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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명적 폭력 시위 / 마준석

최종 수정일: 3월 11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이 24년 1월 2일부터 지하철 탑승 시위를 다시 시작했다. 기획재정부가 특별교통수단(장애인 콜택시) 예산 271억 증액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22일에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3주기를 맞아 시위가 진행되었다. 오세훈 서울 시장과의 대화가 목표였으나 서울시는 응하지 않았다. 장애인 권리 확보를 위해 시작된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는 이로써 3년 동안 57차를 맞았다. 그러나 언론과 시민의 관심은 22년 4월 13일에 있었던 당시 이준석 여당 대표와 박경석 전장연 대표 간의 토론회 때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사진 출처: https://www.beminor.com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탑승 시위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전장연이 보수 정권 하에서만 과도한 시위를 진행한다거나 전장연이 시위를 통해 요구하는 예산 증액이나 보조금이 전장연 연계 기관들의 이권과 직결되어 있다는 식의 비판을 차치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서울교통공사의 업무를 방해하며 철도안전법을 위반하고 있고 또한 개조된 휠체어를 활용한 경찰과의 과격한 충돌로 인해 실제로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무고한 시민의 출근길 일상을 ‘볼모’로 잡아둔다는 점이다. 장애인 이동권이 시위의 궁극적 목표가 아님에도 굳이 출근길 지하철을 시위 장소로 택한 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불편을 야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많은 옹호자들은 시위의 본질이 애초에 그런 것이라 주장한다. 시위의 목적은 문제 사안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알려서 여론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관계 기관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출근길 지하철 투쟁을 통해 전장연은 언론의 관심을 끌 수 있었고 시민들 간의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탈시설’이라는 개념도, 그리고 그 탈시설 정책이 UN 장애인권리협약에 의거한다는 사실도 전장연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출근길 시위가 의도적으로 시민의 불편을 야기하고 있다는 비판에 맞서 박경석 대표가 “고의가 들어가면 잘못된 겁니까? 시위는 모든 것에 있어서 고의가 있는 거예요”1)라 답했을 때, 이는 분명 올바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출근길 혼란을 겪는 시민들과 아울러 비장애인들이 관용의 정신을 발휘하면 된다. 사회는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닌가. 지금까지 장애인들이 겪었을 고통과 울분에 공감하며 각자 조금씩의 불편을 감내하자. 그리고 사회의 여타 구성원들이 배려해준다면 장애인 예산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은 이러한 ‘관용의 정신’이 시혜적 태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그가 상처받지 않게끔 조심해야 한다는 규칙은 실상 타자를 심약한 응석받이로 취급하는 것이며, 우리는 타자를 배려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타자보다 우월한 지위로 위치 짓는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이는 위선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관용 속에서 우리는 타자를 인정하지만, 그 타자가 우리의 존재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만 즉 이 타자가 진정한 타자가 아닌 한에서만 타자를 용납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앵벌이” 하듯이 동정에 호소하지 않고 싸워서 권리를 쟁취하겠다는 전장연의 목표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장연에 대한 시민들의 격렬한 반발은 관용이라는 값싼 위선보다 더 정당하고 타당하다. 적어도 시민들은 더 이상 장애인을 무조건 배려받아야 할 존재로 격하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민들의 질타와 모욕은 전장연에게 언제나 감당하기 힘든 것이겠지만, 박경석 대표가 스스로 밝히듯 욕설과 혐오가 상냥한 무관심보다 낫다.2)


사진 출처: https://www.sisain.co.kr


욕설과 혐오보다 전장연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은 시위 방식이 “비문명적”이라는 이준석 대표의 비난이었을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토론에서 박경석 대표는 이러한 비난이 낙인찍기이며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갈라치기라고 강변하면서 이준석 대표의 사과를 반복적으로 요구했다. 토론 이후 박경석 대표에게 호응하며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이준석의 오만함을 비판하는 논설이 쏟아져 나왔다. 선량한 시민과 불법적 난동꾼을 구분하고 후자를 배제하며 착실한 모범 시민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가부장적 권력의 고전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문명과 비문명의 잣대를 없애고, 그 누구도 낙오시키지 않는 보편적 공동체를 이룩해야 한다.3) 전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상의 한복판에서 고성과 폭력이 난무하는 전장연의 시위는 여전히 비문명적이지 않은가?


사진 출처: https://www.khan.co.kr

비문명적이다. 그러나 이준석 대표가 말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왜냐하면 전장연의 시위는 문명이 만들어 낸 비문명이고, 문명 내에 구조적으로 자리한 비문명이며, 문명 자체의 내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비문명은 문명의 힘이 닿지 않는 바깥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명이 이 비문명을 배제하는 한에서만 문명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명 내의 비문명은 본질적이고 필연적이다. 전장연은 그 자체로 문명의 실패지점을, 나아가 자본주의 내부의 부조리를 구현하고 있다. 

 

예컨대 정신없는 출퇴근길 버스에 기어코 오르려는 휠체어를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영화관이나 식당에서 갑자기 내지르는 반복적 괴성으로 짜증이 났었던가? 도전적 행동을 하는 학급 친구가 있었던가? 적어도 내 경우에 모든 대답은 아니오다. 대학생 때 한강 장애인 걷기 대회에서 진행 보조 봉사를 한 적이 있었다. 한강 산책길을 새까맣게 메운 장애인들을 보면서,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 숨어있다가 이렇게 뿜어져 나오는지 친구와 함께 놀라워했다. 그 모든 이들이 우리의 일상에 등장하지 않기에, 우리의 평화로운 문명 생활은 유지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문명인들이 즉 사회로부터 배제된 몫 없는 자들이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들의 몫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폭력성과 고의성을 지적해본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의 테러가 우리의 위선적인 사회 구조보다 더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가역적인 양극화를 초래하는 자본 시장과 우리를 끊임없이 착취하는 경제 구조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으면서도,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노여워하는 것에는 무언가 증상적인 점이 있지 않은가? 반대로 우리의 문명사회는 전장연의 비문명적 시위보다 더 거대한 폭력 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리는 전장연에 사회의 균열을 야기한다는 혐의를 덧씌우지만, 실상 균열은 애초부터 사회 자체에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비문명적 시위는 사회의 결여를 열어 밝힌다는 점에서 외상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점에서 사회적 혁명의 단초가 될 수 있다.

 

“본질을 갖고 전선을 만들고 싶어요. 그 본질은 뭐냐.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넘어선 새로운 관계예요. 그 씨앗이, 그 토질이 어디 있느냐. 바로 장애인에게 있어요. 최중증장애인에게 있어요. 이들이 전사예요. 존재 자체가 전사이고 존재 자체가 혁명적이죠. 그 혁명의 씨앗을 발견해내고 그 씨앗을 심고 그것이 싹틀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활동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농부죠. 30년의 세월은 그런 세월이었다고 생각을 해요.”4)

 

전장연의 첫 번째 강령은 “효율성과 경쟁이라는 사회 논리의 극복을 통한 새 세상의 건설”5)이다. 이 세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관계를,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말겠다는 그 터무니없는 과도함이 전장연의 미덕이며, 그들의 거친 투쟁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금전적 가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에 머물러 있는 한, “이 쓸모없어 보이는 최중증장애인들에게 집을 주고 일자리를 주고 하루 24시간의 활동지원 서비스를”6) 제공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장연의 폭력적인 투쟁이 목표로 하는 바는 단순히 장애인 권리 증진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변화와 사회구조 자체의 일대 변혁이다. 

 

여기서 투쟁이 폭력적이라 함은 물리적인 폭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의 실천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폭력이다. 자유란 단순히 A와 B의 선택지 중에서 구애받지 않고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란 선택지를 벗어나서 선택지 자체를, 나아가 물음 자체를 다시 쓰는 창조적인 힘이다. 기존의 질서에게 이러한 능력은 언제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일 것이다. 나는 오히려 전장연의 시위가 이 세상을 뒤집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는 차원에서 정말로 충분히 폭력적이었는지, 충분히 급진적이었는지를 되묻는다. 나는 전장연이 계속해서 ‘비문명적’이고 ‘폭력적’인 투쟁 집단으로 남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된 길에 많은 비난과 저주가 함께하기를, 그럼에도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기를, 그리하여 잊히지 않기를 기도한다.


사진 출처: https://www.beminor.com


1) JTBC 썰전라이브 토론회 (https://www.youtube.com/watch?v=oEhqfGYLh-o)

4) 박경석 대표 비마이너 인터뷰 

5)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강령 및 규약 (https://sadd.or.kr/rule)

6) 비마이너 인터뷰 같은 곳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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