” 생의 굴곡진 능선에서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생은 꺾인 부위를 관절로 삼아 풍부한 몸짓과 다양한 모습을 뽐낸다. 얄밉고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다. 변화무쌍한 생에 올라탄 이상 속수무책인 것이 사실이다. 생의 롤러코스터를 즐기는 것 외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김동규(철학자, <철학자의 사랑법>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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