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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생각들 / 박성관

1.

5월초, 사변적 실재론 중 은유에 대해 강의할 일이 있어서 티모시 모튼의 󰡔Realist Magic󰡕를 펴보았다. 제목부터가 딱 내 생각이었지만, 거기서 읽은 “Aesthetics, perception, causality, are all almost synonyms.”도 짱이었다. 나는 모튼에 크게 공감하며 이 문장을 “감성적 활동, 지각, 인과성, 이 단어들은 모두 거의 동의어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또 실재론의 핵심이 은유 또는 마술에 있다는 생각에도 찬성한다. 모튼의 이런 생각들은 동조자를 구하기 쉽지 않은데, 그래서 나도 근 10년 동안 거의 발설하지 못해 왔다. 오늘은 모튼을 언급하며 시작했으니, 이와 공명하는 생각들을 한번 늘어 놓아보자. 그 과정에서, 내가 왜 모튼의 책 제목과 위 문장에 빙고!를 외쳤는지, ‘aesthetics’는 어떤 의미에서 ‘감성적 활동’이라 번역하는지 등이 자연스레 드러나주면 좋겠다.

2. 1 기호과정

‘perception’ 즉, 감지, 지각, 인지에는 일종의 깨달음이 수반된다. 기본적인 혹은 원초적인 판단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활동성 감각인 것이다. 내 앞의 상황을 거울처럼 비치기보다는 그 상황에 ‘촉발받음’과 그래서 ‘새로운 행동이나 태도를 취함’ 사이의 마음 상태 혹은 생각이다. 현재의 상황을 인지한 내 마음속 어딘가가 출렁였을 때(영어라면 moved, touched되었을 때), 나는 즉각적인 행동에 내몰린다.

2. 2 다른 존재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콘은 󰡔숲은 생각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른 종류의 존재가 우리를 보는(see) 방식, 그것이 중요하다. 다른 종류의 존재들이 우리를 본다는 사실이 상황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루나족(중부 아메리카의 원주민) 사람들은 잘 때도 엎드리지 말고 누워서 자라고 한다. 우연히 재규어가 스윽 접근했을 때, 엎드린 사람은 재규어가 먹이감으로 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얼굴을 바닥 쪽이 아니라 자기 위로 향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재규어는, 그 존재가 재규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존재라고, 자신과 같은 존재라고 본다. 이처럼 내가 나 아닌 존재에게 어떻게 간주되는가는 중요하다.

2. 3 기호과정

퍼스는 기호란, 어떤 존재(A)를 다른 존재(B)에게 나타내는 무언가라 정의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B는 어떤 기호(A의 능력이나 몇몇 측면을)를 통해 A를 인지한다. 여기서 ‘어떤 존재’와 ‘다른 존재’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다 포함된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는 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청각 이미지(예컨대 풀밭 위에 우뚝 서 있는 존재와 ‘나무’라는 소리)를 가지고 언어를 정의한다. 이럴 경우 언어는 첫째, 주로 내 앞의 상황을 비추는 것이며 둘째, (거의) 인간의 전유물이다. 반면 퍼스의 기호론은 인간 등의 특정 존재자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두더지도, 숲도, 쓰러져 죽은 나무도 모두 기호과정(semiosis)의 플레이어들이다. 그리고 기호는 [적어도 B에 대해서는] A의 능력이나 몇몇 측면 이외에는 A에서 모두 부재화시킨다. 그럼으로써 B가 A에게 새로운 행동을 하도록 몰아붙인다, 필연적으로. 어떤 존재가 A를 어떻게 보느냐(생각하느냐)가 상황을 변화시키니, 생각(생각함)은 행위와 직접 연결된다. 생각함이란 곧 기호과정이고 만물은 기호과정에 참여하니 만물은 당근 생각한다. 생각이 세상에서 흘러다닌다는 것 역시 당근이다.

3. 생각을 붙잡아

이 얘길 들으면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기뻐하며 이 아이디어를 붙잡지 않을까 싶다. 그는 생각한다는 일이 “실재인 ‘생각’을 붙잡는 일”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생각함에 대한 매우 특이한 정의지만, 출몰하며 흘러가는 생각을 잡는다고 이미지화하면 무척 가깝기도 하다. 가브리엘은 “모든 생물이 생각한다”고 본다는 점, 그리고 생각함은 봄, 들음, 맛봄 등과 함께 감각함의 일종이라고 본다는 점을 덧붙여두겠다. 특히 후자는 매우 중요하다.

4. 빵집들의 깃발처럼

앤디 클라크의 ‘확장된 마음’론도 재밌다. 요점은 생각이 우리 뇌나 마음속에서만 있지 않다는 것. 과거에 전화번호부나 수첩에 우리 생각들은 분산 저장해 놓았듯이, 지금은 폰이나 노트북에 많은 것을 저장해 놓는다. 덕분에 우리는 기억의 한계와 시간의 제약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간단한 계산으로 예를 들어보자. 3874 곱하기 25477를 종이와 펜, 숫자를 사용하지 않고 계산해보라. 암산만으로 삼천팔백칠십사를 이만오천사백칠십칠배 해보란 말이다. 그럼 금세 명백해진다, 종이, 펜, 숫자 등이 인간의 계산 활동에 보조물이 아니라 핵심 플레이어들이라는 것을.

계산만이 아니다. 거리의 신호등, 여러 가게들, 아스팔트길과 화단 및 자동차 등 모든 사물에 우리의 기억과 믿음은 저장되어 있다. “김과장, 그때 내가 뭐라고 했었지”라고 물을 때는 남의 기억에도 ‘불러오기’ 명령을 내린다. 사물들의 기억은 벽처럼 과묵할 때도 있지만 빵집들의 깃발처럼 펄럭이기도 한다. 마음과 물성 간에 동맹이 발발하면 예정에 없던 각도와 재질로 뻗어갈 수도 있다.

확장된 마음론을, 만물을 기억(상실)체로 보는 나의 견해와 결합시키면 더 재미진 사태가 5G로 상연된다.

앤디 클락

5. 기억(상실)체

나는 올해 4월초 <문자와 문양>이라는 학술 행사에서 세상 만물은 기억(상실)체라고 말했다. 이 발상은 육휘의 󰡔디지털적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새물결, 2021)에서 후설이 제안한 것도 본 적 있는데(몇 장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고 있다 ㅠ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도 한 두 번쯤 해본 생각일 것이다. 그 내실에서는 차이가 다소 나겠지만 말이다.

여기선 내 생각 중 강조하고 싶은 대목만 짚어두자. 나는 그냥 기억체가 아니라 기억(상실)체라 했다. 모든 기억이 다 쌓이고 저 깊숙이에 잠재되어 있다는 통상적인 기억론에 반대하는 뜻에서다. 기억이 불멸한다는 것은, 신을 포함해 심히 이상한 존재를 상정하지만 않는다면 참으로 부자연스러운 발상이다. 그래서 따로 논박할 필요도 없을 거 같지만, 의외로 학자들의 기억론에는 이쪽이 더 대세인 거 같아 ‘(상실)’로 강하게 표현해 넣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기억과 기억상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는 고가도로도 또 높은 산과 바다도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유지도, 변화도 불가능할 테니까.

6.

비슷한 애기를 카를로 로벨리는 (엔트로피에 대한 정보론적 해석에 기반하여) 원자연합체론으로 제시했다. 그는 원자론에 찬성하는데, 그냥 원자들을 개별자로서만 상정하지 않는 게 포인트다. 세상에 원자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개체는 없다. 모든 개체들은 일정한 구조와 형태로 모인 원자 집합체다. 한 개체의 원자배치태는 다른 개체의 배치태와 상호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한 개체의 배치태는 다른 개체의 배치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들고 있는 고스톱 패의 정보에는 다른 사람들의 패에 대한 모종의 정보가 들어 있다. 다른 놈들의 패는 내가 들고 있는 패를 제외한 것들의 배치태일 수밖에 없단 말이다. 우리 눈에 도달하는 빛은 그 빛이 거쳐온 대상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이게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의 실제 의미다). 바다의 색깔에는 그 위 하늘의 색깔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세포에는 그것을 공격하는 바이러스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새로운 생명체는 그 부모와 그 종과 상호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정보를 담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뇌 속의 원자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내 뇌 속의 원자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세계는 단지 충돌하는 원자들의 네트워크만은 아니고, 원자들의 집합 사이의 상호관계들의 네트워크기도 하며 물리계들 간의 상호적인 정보의 네트워크기도 하다.

7.

첨에 말했던 대로 “감성적 활동, 지각, 인과성, 이 단어들은 모두 거의 동의어다.”를 둘러싸고 생각해볼만한 꺼리들을 나열해보았다. 그렇지만 ‘인과성’까지는 나아가지 못해서 무척 분하다(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기도 하다). 서둘러 수습하고 끝내자면, 여기서 ‘인과성’은 (주의하시라!)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긴커녕 크게 다르다는 게 (충격적인) 핵심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론’으로 예를 들겠다.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고양이가 살아있을 확률과 죽어있을 확률은 반반이다. 죽어있든 살아있든 그 어느 결과도 그 직전 상황에 필연적인 원인(이나 조건)이 부재한다. 지각은 내가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정적인 과정이 아니라, 지각과 나의 변화가 동시에 발생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상황 또한 변화시키는 동적인 과정이다(참고로 나는 상호 구성주의자다). 이것이 지각 직전의 상황을 필연적 원인의 지위에서 끌어내린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을 제외한 자연과학 여러 분야에서 입증한 필연적인 법칙들은 어떻게 된 거냐고? 그건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경우, 그러니까 아주 드물고 희한한 경우만 모아서 구축한 탑이다. 수소2개와 산소 하나가 만나면 반드시 물이 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반응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일정한 온도와 기압이 함께 주어져야만 한다. 세상에 그런 상황이 얼마나 존재하겠는가? 나의 이 설명에 반론들이 수도 없이 쏟아질 것인데, 모쪼록 이런 의문이 솟아났을 때 당신에게서 “감성적 활동, 지각, 인과성, 이 단어들이 모두 거의 동의어”인 상황이 아울러 발생해주기를!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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