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학사 공부. 박은식의 역사서 『韓國痛史』(한국통사)는 볼 때마다 새롭다. 처음에는 박은식의 서론과 결론에 눈길을 주었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니 나라가 멸망해도 역사를 보존해서 민족의 기억으로 공유하면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는 지은이의 심정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책은 국가 광복을 위한 역사서이니 이 책의 독법은 광복의 의지를 북돋는 정신적 원천으로서 국치(國恥)의 발견에 있을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의 독자가 한국의 국망사를 읽고 국치를 절실하게 느꼈다면 이 책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이를만하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독자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광복이라고 한다면 어느 나라의 광복인가, 국치라고 한다면 어느 나라의 국치인가? 그간 이 책을 사학사의 영역에서 너무나 자명하게 민족주의 역사학의 산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 한국의 광복을 위해 한국의 국치를 전달하는 국망의 역사서라고, 이 책의 역사적 의미를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책이 민국 4년(1915년) 6월이라고 하는 중화민국의 역사적 시간에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 해 5월 9일, 북경의 원세개 정부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굴욕적으로 수락했고, 이로 인해 중국에서 ‘국치’의 여론이 들끓게 되었는데, 명민한 출판사가 이 시세를 타고 『한국통사』를 출판해서 중국의 ‘국치’에 한국의 ‘통사’라고 하는 기름을 부었다. ‘적시성’(timeliness)의 문제는 모든 역사 문헌의 이해 맥락에서 우선적인 고려 대상인데, 한국통사의 경우 중국의 국치라는 맥락에서 통사의 새로운 의미를 얻는 것이다.
출판 연도와 함께 중요한 것은 출판사의 욕망이다. 출판사는 세계 각국의 근대사를 ‘강국 근사’와 ‘망국 근사’의 시리즈로 출판한 것을 기획했는데 한국통사는 ‘망국 근사’의 제2집 ‘고려사’ 편에 속하는 책이었다. 중국은 대략 1903년부터 ‘망국사 편역열(編譯熱)’이라 불러도 좋을 문화 현상이 있었고 이에 따라 이 주제에 대한 독자 수요를 예상할 수 있었다. 한국의 국망의 역사는 중국 독자에게 낯설지는 않았고 사실은 역사 소설의 형식으로 이미 독자에게 소비되고 있었다. 사실 ‘통사’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책도 남송의 멸망을 다룬 청나라 말기 오견인(吳趼人)의 역사소설 『痛史』(통사)인데, 어쩌면 출판사는 오견인의 ‘통사’에 기대어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중국인 독자에게 어필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출판사의 욕망은 한국의 ‘유로(遺老)’가 들려주는 진짜 망국사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한국 관련 역사 소설과는 차별성을 두겠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역사책의 이해 맥락으로 출판 연도와 출판사가 제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역시 역사책의 기본적인 이해는 지은이의 역사적 상황이다. 한국통사 서론과 결론에서 지은이 박은식이 그토록 국가 광복을 희구하고 있다면 그가 생각한 광복이란 무엇일까. 또, 그는 광복의 역사를 읽거나 쓴 적이 있는가. 한국통사의 서명에 들어간 ‘한국’은 1915년 출판 당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국가였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뒤 한반도의 지역 이름을 ‘조선’이라 불렀고 그래서 ‘조선’총독부를 두었다. 한국통사는 제목에 한국을 명기함으로써 한국을 다시 소환하는 효과를 거두었고, 이 책을 읽은 신규식은 박은식에게 광복의 역사를 집필할 날이 오기를 축원했다.
그런데 박은식에게 광복의 역사는 연원이 오래된 것이었다. 조선후기 사상사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명나라 멸망 이후 조선 사회에서 일어나는 중화 계승과 중화 회복의 문제인데 이것은 사학사의 흐름에서 볼 때에 명나라 멸망 이후 잔여 세력이 명맥을 이어간 남명의 역사에 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박은식은 20대 청년기에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유학을 공부했는데, 박은식의 유학 공부에서 중요한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이 경화학계에서 스승 홍승운(洪承運)의 지도를 받아 홍석주의 역사책 『속사략익전』(續史略翼箋)을 공부한 사실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대명의리론의 시각에서 남명의 역사 이후 언젠가 찾아올 광복의 역사를 기대했을 것이다.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광복의 관념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대한제국의 수립은 ‘독립’의 사건으로 간주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독립’의 역사서가 출현했다. 이 시기 현은(玄檃)이 번역한 『미국독립사』, 대한민국의 시기이지만 김황(金榥)이 편찬한 『독립제강』은 모두 ‘독립’의 역사서로 주목할만하다. 현은은 명실론(名實論)의 시각에서 미국 독립의 역사를 통해 대한제국 독립의 실질을 얻기를 원했다. 김황은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의 역사를 서술하고 그 역사의 본질을 ‘독립’으로 읽었는데, 대한민국에 앞서 대한제국의 ‘독립’이 있었음을 중시하는 역사인식이 확고했다.
문제는 대한제국이 을사늑약 이후 독립의 역사를 잃어버리면서 일어나는 광복 의식이다. 『대한매일신보』의 앙천통곡생(仰天痛哭生) 필명의 기고문은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민영환이 자결한 마음을 온 국민이 함께해서 대한제국을 광복하기를 바라는 내용이었다. 이 새로운 국면에서 정교는 한국의 광복에서 명나라의 광복을 생각하고 새롭게 남명의 역사서를 편찬했다. 신채호는 한국 고대사를 새롭게 논한 신문 연재물 「독사신론」에서 고구려는 멸망 후 즉각 존화양이(尊華攘夷)의 군사가 일어나 광복이 실현되었다고 논했다. 박은식도 대한제국 멸망 후 서간도에 망명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건국사 이야기를 지었는데 이것이 광복의 역사임을 분명히 말했다.
본래 조선 유학사에서 친근한 광복은 사마광의 역사책 자치통감의 사론에서 유래하는 ‘光復舊物’(광복구물)인데, 유방이 일으킨 한나라가 왕망에 의해 중단되었으나 다시 유수가 한나라를 회복했음을 이르는 말이었다. 이것은 본래 전한에서 후한으로 왕조의 회복을 의미하니 발해의 건국을 고구려의 광복으로 보는 것은 광복의 어법에 맞지는 않으나 왕조사를 넘어 민족사의 차원에서 광복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박은식이 광복의 관점에서 한국통사를 지은 본뜻은 발해 멸망 이후 발해의 역사를 짓지 않아 발해의 광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한국 멸망 이후 한국의 역사를 짓지 않으면 한국의 광복이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는 근심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독립’과 ‘광복’ 사이에 놓여 있는 ‘건국’이다. 대한제국의 수립과 쇠망을 배경으로 각각 ‘독립’과 ‘광복’의 역사인식이 형성되었음은 전술한 바 있다. 문제는 대한제국의 광무 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국망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박은식과 신채호가 각각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건국 이야기를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이 중에서 박은식이 번역한 『서사건국지』는 빌헬름 텔을 위시한 스위스 백성이 외국인 태수의 압제를 물리치고 자유를 회복하여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내용인데, 본래 독일 실러의 희곡에서 유래하는 이 작품은 중국에서 혁명의 정치의식을 고취하는 ‘정치소설’로 작동하였다. 박은식은 1907년의 새로운 상황에서 혁명과 건국의 문제에 깊이 공감하고 한국의 백성이 구래의 소설에서 벗어나 이러한 ‘정치소설’로 무장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는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신대한(新大韓)’을 말했다.
따라서 한국통사 편찬의 근본 정신이 민족사의 광복에 있다 할지라도 광복의 정치적 실천은 혁명과 건국으로 의식되었을 것이다. 박은식은 서간도 망명 시절 광복의 역사물은 물론 혁명의 역사물도 완성하였다. 그가 지은 연개소문과 명림답부의 전기는 각각 고구려 귀족정치 및 전제정치에 대한 혁명의 역사를 표출하였다. 그가 지은 『몽배금태조』는 조선시대에 학술혁명과 정치혁명의 주체가 없었음을 비판하고 새로운 혁명 주체 세력을 수립할 방안을 강구하였다.
혁명의 역사 서사는 『한국통사』에서도 발현되었다. 『한국통사』는 한국 근대사를 한국사(자강에 실패한 국망사), 동아시아사(인도가 결핍한 일본의 침략사), 세계사(근대 변혁 주체의 혁명사)로 이해하고 역사 인식의 사상적 키워드로 자강, 인도와 함께 혁명을 제시하였다. 혁명의 주체 세력으로는 흥선대원군, 갑신년 혁당, 그리고 동학당을 서술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각각 한국 귀족정치의 혁명, 세계혁명사의 법칙, 서구혁명의 혈광(血光) 등을 논급했다. 마침내 3.1이 분출하자 그는 혁명사의 집필에 착수했다. 『한국 독립운동의 혈사』는 3.1이 곧 정의와 인도의 기치를 올려 전고(前古)에 없는 맨손 혁명을 개창한 날이라고 논했다. 광복을 구성하는 혁명과 건국의 정치의식에서 본다면 건국사에 앞서 혁명사를 먼저 완수한 것이다.
지금까지 박은식의 역사책, 특히 ‘통사’와 ‘혈사’는 주로 사학사 분야에서 한국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의 산물이라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이들 역사책에는 역사를 읽어내는 키워드가 내장되어 있고 그러한 키워드는 대한제국의 수립과 쇠망을 배경으로 피어났기 때문에 사상사로 접근할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조선 말기 근대 초기 한국사에서 독립과 광복의 사상사, 혁명과 건국의 사상사는 사학사의 문헌을 통해 심층적인 이해가 확보된다. 사학사는 사상사와 어떻게 만나는가. 역사서 역사인식의 키워드 연구는 신문과 잡지의 표층 담론 연구와는 다른 심층 담론 연구의 차원에서 사상사 이해의 지평을 확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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