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연결이 아니라 상호침투하기 / 오영진

뉴욕타임스는 2년 전 유명인들의 원격연결 방송이라든가 화상회의 시 zoom 화면 배경에 있는 서재의 서적 목록을 분석했다. 모든 책의 제목을 알 수 있을 만큼 또렷하진 않았지만, 일부 책들은 구분이 가능한 수준으로 확대가 가능했고, 이들 서적 목록은 곧 그 사람의 최근 관심사나 성향을 드러내는 좋은 지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영화배우 로지 페레스(Rosie Perez)의 뒤에는 같은 브루클린 출신의 복서 마이크 타이슨이 쓴 [분명한 진실(Undisputed Truth)] 같은 책이 꽂혀 있었다. 그 아래엔 복서 알리를 다룬 책과 역시 타이슨과 관련한 또 다른 책이 놓여 있었다. 이로써 그녀가 복싱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는 것과 그 중에서도 타이슨의 스캔들과 관련해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아마존의 ceo 제프 베조스의 책장엔 달랑 6권 정도의 책만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확인된 책은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였다. 아마 대표적으로 구매하되 너무 두꺼워서 읽지는 않는 그런 책이 아닐까? 서적유통의 생태계를 바꾼 사람으로서 정작 본인 서재에는 책이 거의 꽂혀 있지 않다는 아이러니가 이 기사를 더욱더 흥미롭게 만든다.

하지만 독자의 댓글 중에는 뉴욕타임스가 이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탐색할 권리가 없으며, 법적인 기준 이상으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 줄 의무가 있는 언론이 되라고 질타가 있기도 했다.

https://www.nytimes.com/2020/12/11/books/celebrity-bookshelves-anthony-fauci-chris-rock.html?action=click&module=Editors



ZOOM을 통해 상호연결하는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우리는 서로를 상호침투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이것은 비난이 아니다.) 날마다 학생들과 원격교육을 하는 필자로서도 항상 신경 쓰이는 것은 화상으로 대면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카메라로 비치는 내 방의 구석구석과 브라우저 화면공유를 할 때 즐겨찾기 목록이라든가 카톡의 미리 보기 알람의 사적인 대화가 청중에게 보이는 일이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얼굴을 캡처하고 스토킹하는 행위가 벌써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ZOOM은 비대면의 연결기술 이상으로 연결하는 대상 안으로 침투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가상 화면 배경이라든가, 부분적 화면공유라든가 새로운 설정을 통해 이러한 상호침투를 기술적으로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익명으로 난입하는 청중의 테러를 여전히 막을 수 없으며, 만약 이를 통제하게 된다면 반대로 원격현전 기술의 편의성은 줄어들게 된다. 즉 ZOOM으로 대표되는 원격현전 기술의 편의성은 그만큼 우리를 웹이라는 공간에 노출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기술의 본질이 명시된 그 기능에 있지 않고, 그것을 초과해 대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뒤틀어 버린다는 것을 일찍이 통찰한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었다.


"마술사는 올려놓은 자신의 손을 통하여 거리를 조금만 좁히고 자신의 권위를 통하여 거리를 매우 늘이기도 한다. 외과의사는 거꾸로 처신한다: 그는 환자의 내부에 들어감으로써 환자와의 거리를 매우 좁히며 그의 손이 신중하게 환자의 기관 아래서 움직임으로써 거리를 약간 늘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법사(여전히 임상의 속에 잠복해 있는)와는 달리 외과의사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환자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기를 포기한다; 그는 오히려 수술을 함으로써 환자 안으로 들어간다. (중략) 마술사와 외과의사의 관계는 화가와 카메라맨의 관계와 같다. 화가는 작업할 때 주어진 대상에 대하여 자연스러운 거리를 지키지만, 그에 반해서 카메라맨은 대상의 조직으로 깊숙히 들어간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중 Walter Benjamin,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이 글에서 벤야민은 화가와 카메라맨의 차이를 마술사와 외과 의사의 차이로 설명하고 있다. 카메라맨은 화가처럼 대상과 거리를 두고 그것을 정직하게 재현하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외과 의사처럼 대상 내부로 파고들어 그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감각을 발명한다. 이 같은 지적은 으젠 앗제같은 작가가 파리를 어떻게 해부했는지 확인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그는 화가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의미가 없는 파리의 골목 골목을 아무런 사심 없이 기록했다. 대상과 시기가 불분명한 이들 사진을 통해 그 전에는 단 한번도 출현하지 않았던 무심한 관찰자가 탄생한다. 이 무심한 관찰자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들. 그러니까 거리가 뿜는 아우라와 보잘 것 없는 객체들을 사진 안으로 포획한다. 이 점에서 사진술은 단순한 재현기술을 넘어 도시 파리에 대한 해부기술인 셈이다.

사진가 으젠 앗제(Eugène Atget)가 찍은 파리의 풍경

상호연결을 꾀하는 기술의 발달사는 곧 근대 테크놀로지의 역사 그 자체다. 인간은 먼 것을 가깝게 현전 시켜 정보의 흐름과 공감 능력의 증대를 꾀했고, 이동속도를 높여 먼 곳에 더욱 빨리 도달해왔다. 향상된 인쇄기술을 통해 뉴스 페이퍼를 발행하거나 사진 현상기술을 통해 해상도 높은 화면을 전달하는 일, 라디오를 통해 먼 곳까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 기차나 자동차를 통해 이동의 자유도를 높이는 일을 통해 우리는 점점 상호연결되어왔다. 하지만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이들은 단순히 대상과 대상 간의 거리만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서로 침투되는 존재로서 새로 탄생하게끔 했다. 이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사진기의 발달은 몰래 찍는 기술을 더욱 유인하며, 이는 곧 우리가 모두 그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한 그렇게 대상을 해부하는 자는 그 전과는 다른 세계 감각을 얻게 된다. 당장 사용하는 카메라의 단렌즈를 망원렌즈로만 바꿔보아도 그것을 찍는 자는 완전히 다른 시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과거의 인간성에 비하면 그 감각적 특질과 도덕적 감성 모두 현격히 변화한 자로서 카메라적 시선을 내재한 새로운 테크노-휴먼이 될 가능성을 얻는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연결되는 상호주체는 서로에 대한 간섭과 혼용을 자연스럽게 유발한다. 만약 이 도식이 거의 모든 연결기술에 유효한 공식이라면 우리는 연결된다는 것의 감각이 실은 연결되기 전의 나를 기꺼이 잃는 일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기존에 사용하던 '연결(連結, connect)'이라는 말에는 이러한 위험이 전혀 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벤야민식대로 말하자면 거리를 여전히 둔 마술사의 방식으로 대상과 주체 사이를 사유하고 있는 셈이다. 특정기술은 사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 연결하는 능력뿐 아니라 대상 내부로 들어가는 능력도 의도치 않게 선물한다. 즉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외과 의사가 된다.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그 상호침투기술을 사용하는 누군가의 해부대상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언제나 상호연결은 곧바로 상호침투로 이어진다. 소위 감응 혹은 정동이론의 기초는 이 같은 상호침투의 입장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오영진(교과목 <기계비평>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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