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라자로여, 밖으로 나오라 / 마준석

드러내 보임(Offenbarung)의 다른 가능성은,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을 때의 그런 기쁨 속에도 깃들어 있다.

―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고등학교 2학년 국어 시간이었다. 수행평가의 일환으로 우리들은 특정한 사안이나 작품에 대해 몇 차례 논평문을 작성해야 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가 서로로부터 배울 수 있도록, 제출된 글을 모두 이름을 지운 채 공개했다. 어쩌면 선생님의 의도와는 조금 달랐겠지만, 우리는 서로의 글로부터 장단점을 뽑아내기보다, 과연 이 글이 누구의 글인지 맞추는 놀이를 하느라 소란스러운 쉬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꽤 많은 친구들이 나에게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 “이거 너가 썼지? 그냥 왠지 너야.” 결코 좋은 글은 못되었음에도, 그 이름 없는 글들의 무수한 더미에서 내 글을 바로 알아봐주었다는 것. 바로 이 사실이 나에게 묘한 기쁨을, 일종의 사랑받음의 기쁨을 알려주었다. 어쩌면 그때의 작은 기쁨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험난한 세상에 철학을 공부한다는 인생 최대의 실수로 말이다. 그런 과오를 저지르면서까지 나는 사랑받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을 통해 매개된 사랑은 곧바로 의문에 부쳐지는데, 왜냐하면 언어는 오직 어긋난 만남만을 성사시켜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우리가 의도했던 바를 온전하게 전달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을 ‘사랑’이라고 이름할 때, 그 순간 사랑은 이미 누락되어 버리며, 우리에게 남은 것은 ‘사랑’이라는 글자가 제시하는 사랑의 흔적일 뿐이다. 따라서 언어는 결코 실재 그 자체를 말해낼 수 없다. 실재는 늘 말해진 것을 초과하면서, 말해진 것에 포착되지 않는 것으로 남아있다.

언어가 야기하는 이러한 실재의 누락은, “그냥 왠지”라는 친구들의 말에도 똑같이 발견된다. 뚜렷하게 인식할 수도 없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도 없는 모종의 이유로, 즉 “그냥 왠지” 이 글에서 나와 만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랑을 받았지만, 어느 지점에서 사랑받는지 결코 모른 채로 사랑받았다. 어쩌면 글 속에서 친구들이 발견한 ‘나’는, 실상 내가 아니었을 수도 있으며, 나아가 애초에 그 글에는 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쓴 글 속에서 나는 누락된 실재로서 남아있고, 글은 나 자신을 추방시킨 채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획득한다. 따라서 언어가 매개하는 만남이란, 언제나 내가 없는 곳에서만 성사되는 움직임일 것이다. 이를 우리는 라캉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 있겠다.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만, 내가 지니지 못한 것을 근거로 사랑받는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에 의존하는 한에서만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다. 도대체 연인들의 사랑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달콤한 속삭임? 정체 모를 약속들? 부산스러운 문자들? 설사 피부를 비비며 부둥켜보아도, 그 자체가 곧바로 사랑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음성, 문자, 신체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사랑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인될 수 없고 전해질 수도 없다. 그 각각의 대화들은 사랑이 순간적으로나마 현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며, 그런 한에서만 사랑은 그 자취라도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랑의 실재는 언어 속에서 누락되기에 말해질 수는 없지만, 사랑은 오직 말해지는 것에 의존해서만 실현되고 입증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의 진리는 결코 온전하게 말해질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전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사랑의 이중성이 있다.

분명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만, 내가 지니지 못한 것을 근거로 사랑받는다. 어찌하여 사랑을 받는지 나는 결코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으며, 심지어 내가 사랑받을만한 무언가를 실제로 지녔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 무엇도 내가 어째서 누군가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왜 나를 사랑해?”라는 물음은 해소되지 않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진리는 완전히 말해질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 사랑은 내가 지니지 못한 바로 그것이 실상 나의 진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오히려 사랑이, 은폐되었기에 주체가 지니지 못했던 진리를 비로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중요한 통찰을 김동규로부터 배울 수 있다. 한 명의 여자가 성모로 변모하는 것은, 순전히 그 여자가 지닌 개인적 역량이 이뤄낸 일이 아니다. 오히려 “무력한 아이가 여자를 어느덧 ‘성모’로 변신시킨” 것이다.(『철학자의 사랑법』, 96) 주체는 자신이 지니지 못했던 진리를 사랑함과 사랑받음의 관계 속에서 인수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타자들과의 역동적인 사랑은, 그 여자에게 수없이 많은 다른 진리의 가능성을 알려줄 것이다. 그녀는 자연을 사랑하며 혁명적인 환경 운동가가 될 수도, 불꽃과 쇳내음을 사랑하며 기술공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전까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글을 매개로 한 사랑을 건네받은 이후로, 내 삶은 기이하게도 철학 주변을 맴돌게 되었다. 주체의 행로를 결정적으로 밝혀주는 것은 오히려 타자의 사랑이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랑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짚었듯이, 사랑은 여전히 말해질 수 없으며, 주체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것으로 사랑받고, 사랑이 밝히는 진리는 주체의 외부에 놓여있다. 사랑은 주체에게 밀어닥치는 낯선 것으로서, 즉 주체 바깥의 타자로서 줄곧 남아있다. 따라서 사랑의 진리는 두 겹의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사랑은 분명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말해질 수 없는 것이고, 사랑이 밝히는 진리는 주체에게 내밀하되, 언제나 주체 바깥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이중성을 ‘사이로서의 사랑’(『철학자의 사랑법』, 84)이라 이름할 수 있겠다. 사랑은 말과 침묵 사이에, 안과 밖 사이에, 생명과 죽음 사이에,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순간적인 사건으로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올바르게 사랑한다는 것, 나아가 사랑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사랑을 손쉽게 실체화하지 않으면서 ‘사이로서의 사랑’을 그려내려는 끈질긴 기도에 다름 아니다. “라자로여, 밖으로 나오라.”(Lazare veni foras, 요한11:43) 그 기도는 한낮의 광명 속에 아름다운 라자로가 아니라, 동굴 틈 사이로 걸어나오는 라자로를, 베로 손발이 감긴 채 천으로 얼굴이 봉해진 라자로를, 병들고 악취나는 라자로를, 나흘 동안 썩다 만 라자로를, 생명과 죽음 사이의 라자로를 원한다. 그렇게 라자로는 말과 침묵 사이에서, 안과 밖 사이에서, 그 모든 경계들을 넘어선 하나의 기적으로서, 우리가 믿어왔고 추구했던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리고 그 무너짐 속에서 괴이하게도, 우리가 지니지 못했던 우리의 진리를 밝혀줄 것이다.

이처럼 ‘사이로서의 사랑’은, 낯익으면서도 낯선 섬뜩한(unheimlich) 매혹이다. 그리고 주체의 진리가 ‘사이로서의 사랑’과 얽혀 있는 이상, 그 진리는 어떤 사물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며, 또 획득하여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 밝히는 진리는 다시금 주체 바깥에서 그를 소외시킬 것이며, 주체는 또 추방된 채 빈손으로 남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의 진리를 진정한 주체의 진리로서 붙들기 위해 줄곧 싸워야만 한다. 라자로여, 부디 밖으로 나오라. 이름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한 사건으로서 이리 나오라. 사랑을 붙잡으려는 기도는 실상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며, 어쩌면 절망은 다시 절망으로 열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사랑의 출구 없는 이중성을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나가는 것이다. 이 끈질긴 인내심이 사랑에 대한 윤리의 본질을 이루며, 그 속에서 주체는 진정 자유로울 것이고, 그는 비로소 사랑의 주체로 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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